트럼프가 베네수엘라 ‘문앞’까지 압박하는 이유
미국이 최근 베네수엘라 해안 인근에서 나포한 원유 운반선 ‘스키퍼(Skipper)’호가 2025년 12월 12일 남부 카리브해에서 과들루프 북쪽 약 20마일 지점에서 남서 방향으로 항해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 Vantor via AP/연합 트럼프 행정부가 베네수엘라의 원유 수출을 정조준하며 압박 수위를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가 미국 자산을 강제로 몰수했을 뿐 아니라, 현 집권 세력의 정통성 또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월 16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불법적인 마두로 정권은 도난당한 유전에서 생산된 석유를 이용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마약 테러리즘과 인신매매, 살인과 납치를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글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를 ‘불법 정권’으로 지칭했다.
백악관의 스티븐 밀러 부비서실장 역시 엑스(X)를 통해 “베네수엘라에서 미국 석유 기업들의 자산이 강압적으로 몰수됐다”며 “이는 기록상 가장 큰 규모의 미국 재산과 부에 대한 절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약탈한 자산을 테러를 지원하고, 살인범과 용병, 마약을 미국 사회로 유입시키는 데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측의 이 같은 ‘자산 탈취’ 주장과 함께 양국 간 갈등이 격화되는 배경에는 과거 베네수엘라의 국유화 조치가 자리하고 있다. 2007년 베네수엘라 정부는 당시 대통령이던 우고 차베스의 지시에 따라, 오리노코 벨트에 위치한 외국계 원유 자산을 전면 몰수했다. 이 지역은 세계 최대 규모의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엑슨모빌, 코노코필립스, 셰브론 등 미국의 주요 석유 기업을 비롯해 영국의 BP, 프랑스의 토탈, 노르웨이의 스타토일 등도 베네수엘라 정부와의 기존 계약에 따라 해당 유전 개발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프라이스 퓨처스 그룹의 수석 시장 분석가 필 플린은 에포크타임스에 “차베스 정권은 사실상 해당 계약들을 모두 파기해 버렸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분노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석유 자산 몰수
베네수엘라는 1976년 자국의 석유 자원을 국유화하며 미국 석유 기업들의 자산을 접수했다. 이에 대해 필 플린은 “많은 사람들이 ‘베네수엘라와 같은 조치를 취했던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며 “차이점은 그 국가들은 실제로 보상을 지불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엑손, 셰브론, 모빌, 텍사코로부터 아라비안 아메리칸 오일 컴퍼니(Aramco)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받았다. 같은 시기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리비아, 알제리, 나이지리아 등도 서방 석유 기업들의 자산을 국유화했다.
당시 미국은 각국이 자국의 천연자원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입장을 취하며 이들 국가에 대해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 대가로, 해당 국가들은 석유 기업들이 보유한 지분과 투자, 계약 가치에 대해 일정 수준의 보상금을 지불하거나 보상 방안에 합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베네수엘라의 자산 몰수로 피해를 입은 석유 기업들은 미국 및 국제 법원에 총 600억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법원들은 잇따라 이들 청구의 정당성을 인정해 왔다.

2025년 12월 23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국회 임시 회의에서 베네수엘라 국회 의장 호르헤 로드리게스(가운데)와 제1부의장 페드로 인판테(왼쪽), 제2부의장 아메리카 페레스(오른쪽)가 다른 의원들과 법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의회는 같은 날, 미국의 원유 운반선 봉쇄를 지지하는 자국민에 대해 장기간의 징역형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 Federico Parra /AFP via Getty Images/연합
가장 최근인 올해 1월에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가 2022년 미국 연방법원의 판결을 지지하며, 베네수엘라가 코노코필립스에 85억 달러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국 에너지 연구소의 최고경영자 제이슨 아이작은 에포크타임스에 “베네수엘라는 장비와 시설, 계약상 권리를 포함해 미국 소유의 석유 자산을 몰수한 뒤 국제 법원이 명령한 보상을 거부해 온 기록이 분명히 존재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처럼, 베네수엘라가 미국 석유 기업들의 자산을 탈취한 것이 맞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정권 지도자 니콜라스 마두로는 미국이 약 20년 전 국유화된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을 권좌에서 축출하려 하고 있다며, 이를 남미에서의 미국식 식민주의 시도로 규정했다.
그러나 마두로의 대통령직 정통성을 둘러싼 논란도 확산되고 있다. 2024년 대선에서 베네수엘라 유권자들이 마두로의 경쟁자인 에드문도 곤살레스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왔다. 그럼에도 마두로는 선거 승리를 주장하며, 국가 안보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해 왔다.
이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1월 10일 성명을 통해 “마두로는 2024년 대통령 선거에서 명백히 패배했으며, 대통령직을 주장할 어떠한 권리도 없다”고 밝혔다. 국무부는 같은 성명에서 마두로와 그의 측근들을 겨냥한 제재 조치도 함께 발표했다.

베네수엘라 지도자 니콜라스 마두로가 2025년 11월 25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포르트 티우나 군사기지에서 열린 집회에서 남미 해방 투쟁의 상징인 시몬 볼리바르의 검을 들고 연설하고 있다. 이 집회는 미국의 대(對)베네수엘라 조치에 반대하기 위해 열렸다. | Leonardo Fernandez Viloria /Reuters/연합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
이번 분쟁의 이해관계는 매우 크다. 월드 팝퓰레이션 리뷰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약 20%에 해당하는 3000억 배럴 이상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돼 세계 최대 석유 매장국으로 평가된다. 이는 미국의 매장량보다 약 7배 많은 규모다.
아울러 미국은 베네수엘라가 생산하는 중질 원유에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캘리포니아 소재 운송연료 컨설팅 업체 스틸워터 어소시에이츠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멕시코만 연안의 정유시설은 국내 셰일 유전에서 생산되는 가볍고 황 함량이 낮은 원유보다, 베네수엘라산과 같은 중질 원유를 처리하도록 설계됐다.
보고서는 “베네수엘라산 원유에 대한 접근이 확대될 경우, 제재 이전 수십 년간 미국 정유시설이 처리해 왔던 방식으로 부분적인 복원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프라이스 퓨처스 그룹의 필 플린도 “미국의 정유 시설은 상당 부분 베네수엘라산 중질 원유를 정제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중질 원유의 또 다른 주요 공급원은 러시아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해당 물량 역시 제재 대상이 됐다. 플린은 “제재로 인해 공급이 위축된 상황에서 베네수엘라산 원유가 다시 공급된다면, 이는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 전체에 큰 호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베네수엘라산 원유 수출이 회복될 경우, 멕시코만 연안 정유시설은 설계 용량에 맞는 생산 수준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1990년대 전성기 당시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최대 해외 원유 공급국으로, 미국 원유 수입의 약 5분의 1을 차지했다.
플린은 “마두로가 퇴진하더라도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을 회복하는 데 수년이 걸릴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며 “중질 원유에 대한 수요가 강한 만큼, 산업은 즉각적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25년 12월 18일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인근 마라카이보 호수에 정박해 있는 원유 운반선 옆으로 한 척의 보트가 지나가고 있다. | Alejandro Paredes /AFP via Getty Images/연합
사회주의로 무너진 국가
한때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고, 세계에서도 20대 부국에 속했던 베네수엘라는 1998년 사회주의자 우고 차베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이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국외교협회가 2024년 발표한 보고서는 베네수엘라를 “실패한 석유국가의 전형”으로 규정했다. 보고서는 국가 부를 창출해온 석유 산업이 “적절한 투자와 유지·보수를 받지 못한 채 수십 년간 방치돼 왔다”고 지적했다.
산업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석유 부문은 여전히 정부 재정 수입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어 베네수엘라가 석유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2014년부터 2021년 사이 약 75% 급감했으며, 2023년에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기존 석유 제재를 일부 완화하면서 소폭 반등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기 집권 직후, 바이든 행정부의 석유 관련 양보 조치를 뒤집고 재무부를 통해 베네수엘라에서 활동하던 셰브론의 라이선스를 종료했다. 이후 7월에는 제한적 조건 하에서 셰브론의 현지 운영을 허용하는 새 라이선스를 부여했다.
이어 12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를 오가는 제재 대상 원유 운반선의 전면 봉쇄와 함께, 현 정권을 외국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이후 여러 척의 유조선이 나포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베네수엘라는 남미 역사상 가장 큰 함대에 의해 완전히 포위돼 있다”며 “이 조치는 더 확대될 것이고, 그 충격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과거 우리에게서 훔쳐 간 석유와 토지, 기타 자산을 모두 미국에 반환할 때까지 조치는 지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25년 12월 18일 베네수엘라 푸에르토 카베요에 위치한 ‘엘 팔리토(El Palito)’ 정유공단 내 휴고 차베스 석유화학 시설의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2월 16일 베네수엘라를 오가는 모든 제재 대상 원유 운반선에 대한 봉쇄 조치를 발표했다. | Jesus Vargas/Getty Images
한편 트럼프 행정부는 9월 이후 베네수엘라발 마약 운송이 의심되는 선박을 대상으로 29차례의 타격 작전을 수행했다. 봉쇄 발표 직후 국제 유가는 소폭 상승했지만, 분석가들은 이번 조치가 에너지 시장 전반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에너지 연구소의 제이슨 아이작은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대부분은 제재를 회피하는 중개업자들을 통해 그림자 유조선, 선박 간 환적, 재라벨링 방식으로 중국에 흘러가고 있다”며 “이는 투명한 시장 밖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거래돼 마두로 정권의 생존을 돕는 물량”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거래를 차단하면 주로 미국 제재를 무시해 온 구매자들이 타격을 받을 뿐, 글로벌 원유 시장 전체에는 제한적인 영향에 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기호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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