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미국, ‘팍스 실리카’ 출범…한국 포함 다국 간 공급망 동맹 구축

2025년 12월 14일 오전 12:03
2010년 9월 5일, 장쑤성 롄윈강의 한 항구에서 불도저가 희토류 광물이 포함된 흙을 퍼 올려 선적 준비를 하고 있다. STR/AFP via Getty Images/연합2010년 9월 5일, 장쑤성 롄윈강의 한 항구에서 불도저가 희토류 광물이 포함된 흙을 퍼 올려 선적 준비를 하고 있다. STR/AFP via Getty Images/연합

미국 국무부는 12일(이하 현지시간) 한국, 일본 등 5개국 대표와 함께 ‘팍스 실리카 선언(Pax Silica Declaration)’에 서명하며 ‘팍스 실리카 구상(Pax Silica Initiative)’을 공식 출범할 예정이다.

이번 구상의 목적은 인공지능(AI) 산업에 필수적인 실리콘과 희토류 등 핵심 광물 공급망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있으며, 전문가들은 이 같은 움직임을 미·중이 기술과 경제 분야에서 사실상 전면 경쟁 단계에 돌입했다는 증거로 보고 있다.

미 국무부는 12일 회의에서 국무부 경제담당 부차관보 제이콥 헬버그가 한국 일본 이스라엘 호주 싱가포르 5개국 대표와 함께 팍스 실리카 선언문에 서명하고 공동 체제를 출범시킬 예정이며 다른 나라들도 추가로 선언문에 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서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이 참석할 예정이다.

‘팍스 실리카’라는 명칭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팍스’는 평화와 안정·장기적 번영을, ‘실리카’는 실리콘의 원료인 이산화규소를 의미한다. 실리콘은 컴퓨터 칩의 핵심 원소로 AI 시대의 안보·산업 경쟁력의 핵심 자원으로 꼽힌다.

미 국무부는 11일 성명을 통해 실리카 구상이 세계 최첨단 기술 기업을 보유한 국가 간의 새로운 국제 협력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계산 능력, 실리콘, 광물, 에너지 등 전략적 자산을 중심으로 여러 국가가 공동의 플랫폼을 구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성명은 이번 파트너십 구축이 특정 국가를 고립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강제적 의존관계가 확대되면서 발생하는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중국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이 세계 최대 실리콘 생산국이자 희토류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베이징이 10월 초 희토류 수출 통제를 강화한 사실이 이번 구상의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전 분야 자원 결집해 중국 견제 강화

대만 국방안보연구원(INDSR)의 왕슈원 연구원은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팍스 실리카 구상’이 지닌 특징을 세 가지로 분석했다. 그는 우선 미국이 여러 국가와 연합해 희토류 공급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인공지능(AI), 양자기술, 반도체 분야에서 기술적 우위를 가진 동맹국들과의 연구·제조 협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관세 압박이 커지는 가운데 동맹국 간 공동 투자로 새로운 수출 모델을 구축하려는 의지 역시 이 구상에 포함돼 있다고 평가했다.

왕 연구원은 이 구상에 참여한 국가들의 구성에도 전략적 고려가 반영돼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과 한국은 미국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이며, 일본과 이스라엘은 AI와 양자기술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호주와 싱가포르는 각각 남태평양과 인도양에서 미국의 주요 지정학적 파트너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할 때, 미국이 기술·경제안보·지정학적 자원을 통합해 대응하려는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며, 미·중 간 기술·경제 경쟁이 앞으로 더욱 전면적인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다른 전문가인 대만 국방안보연구원 선밍스 연구원은 미국이 다국간 협력을 추진하는 핵심 목표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데 있다고 분석했다. 호주는 자체적으로 희토류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더 중요한 부분은 중국 공급망에 의존하는 국가들과 새로운 체계를 함께 구축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연합이 중국에 미칠 영향은 상당할 것”이라며, 싱가포르를 제외한 대부분의 참여국이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고, 인공지능 기술이 향후 군사적 활용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미국, 국내외 공급망 재건 추진

미국은 ‘팍스 실리카 구상’ 출범에 앞서 국내외에서 다양한 조치를 취하며 희토류 공급망 재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11월 7일, 미국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섬터에 위치한 EVAC 공장을 방문해 미국에서 25년 만에 처음으로 생산된 미국산 희토류 자석이 공개된 것을 기념했다. 베센트 장관은 ‘폭스 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미국을 희토류 산업의 글로벌 리더로 만들기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어 11월 18일에는 미국 희토류 자석 제조업체 벌컨 엘리먼츠가 노스캐롤라이나주 벤슨(Benson)에 10억 달러를 투자해 연간 1만 톤 규모의 자석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미 국방부로부터 6억 2천만 달러의 직·간접 대출 지원과 5억 5천만 달러의 민간 투자를 확보했다. 조시 스타인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는 “이 공장은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석 생산시설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제 협력 강화도 병행되고 있다. 미국 희토류 기업 MP 머티리얼스는 11월 19일 미 국방부와 사우디 국영 광산기업 마아덴과 협력해 사우디아라비아에 희토류 정련시설을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미국은 아프리카 희토류 자원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있다. BBC가 존스홉킨스대학교 ‘중부 아프리카 연구 이니셔티브(CARI)’ 자료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2023년 미국의 아프리카 투자 규모는 78억 달러로 중국의 4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2012년 이후 미국이 아프리카 투자에서 다시 우위를 점한 첫 사례다.

미국의 이 같은 행보는 중국 의존 희토류 공급망을 탈피하고, 핵심 광물 전략에서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포괄적 조치로 평가된다.

각국, 대체 공급망 개발 잰걸음

미국 하원 중국공산당특별위원회는 11월 19일 청문회를 개최해 중국 공산당이 시장 조작을 통해 글로벌 핵심 광물 공급망을 장악하는 방식에 대해 심층 검토했다. 위원장 존 물레나르는 미국이 중국 의존도를 해소하기 위해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며, 미·중이 지난달 합의한 1년간의 희토류 수출 규제 완화 기간을 전략적 전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방 하원의원 카를로스 히메네스는 핵심 광물 공급망 재건을 위해 미국이 “대체 기술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미네소타의 나이론 매그네틱스가 세계 최초로 희토류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상업 규모의 고성능 영구자석 생산에 성공했다고 소개했다.

해외에서도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그린란드 옌스-프레데릭 닐슨 총리는 11월 19일 ‘닛케이’ 인터뷰에서 “그린란드는 민주 국가들과 협력해 희토류를 포함한 핵심 광물을 개발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히며 미국 및 동맹국과의 협력 의지를 드러냈다.

일본도 관련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11월 6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일본과 미국이 태평양 미나미토리섬 인근 해역에서 희토류 공동 개발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내년 1월경 수심 약 6000m 해저에서 희토류가 포함된 진흙을 채취하는 실증 시험에 착수할 계획이다.

한편 일본 기업들은 최근 중국으로부터의 희토류 수입 승인 지연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요미우리신문’ 보도에 따르면 관련 심사가 늦어지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으며, 중국 상무부는 12월 4일 “일본이 독단적 조치를 취할 경우 중국도 필요한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중, 장기 경쟁의 새 국면 진입

왕슈원 연구원은 최근 미국이 동맹국들과 속도감 있게 기술·경제 동맹 구축에 나서는 배경에는, 미국이 기술·경제 분야에서 뒤처질 경우 발생할 심각한 리스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러한 움직임을 미국의 새로운 기술·경제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군사·정치 분야와 달리 기술·경제 경쟁이 실제 성과로 이어질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왕 연구원은 트럼프 행정부 1기에서 바이든 정부까지 정책 기조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미·중 경쟁이 이미 장기전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흐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같은 연구원의 선밍스 연구원은 기술 경쟁에서 미국이 단독으로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현실이 이번 다국 간 협력의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향후 미국의 협력 범위가 아랍 국가들로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러한 연합이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새로운 공급망 체계를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방 국가들이 특히 집중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중국 중심 공급망이 유지해 온 낮은 환경 기준을 벗어나, 고부가가치 영역인 정련과 재활용 분야를 강화하는 방향이다. 이는 단순한 채굴 경쟁이 아닌, 첨단 제조에 필요한 고순도 핵심 광물 확보를 전략적 목표로 삼는다는 의미다.

구체적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라마코 리소스는 와이오밍주 브룩 광산에서 450톤 이상의 희토류 채굴을 계획하고 있다. 또 MP 머티리얼즈는 애플과 총 5억 달러 규모의 협력 계약을 체결하고, 재활용 소재에서 중(重)희토류를 추출하는 ‘폐쇄형 공급망’ 구축을 추진 중이다.

라이너스와 일루카 리소스는 각각 말레이시아와 호주 서부에 대규모 정련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특히 일루카의 플랜트는 노던 미네랄스 등에서 공급되는 중희토류 원료를 가공할 수 있어, 향후 완전하고 투명한 글로벌 공급망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될 전망이다.

*이기호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