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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한중 정상회담, 관계는 열렸으나 신뢰는 아직 멀다

2025년 11월 02일 오후 9:45
이재명 대통령이 3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맞이하고 있다. | 연합뉴스이재명 대통령이 3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맞이하고 있다. | 연합뉴스

5년 만에 열린 한중 정상회담이 막을 내렸다. 오랜 단절 끝에 다시 마주한 두 정상이었지만, 회담의 성과를 두고 외교가의 평가는 엇갈린다. ‘관계 개선’이라는 명분 아래 양국이 웃었으나, 실질적 진전은 제한적이었다. 이는 단순히 외교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한국 외교가 처한 구조적 한계와 전략적 모순에서 비롯된다. 이번 회담은 한중 관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춘 ‘시험대’이기도 했다.

가치 잃은 외교, 국제사회 신뢰 멀어져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인권과 가치 외교의 부재다. 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와 경제 협력에 초점을 맞췄지만,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같은 자리에서 홍콩 문제와 신장 위구르 인권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보편적 가치 존중’을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발언의 차이를 넘어 외교 철학의 차이를 보여준다. 일본이 자유민주 진영의 연대를 명확히 드러냈다면, 한국은 현실적 이해관계에 더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원칙의 언어’를 잃은 외교는 설득력과 신뢰를 함께 잃기 쉽다.

특히 미·중 갈등이 힘겨루기를 넘어 ‘체제 경쟁’으로 번지는 상황에서, 한국의 모호한 태도는 향후 외교 공간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재명 정부가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민감한 현안을 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원칙을 피한다고 해서 관계가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명확한 기준이 없는 외교는 상대에게 불확실하고 신뢰하기 어려운 태도로 비칠 수 있다. 가치와 실리를 조화시키는 균형 감각이야말로 앞으로 한국 외교가 회복해야 할 핵심 과제다.

경제에 기댄 외교, 스스로 발목 잡히다

이번 회담의 또 다른 축은 ‘공급망 협력’이었다. 중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등 전략 산업 분야에서 한국의 협력을 유도하며 협력 이미지를 부각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복잡한 계산이 숨어 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중국은 한국을 ‘중간 완충지대’로 묶어두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반도체 수출의 30% 이상이 중국으로 향하고, 희토류와 핵심 원자재의 상당 부분이 중국에서 공급된다. 이런 구조적 현실이 한국의 외교적 선택 폭을 좁히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경제 안정’을 이유로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글로벌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미국은 ‘경제안보 동맹’을 강화하며 동맹국들에게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고 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는 산업 경쟁력의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가 이어진다.

이제 한국은 현실적 이익을 지키면서도, 경제 안보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독립적 판단 능력을 길러야 한다. 중국과의 관계를 ‘의존’이 아니라 ‘관리’의 단계로 전환할 때, 한국 외교의 실질적 공간도 넓어질 수 있다.

북핵 해법은 제자리, 중국 협력도 미온적

한중 회담의 공식 의제 중 하나는 한반도 비핵화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강조하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은 “대화와 평화를 위한 균형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실질적인 행동 약속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는 중국이 한반도 정세를 자국 안보의 완충 장치로 인식한다는 계산을 보여준다. 중국은 북한을 자국의 ‘안보 완충지대’로 간주하며, 한반도 긴장 완화를 원하면서도 북한 제재 강화에는 소극적이다. 이번 회담 후 발표문에서도 ‘비핵화 추진’이라는 표현은 빠지고, 대신 ‘평화적 대화 재개’라는 모호한 문구가 사용됐다.

결국 한국은 북핵 문제에서 중국의 협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외교의 축을 넓히는 일이다. 한·미·일 3국 공조와 다자 외교의 병행을 통해 중국의 한계를 보완해야 한다. 북핵 해법을 ‘중국 변수’에만 의존하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좁아진 외교 공간, 그래도 문은 열렸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담을 단순한 실패로 보기는 어렵다. 5년간 끊겼던 정상 간 직접 대화가 복원된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진전이라 볼 수 있다. 외교는 결국 ‘대화를 이어가는 과정’이며, 그 지속성 자체가 힘이 된다.

실무 차원에서도 몇 가지 가시적 성과가 있었다. 양국은 ‘한중 고위급 경제협의체’ 재가동에 합의했고, 반도체·배터리 협력 채널 복원과 관련한 MOU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속에서도 한국이 최소한의 산업적 완충 장치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중국의 경기 둔화와 산업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이 협력의 실질적 효용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다시 말해, 지정학적 압박 속에서도 실리적 공간을 확보하려는 ‘방어적 실용외교’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시진핑 주석이 “청년 세대 교류 확대”를 제안한 것은 사회적 접점을 복원하려는 신호로 해석된다. 정치적 갈등이 깊어지더라도 민간·문화 교류의 끈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양국 관계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긍정적 요소다. 외교가에서는 이를 ‘톱다운(Top-down) 외교’의 방식으로 최고 지도자를 통해 실무 협력을 복원하려는 흐름으로 평가했다.

결국 이번 회담은 ‘절충의 외교’였다. 미·중 경쟁, 북핵 위기, 공급망 재편이라는 복합적 변수가 얽힌 상황에서 한국 외교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신중함이 아니라, 분명한 원칙과 철학을 가진 실용적 외교의 방향성이다.

외교는 언제나 완벽한 답이 없는 ‘협상의 예술’이지만, 그 협상에도 철학이 필요하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은 한국 외교가 그 철학을 다시 세워야 할 때임을 보여준 자리였다. 대화의 문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다만 그 좁은 통로를 어떻게 넓혀가느냐가 앞으로의 한중 관계를 결정할 것이다.

*이경찬 논설위원은 정치 PR 전문가로, 한국커뮤니케이션에서 정치 홍보를 담당하며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쌓았습니다. 이후 정치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정책과 정치 현장을 깊이 이해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에포크타임스 기자로 오랜 기간 활동하며 언론의 최전선을 경험했습니다. 현재는 미디어파이 대표로서, 정무·언론·홍보 전반에 걸친 통합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