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 간첩 혐의로 체포·구금된 우리나라 선교사와 관련해 양국 간의 협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선교사 석방 가능성은 아직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러시아가 선교사를 체포·구금한 지 2개월이 지나서야 협의할 뜻을 밝힌 것부터 좋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와 중국 현지 소식통들은 이번 일이 탈북길이 사실상 막혔다는 뜻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 간첩 혐의로 러에 붙잡힌 백 선교사…소식통 “러, 우크라 전쟁 후부터 탈북민 단속”
백 선교사가 속한 ‘지구촌 사랑의 쌀 나눔재단’ 측은 러시아가 백 선교사를 간첩으로 몰고 있는 게 황당하다면서 조만간 탄원서를 작성해 외교부와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백 선교사가 작가로 위장한 뒤 일급기밀을 수집해 해외 정보기관에 넘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내 탈북민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은 지난 12일 한국인 선교사 백 모 씨가 지난 1월 말 FSB에 체포되기 훨씬 전부터 러시아 당국이 탈북민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고, 탈북민을 돕는 사람들을 소환해 경고하거나 감시하는 등의 압박을 취해왔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전에 러시아 당국은 탈북민은 물론 그들을 돕거나 탈북을 지원하는 활동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뒤 그해 하반기부터 큰 변화가 생겼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 당국은 2022년 하반기부터 경찰과 FSB를 동원해 탈북민을 찾아내 체포해 강제 북송을 했고, 탈북민을 돕는 한국인은 물론 자국민에 대해서도 단속을 시작했다. 소식통은 2022년 말에 지인인 고려인 A씨 부부에게서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고려인으로 러시아 국적인 A 부부는 수년 동안 탈북민들을 돌보고 지원했다. 그들의 생활을 연민한 인도적 지원이었다. 그런데 2022년 12월 갑자기 지역 경찰서에서 A씨 부부를 호출했다. 경찰은 “더 이상 탈북민을 돕지 말라. 계속 그러면 ‘반국가 활동’ 혐의를 적용해 체포하고 자산도 모두 몰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러시아 경찰은 이어 A씨 부부가 도와주던 탈북민 2명을 찾아내 구금했다. 러시아 경찰에 붙잡힌 탈북민들은 강제 북송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A씨가 외출을 할 때면 가는 곳마다 경찰차가 따라붙는 등 감시까지 했다. 결국 A씨는 그 후로 지금까지 탈북민 지원 활동을 완전히 접었다는 게 소식통의 설명이었다. 소식통은 “이런 식의 탈북민 지원활동 금지와 관련자 감시의 배후에는 당연히 FSB가 있다”고 강조했다.
◇ 현지 소식통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北 보위부 요원들 광범위하게 활동”
러시아 FSB가 레프로토보 구치소에 구금 중인 선교사 백 씨 또한 탈북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는 탈북민이라도 난민증을 받으면 난민캠프에 입소할 수 있고, 여기서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올 수 있다. 하지만 난민증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게 문제다. 이때 만약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북한 보위부 요원에게 납치되면 그대로 북송돼 버리기 때문이다.
지난 13일 KBS는 러시아 소식통을 인용해 “최근 러시아가 북한과 밀착하면서 현지에서 탈북민들을 돕는 한국인들이 추방되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제게 도움을 줬던 분도 러시아에서 추방 명령을 내려서 5년 동안 (러시아에) 못 들어가게 됐다고 하더라”면서 “북한의 단속도 한층 강화돼 심지어 탈출한 노동자를 추적해 다시 납치해 가기도 하는데, 러시아 당국도 눈감아주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지난 12일 접촉한 러시아 소식통들은 “국내에서는 잘 모르지만 극동 지역을 포함해 러시아 곳곳에 북한 보위부 요원이 활동 중”이라고 전했다. 중국 국경 일대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보위부 요원들이 탈북민들을 찾아내 강제 북송하기 위해 혈안이라는 것이었다. 중국과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심지어는 전직 보위부 요원들도 중국 국경과 러시아 극동 지역에 거주하면서 현지 마피아나 조직폭력배와 관계를 맺고 이들에게 돈을 줘 탈북민과 이들을 지원하는 한국 선교사를 추적·감시하거나 심하면 납치해 북송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소식통은 “이번 백 선교사 체포·구금의 배후에 북한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자칫 백 선교사가 강제 북송되기 전에 우리 정부가 빨리 나서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소식통들 “러의 탈북민 단속, 이념이나 北 동조 아니라 동맹 얻으려는 행동”
러시아의 다른 소식통은 러시아 당국이 탈북민과 이들을 지원하는 사람을 체포·구금하는 것은 북한에 동조하거나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가 이러는 것은 이념이나 북한에 동조해서라기보다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뒤 동맹을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이 모종의 거래를 했거나 김정은의 요구를 들어준 게 아닌가 의심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러시아 당국의 단속으로 현재 러시아 극동 지역에는 벌목공을 비롯한 북한 근로자가 거의 없다. 탈북자를 돕는 사람도 이제는 거의 없다고 한다. 게다가 지난 1월 말 FSB가 선교사 백 씨를 체포한 사건이 알려지자 북한인권운동가들은 향후 러시아에서 탈북민 지원 활동을 펼치지 못하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지난 12일 강동완 동아대 교수 겸 하나센터장과의 인터뷰를 전했다. 2016년부터 러시아 탈북민과 북한 노동자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해왔던 강동완 교수는 3월 말 계획했던 블라디보스토크 방문 계획을 재고하고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강동완 교수도 백 선교사 체포·구금을 두고 “결국 북한 당국은 현장의 노동자들을 통제하고자 했을 것이고, 그러한 요청을 러시아가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방송은 “지난해 7월 중국이 반간첩법 개정안을 시행한 뒤 중국을 방문하려던 선교사들이 계획을 포기하고 현지 교회 문을 닫기도 했다”며 “사실상 중국 내 탈북민 관련 활동이 불가능해졌다고 활동가들은 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우리 정부는 백 선교사 석방을 위해 러시아 측과 협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또한 늦었지만 우리 정부와의 협의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13일(현지시각)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백 씨에게 영사 접견권을 부여하기 위해 한국 측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백 씨가 간첩 혐의를 받는 만큼 수사 과정에 대한 세부 내용은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