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완성된 제품이 아니라 일반인이 온라인에서 부품을 사서 직접 조립하는 총인 이른바 ‘유령총(Ghost Gun)’ 규제에 나선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연방 주류·담배·총기·폭발물단속국(AFT) 국장에 연방검사 출신 인물을 임명하고, 유령총 관리를 골자로 하는 새 총기 규제안을 내놨다. 앞서 지난해 발표한 취임 후 첫 총기 규제대책의 강화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규제안을 행정조치로 발표했다. 행정조치는 의회 승인 없이 바로 시행된다. 추후 의회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의회를 거치지 않고 집행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전미총기협회(NRA) 등 총기 규제 반대 측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총기 규제안을 행정조치로 발표한 것에 대해 “정당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총기 소유가 미국 수정헌법 제2조에서 명시한 ‘무기 휴대의 권리’에 따라 보장되는 국민의 기본권인데, 이를 제한하면서도 의회 승인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이 발표한 총기 규제안에는 공격용 소총과 대용량 탄창 금지, 총기 범죄 시 총기 제조사에 대한 면책 삭제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면, 이번 규제안의 핵심은 유령총 규제다.
완성된 총기는 일련번호가 들어가고 판매 시 구매자에 대한 신원조회를 거친다. 반면, 부품과 조립설명서가 함께 판매되는 유령총은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조립할 수 있지만 일련번호와 신원조회 절차가 없어서 범죄에 쓰일 경우 추적하기가 어렵다.
미국 현행법상 총기 부품은 총기류가 아닌 단순 부품으로 취급돼 규제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총기 구매 시 신원조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범죄자나 미성년자가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게 바이든 행정부의 지적이다.
따라서 이번 규제안에서는 유령총에도 일련번호를 매기고 판매 시 구매자 신원조회를 반드시 거치도록 했다. 또한 판매자가 관련 영업을 하는 한 판매기록을 계속 보관하도록 했다. 유령총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전미총기협회는 이번 규칙을 극단적(인 규제)으로 몰아가려 한다. 하지만 (총기 공격으로부터) 경찰을 보호하려는 것이 극단인지,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게 극단인지, 신원조회도 통과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 총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게 극단인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테러리스트 목록에 등록된 사람들이 이러한 유령총을 구입할 우려도 있다. 이번 규제안은 극단이 아니라 기본적 상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공화당과 총기 소지 옹호 측은 대통령이 수정헌법 제2조에서 보장한 ‘무기 휴대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으며, 입법권이라는 의회의 고유 권한도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총기 규제를 핑계로 권한 남용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공화당 토마스 매시에 의원은 트위터에 “우리 헌법에서는 연방정부에 총기 제작을 금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지난 200년간 이어져온 보편적 인식이다. 게다가 헌법 제1조에서는 법을 만드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의회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썼다.
미국총기소유주협회(GOA)는 이번 조치가 사실상 미국 헌법에 위배되는 ‘총기 등록부’를 만들기 위한 전초 단계라고 보고 있다.
GOA 사무국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의회를 거치지 않고서 ‘총기 부품의 온라인 판매를 규제하고 총기 관리체계를 만들어 사실상 총기 등록부를 운영하겠다’는 것은 바이든이 수정헌법 제2조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의회는 의회 검토법을 발동해 AFT의 총기 등록 시도를 저지하고, 마이클 클라우드 의원이 발의한 ‘(총기) 등록 금지 권리법’을 통과시켜 추후 비슷한 시도를 하지 못하도록 감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총기 규제 행정조치에는 ‘총기 등록부’나 이와 유사한 총기 관리 체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GOA는 “바이든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통해 완제품만 총기로 규정한 기존 정의를 변경, 권총 프레임 등 부품까지 일련번호와 신원조회를 의무화할 경우, 총기를 수리하기 위해 부품을 구매하려는 미국인들까지 정부의 조사를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이러한 조사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 보관하게 되면 연방정부 차원의 총기 등록부를 구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총기를 통제하고 더 나아가 미국인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에게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행정명령은 법적 권한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전국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총기 범죄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규제안”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방검사 출신의 스티브 데틀바흐를 AFT국장에 지명했다. 앞서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은 총기 규제 옹호자인 데이비드 칩먼을 AFT국장에 지명했으나 공화당과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반발로 철회해야 했다.
데틀바흐가 의회 인사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GOA에 따르면 데틀바흐 역시 강경한 총기 규제 옹호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총기 규제는 미국에서 단순한 사안은 아니다. 총기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총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 맞서 자기방어를 하는 차원에서 총기를 휴대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게 헌법의 취지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지난 2020년 폭력범죄 증가율은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살인 사건은 전년(6977건)보다 약 2700건 급증한 9630건 발생했다. AFT에 따르면 지난해 현장에서 발견된 유령총은 2만정으로 2016년보다 10배가량 늘었다.
총기 소유 옹호자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유령총의 위험성을 크게 부풀려 권력 남용을 합리화하려 한다고 맞서고 있다.
수정헌법 제2조 수호 재단의 리 윌리엄스 연구원은 워싱턴의 비영리 탐사보도기관 IJP의 분석을 인용해 “AFT가 발표한 유령총 2만 정 회수 주장의 근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윌리엄스는 “AFT는 경찰이 범죄현장에서 입수한 총기 중 개인이 제조한 것을 모두 유령총으로 집계하지만, 허가받은 개인이 조립한 총기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 맹점이 있다”며 “정당한 권리가 있는 개인이 조립한 총기를 유령총으로 규제하는 것은 총기 부품업체를 고사시키려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한편, 바이든 대통령의 총기 규제안이 법안으로 제정되려면 민주당과 공화당이 50대 50으로 동률을 이루고 있는 상원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공화당은 총기 규제에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어, 민주당의 법안 통과 시도 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로 맞설 가능성이 크다. 필리버스터를 우회할 수도 있지만, 공화당 의원 10명이 동의해줘야 한다.
문제는 민주당 내에도 총기규제에 반대하는 의원이 있다는 점이다.
CNN은 “50대 50으로 나뉜 상원에서 민주당의 총기 규제안 입법은 조 맨친 의원의 협력 여부에 달려 있다”고 평가했다. 민주당 내 온건파인 맨친 의원은 공화당에도 여러 차례 찬성표를 던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