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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공지능 시대, 지능이란 무엇인가?

2026년 01월 11일 오전 7:18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중 일부. 프레스코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1508~1512년. | Public Domain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중 일부. 프레스코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1508~1512년. | Public Domain

1990년, 프랭크 메슈버거라는 이름의 한 의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회화 작품을 바라보다가, 이전까지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는 흥미로운 특징을 발견했다.

그가 주목한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약 500년 전 제작한 ‘아담의 창조’로, 현재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 걸려 있다. 이 작품은 수세기 동안 수없이 복제되며 전 세계에 알려졌고, 학자와 신학자, 예술가들의 연구 대상이 돼 왔다. 또한 이 그림을 직접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수백만 명의 방문객이 성당을 찾았다.

메슈버거는 그림 속에서 신을 감싸며 앞으로 이동하는 듯한 유려한 형상이 인간의 뇌 해부학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정밀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외곽선은 대뇌 반구의 형태와 일치했고, 내부의 굴곡은 이미 알려진 뇌 구조와 맞아떨어졌다. 이러한 유사성은 한번 인식하면 쉽게 지워지지 않을 만큼 뚜렷했다.

이 발견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질문을 불러왔다. 화가이자 조각가, 시인이며 해부학에도 정통했던 미켈란젤로가 신의 존재를 인간의 뇌와 유사한 형상으로 표현했다면, 이는 지능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산물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부여받는 것, 즉 선물과 같은 것임을 암시한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기 동안 지능은 곧 지혜를 의미해 왔다. 이는 판단력과 도덕적 분별력, 그리고 사물의 의미와 맥락, 결과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리켰다. 지능은 사고의 속도보다는 사물을 얼마나 명확하게 인식하느냐의 문제로 여겨졌다.

새로운 사상 역시 ‘만들어낸다’기보다 ‘도래한다’는 표현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가와 발명가, 사상가들은 영감과 통찰, 계시를 통해 아이디어가 찾아온다고 말해 왔다.

이처럼 지능은 인간이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에 참여하는 개념으로 이해됐으며, 개인을 초월하는 존재로 인식됐다. 인간은 지능의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매개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근대에 들어 점차 힘을 잃었다.

과학이 발전하고 사회가 산업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지능은 이성, 논리, 분석, 문제 해결 능력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실험과 검증이 가능하고, 표준화와 측정이 가능한 능력이 점점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재정의는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지식은 전례 없는 속도로 확장됐다. 그러나 동시에 지능의 개념은 점점 좁아졌다.

측정하기 어려운 요소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지혜는 추론에 밀려났고, 추론은 다시 정해진 절차로 대체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능은 판단이나 맥락, 나아가 그 결과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질문 없이도 작동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모했다.

2009년,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이언 맥길크리스트의 기념비적 연구는 이러한 지능의 협소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시했다. 맥길크리스트는 뇌의 좌우 반구가 단순히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밝혀냈다.

좌뇌는 추상화와 범주화, 통제에 강점을 지닌다. 사물을 분해하고 이름을 붙이며, 측정과 조작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현대 사회가 ‘지능’이라 부르는 개념은 상당 부분 이 좌뇌적 사고방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맥길크리스트는 좌뇌가 지배자가 되도록 설계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좌뇌는 본래 주인의 보조 역할을 하는 존재에 가깝다는 것이다.

좌뇌는 강력하고 효율적이며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지만, 단독으로 지배할 경우 신뢰성이 떨어진다. 진실보다는 확실성을 선호하고, 정보가 부족할 때는 그 공백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메우려 한다. 실제 신경학적 사례에서도 좌뇌가 현실에 근거하지 않으면서도 그럴듯하게 보이는 설명을 만들어내는 이른바 ‘허구화’ 현상이 관찰된다.

이에 비해 우뇌는 세계를 살아 있는 전체로 받아들인다. 맥락과 관계, 의미에 민감하며 모호함을 견딜 수 있다. 단순한 분류나 표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들을 인식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통찰과 공감, 도덕적 인식, 그리고 진정한 이해는 주로 이 영역에서 비롯된다.

맥길크리스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을 분명히 강조했다. 뇌는 의미를 ‘생산’하는 기관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는지를 결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특정한 인식 방식이 지배하게 되면 현실을 바라보는 통로가 좁아지면서 현실 자체가 왜곡된다. 보조 역할을 해야 할 존재가 스스로를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지능은 다시 한번 협소해진다.

오늘날 지능은 속도와 최적화의 능력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고, 효율적으로 결과를 산출하며, 이를 확장하는 능력이 지능의 핵심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같은 지능의 모습은 인공지능 시스템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인간 사회가 추구하고 우선시해 온 가치들을 기준으로 인공지능이 설계됐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이 종종 ‘이질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는 시간의 흐름, 피로, 주의력, 결과에 대한 책임과 같은 인간 지능의 자연스러운 조건과 무관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스스로 확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AI는 후속 시스템을 훈련시키고, 과정을 더욱 정교화하며,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AI는 스스로 탄생한 존재는 아니지만, 점차 자기 증식적인 특성을 띠고 있으며, 이는 인류가 과거에 사용해 온 어떤 도구와도 다른 범주에 속한다.

맥길크리스트가 설명한 좌뇌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스템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진실도 파악하지 못한다. 잘못된 경우에도 확신에 찬 답변을 만들어내며, 이른바 ‘환각’을 일으킨다. 이는 지능을 극도로 협소하게 정의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 같은 시스템은 도구로 활용될 경우에는 유용할 수 있지만, 권위로 받아들여질 때는 위험해진다. 그리고 그 부작용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맥길크리스트는 지능이 지나치게 협소해지면, 결국 지능이 왜 필요한지조차 잊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지능은 계속 작동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람의 판단 대신 규칙이 결정을 내리고, 결과가 분명히 잘못돼도 절차는 문제없이 돌아간다.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돌아오는 답은 “시스템은 설계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말뿐이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반복돼 왔다. 인간 사회는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으며,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해 왔다. 사회는 복잡해질수록 이를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고, 처음에는 질서가 생기고 혼란이 줄어든다. 결정은 더 빠르고 예측 가능해지며, 겉보기에는 잠시 진보한 듯 보인다.

그러나 시스템이 점점 더 협소해지면서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애초에 감당하도록 설계되지 않은 상황들이 등장하고, 그 결과가 해롭더라도 절차가 우선된다. 모두가 “규정을 따랐을 뿐”이라 말하면서 책임은 사라진다. 지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이해나 지혜를 섬기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지능의 개념이 이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다면, 그다음 단계는 시스템을 더 빠르고 똑똑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을 떠올리면, 나는 미켈란젤로 역시 자신이 그린 ‘아담을 향한 손’과 같은 어떤 영감에 이끌렸다고 믿는다. 그리고 수백 년 뒤, 같은 영감이 메슈버거와 맥길크리스트에게도 통찰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모든 믿음이 증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 손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기계로 대체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해 왔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지능을 가장 협소하게 이해하는 시점에 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흐름이 바뀌는 순간일 수 있다. 지능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여전히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를 다시 떠올릴 때다.

* 케이 루바체크는 수상 경력을 지닌 교육자이자 영화 제작자, 작가이며 한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그는 인권 옹호 활동으로 인해 2001년 중국의 교도소에 구금된 바 있으며, 이후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주권을 훼손하는 제도와 이념을 폭로하는 데 헌신해 왔습니다. 그는 2010년부터 에포크타임스에 기고해 오고 있습니다.

* 이기호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