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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역사적 시각에서 본 중국 공산당의 항일전쟁 거짓말

2025년 09월 08일 오후 4:15
당시의 항일전쟁 역사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왜곡돼 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항일전쟁을 수행한 것은 중화민국 국군이었고, 공산군은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채 은밀히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사진은 1930년대 중화민국 국군 병사의 모습이다. | 공개 자료당시의 항일전쟁 역사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왜곡돼 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항일전쟁을 수행한 것은 중화민국 국군이었고, 공산군은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채 은밀히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사진은 1930년대 중화민국 국군 병사의 모습이다. | 공개 자료

9월 3일은 항일전쟁 승리 8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 기념일을 ‘대일항전 승리 기념일’로 가장 먼저 제정한 것은 중화민국이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이 중국 대륙에서 중화민국을 몰아냈고, 그 후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9·3’ 열병식을 개최한 적은 없었다.

이는 중공의 항일 활동이 사실상 선전용에 불과했고, 일본군과의 관계에도 불투명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만약 대규모 ‘9·3’ 열병식을 치른다면 오히려 항일전쟁에 대한 중공의 거짓 선전이 드러날 위험이 컸던 셈이다.

하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이러한 관례는 깨졌다. 그는 2015년에 이어 2025년에도 ‘9·3’ 열병식을 강행했다. 무력을 과시하고 권력을 내세우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전 세계에 중공의 항일전쟁 거짓말이 더욱 크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필자는 중공 100년 역사의 시각에서 볼 때, “중공이 항일전쟁의 주도 세력이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거짓과 왜곡으로 점철돼 있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한편, 마일즈 유 전 미국 국무부 중국문제 수석보좌관은 중공의 9·3 열병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중공의 손에 죽은 중국인은 아편전쟁 이후 외세 침략으로 희생된 중국인 전체보다 몇 배나 많다. 이 점을 기억해야 중공의 잔혹성과 파렴치함을 이해할 수 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반우파 탄압을 잇달아 추진했다. 그 결과 중국 전역에서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대기근이 발생했다.

전 신화통신 수석기자 양지성(楊繼繩)은 20년에 걸친 조사 끝에 방대한 역사 기록서 ‘묘비—중국 1960년대 대기근의 진실’을 집필했다. 그는 참혹했던 12개 성의 ‘인재(人災)’를 중점적으로 기록했으며, 조사 결과 전국적으로 3600만 명이 아사했다고 밝혔다.

양지성은 대기근의 규모를 이렇게 비교했다.

•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사망자의 450배,
• 1976년 당산 대지진 사망자 24만 명의 150배,
• 제1차 세계대전 사망자 1000만 명을 훨씬 상회하는 수치,
• 제2차 세계대전 참사(사망자 4000만~5000만 명)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는 “이 대기근은 기후 이상도, 전쟁도, 전염병도 없는 상황에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비극이었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심지어 ‘인육을 먹는’ 사건까지 발생했다”며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기괴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8년간의 항일전쟁에서 중국군과 민간인 사상자는 350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양지성의 연구에 따르면, 중공의 극좌 정책으로 인한 3년 대기근에서 그보다 더 많은 3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 중공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의 참모이자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소 소장을 지낸 천이쯔(陳一咨)는 내부 문건을 토대로 작성한 비밀 보고서를 통해 당시 대기근 사망자가 4300만~4600만 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중국 전통문화에는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이어서 함부로 할 수 없다(人命關天)”는 말이 있다. 그러나 중공은 단 한 차례의 대기근으로도 3600만~4600만 명에 달하는 국민을 굶주림 속에 내몰았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죄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은 지금까지 이 참혹한 인재에 대해 반성이나 참회를 한 적이 없고, 교훈을 얻지도 않았다.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을 뿐이다. 생명을 경시하는 이러한 정권이 과연 진정으로 항일을 했을 리 있겠는가.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선양(瀋陽) 유조호(柳條湖)에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불과 5개월 만에 중국 동북 3성이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중공의 관심은 항일이 아니었다. 당시 중공의 목표는 중화민국 내부에서 ‘공산 국가’를 세워 합법 정부였던 중화민국을 전복하는 것이었다.

1931년 11월 7일, 소련 국경일에 맞춰 중공은 소련의 지휘 아래 장시성 루이진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웠다. 이는 소련 모델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같은 날 채택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헌법대강’ 제14조는 몽골, 회족, 티베트, 먀오족, 리족, 고려인 등 중국 내 소수민족을 선동해 각각 ‘독립운동’을 벌이도록 부추겼다. 다시 말해, 중공은 중화민국을 사분오열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날 통과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 대외선언’에는 항일 의지는 단 한 줄도 담기지 않았다. 선언문은 국민당 정권 전복을 목표로 내세우는 한편, 자신들을 “세계에서 유일한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련의 가장 훌륭한 친구이자 동맹자”라고 규정했다.

1934년 10월까지 중화민국 정부는 중공이 세운 불법 정권을 겨냥해 다섯 차례에 걸쳐 ‘포위 토벌전’을 전개했다. 다섯 번째 토벌에서 패한 중공은 장시 지역에서 철수하며 이른바 ‘장정(長征)’을 시작했으나, 이는 항일을 위한 북상이 아니라 사실상 철저한 도피극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동북과 화북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만약 중공이 주장한 것처럼 ‘북상해서 항일하는 것(北上抗日)’이 목적이었다면, 이 방향으로 진군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1936년 10월, 홍군이 황허(黃河) 강가에 도착했을 때 지도부는 오히려 2만1800명을 ‘서로군(西路軍)’으로 편성해 황허를 건너 서북 지역으로 파견했다. 이곳은 일본군이 전혀 주둔하지 않은 지역으로, 목적은 소련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1936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50여 일 동안 서로군은 치롄산 기슭의 좁은 지역에서 현지 군벌인 마가군(馬家軍)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그 결과, 2만여 병력은 일본군을 단 한 명도 섬멸하지 못한 채 내전에 휘말려 사실상 전멸했다.

같은 해 12월 12일에는 시안사건이 발생했다. 중공과 비밀리에 내통하던 장쉐량(張學良)과 양후청(楊虎城)이 시안에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자 행정원장이던 장제스(蔣介石)를 불법 감금한 것이다. 당시 중공은 장제스의 지도 아래 항일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그를 제거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중공의 ‘상전’인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지시를 내렸다. “중공은 반드시 장제스와 손잡고 항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나선 이유는 중국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안보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소련이 동쪽에서는 일본, 서쪽에서는 나치 독일의 협공을 받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소련을 지키기 위해 스탈린은 중공에 장제스를 살해하지 말고, 오히려 그의 지도 아래 항일에 나서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은 이미 중공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항일전쟁을 이끌 수 있는 지도자는 중화민국의 장제스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중공에 막대한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한편, 절실히 필요로 하던 자금도 지원했다.

1938년 1월, 소련군 참모총장 추이코프가 비밀리에 옌안(延安)을 방문해 마오쩌둥에게 스탈린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너희가 항일에 나서는 것은 장제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며, 전 세계 노동계급의 조국인 소련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그는 3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직접 중공에 전달했다. 이후 스탈린은 소련 재무성을 통해 30만 달러를 추가로 보내며 중공을 ‘격려’했다.

결국 시안 사건 이후 중공이 장제스의 지도 아래 항일을 수용하게 된 것은, 상당 부분 스탈린의 강요에 따른 결과였다.

1937년 7월, 일본군과의 전면전이 발발한 뒤에도 중공은 스탈린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기 위해, 그리고 ‘애국’하는 척하면서 장제스에게 군자금을 요구하기 위해 단 몇 차례의 전투만을 치렀을 뿐이었다.

항일전쟁 전체 기간 동안 중공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일본과의 전투가 아니라 중화민국 전복이었다. 당시 중공의 전략은 “항전은 1%, 선전은 12%, 세력 확장은 100%”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때문에 전쟁 기간 내내 중공은 요란한 항일 구호를 외쳤지만 실제 행동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일본군과 장제스 국민정부가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틈을 타 세력 확장에만 주력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중공의 군대는 전쟁 전 2만 명 수준에서 약 120만 명으로 불어났고, 민병대는 260만 명을 넘어섰다. 중공이 장악한 근거지는 19곳으로 확대됐으며, 면적은 약 100만㎢, 인구는 1억 명에 달했다.

당시 마오쩌둥의 제1의 적은 일본군이 아니라 장제스였다. 그는 “일본군이 중국 땅을 더 차지하게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며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실제로 1939년부터는 고위 정보요원 판한녠(潘漢年)을 일본군과 괴뢰정권인 왕징웨이(汪精衛) 정권에 보내 반(反)장제스 협상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훗날 1955년 마오가 판한녠을 체포해 옥사시킨 배경에는, 이 같은 내밀한 거래가 폭로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그러나 “비밀을 지키려면 애초에 저지르지 말라”는 말처럼 은폐는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2015년 일본 도쿄복지대학 엔도 호마레(遠藤譽) 교수는 일본 외무성 기밀 해제 문서와 일본 첩보원의 회고록을 토대로 ‘마오쩌둥과 일본군의 결탁의 진상’을 출간했다. 이듬해에는 미국에서 중국어판이 출간되면서 마오의 일본군 결탁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한편 2025년 9월 3일, 시진핑은 베이징에서 ‘항일전쟁 기념’을 명분으로 또다시 ‘9·3’ 열병식을 강행했다. 같은 날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라이언스 국장 대행은 언론 브리핑에서 “미국이 공해상에서 300톤 이상 분량의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제조 원료 화학물질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이 선박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바로 중공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있는 상하이항이었다. 라이언스 국장 대행은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마약 전구체 적발 사례”라며, 해당 물질로 19만㎏의 메스암페타민을 생산할 수 있고 시장가치는 약 5억6900만 달러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1~3월 사이, 미국 정부는 중공이 수출하는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총 20%의 관세를 부과한 바 있다.

중공은 마약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견지하며 가장 엄격한 통제와 처벌을 시행해 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미국이 여전히 중공산 펜타닐에 대해 2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 당국은 최근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한 300여 톤 규모의 마약 전구체 화학물질을 적발했다.

중공은 창당 이래 어떤 거짓말이든, 설령 그것이 하늘을 뒤덮는 엄청난 거짓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움 없이 일삼아 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일각에서는 미국으로 유입되는 펜타닐 사태를 두고, 실질적으로 중공이 미국을 겨냥해 벌이는 현대판 ‘아편전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 같은 일은 이미 1940년대 항일전쟁 시기에 중공이 벌였던 일이다. 1941년, 마오쩌둥은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아편을 생산·판매하는 방안을 직접 승인했다.

‘진수변구 재정경제사(晉綏邊區財政經濟史)’에 따르면, 당시 대외무역에서 ‘특상품’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다. 1943년부터 “특상품은 7~8년간 서북지역에서 재정을 지탱하고 금융을 안정시키며 무역을 순환시키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며 “재정 지출의 약 70%를 해결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말하는 ‘특상품’이란 다름 아닌 아편이었다.

국난의 시기, 중화민국 국군 병사들이 항일 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 동안, 중공은 아편을 대규모로 재배·제조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국민당 지구로 운송·판매했다.

1942년 2월 6일, 연안에 있던 작가 샤오쥔은 일기에서 “아편을 제조해 연초용으로 가공한다는 재정청장의 보고를 듣고 몹시 괴로웠다”고 적었다. 그는 중공의 ‘아편경제’를 보며 “혁명의 꽃이 가장 추악한 땅거름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1941년 4월, 중공의 상전인 소련이 침략국 일본과 ‘소일중립조약’을 맺자, 일본의 대(對)소련 전쟁 위협이 사라진 소련은 즉시 중국 항전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이에 중공도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항일전은 뒷전이었고, 오히려 항일 중화민국 국군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중공 국방대학 부교장 허우수둥의 글에 따르면, 8년 항전 기간 동안 공산군은 중화민국 국군을 상대로 3200차례 전투를 벌였고, 사살 및 부상당한 국군은 14만 3000명에 달했다.

당시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중공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산 독립국가’를 세우고 중화민국을 전복하려는 음모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 8년 항전 기간 내내 마오쩌둥은 한 번도 항일 전선에 나선 적이 없었다.
• 연안 대강당에서는 밤새도록 무도회가 열렸고, 술과 춤이 끊이지 않았다.
• 중공은 일본군과 비밀리에 내통하며 서로 공격하지 않는 암묵적 합의를 유지했다.
• 아편 장사는 성황을 이루며 나라와 국민을 해쳤다.

항전이 끝나자 중공은 곧바로 ‘과실 따먹기’에 나섰고, 항일 전선에서 “한 치의 국토를 위해 한 방울의 피”를 흘리던 중화민국 국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이다.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은 수많은 중화민국 국군 병사들이 중공의 총부리 앞에서 희생됐다.

여우마오춘은 “중공 정권은 중국인들의 백골 위에 세워진 정권”이라고 지적했다. 과연 옳은 말이다. 실제 역사는 이를 입증한다.

1920년대, 중공은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켜 수많은 중국인을 살해했다.
1930년대, 중공 상장 샤오화의 회고록에 따르면, 중앙 소구(蘇區)에서만 반혁명 숙청으로 10만 명의 중국인이 희생됐다.
1940년대, 창춘에서는 ‘창춘 아사전’ 기록에 의하면 37만~46만 명의 민간인이 굶어 죽었다.
20세기들어 1950~60년대 중공은 대기근(大饑荒)을 초래해 3600만~4600만 명의 중국인이 아사했다.

이어진 10년간의 문화대혁명에서는 정확한 사망자 수조차 집계할 수 없다. 덩샤오핑은 훗날 “그것은 천문학적인 수치이며, 영원히 추산할 수 없는 숫자”라고 말한 바 있다.

1989년에는 덩샤오핑이 주도한 ‘6·4 톈안먼(天安門) 유혈 진압’이 벌어졌다.

또 1999년부터 2025년까지 26년간, 중공은 파룬궁 수련자를 박해하며 “대규모 장기적출 방식”으로 살해해 왔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왔다. 이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집단학살죄, 고문죄, 반인류범죄라는 지적을 낳았다.

올해 9·3 열병식을 앞두고는 시진핑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장기이식’과 ‘영생’을 논의하는 녹음 파일이 유출돼 세계 여론을 뒤흔들었다.

로이터통신은 두 정상의 대화를 4분짜리 영상으로 편집해 전 세계 1000여 개 언론사에 배포했으며, 이 영상은 국제 주요 방송사와 TV 채널을 통해 확산됐다. 이로써 중공의 ‘대규모 파룬궁 수련자 장기적출’ 의혹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한층 고조됐다.

중공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학살 규모는 일본군, 히틀러, 스탈린은 물론 고금의 모든 폭군들의 그것을 넘어선다.

따라서 “중공이 항일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이제 폐기돼야 할 허황된 거짓말일 뿐이다.

*이기호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