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어떻게 한반도에서 무너졌나 – 무력 침공과 패주의 전쟁사
촬영일자가 1951년으로 기록된 사진. 미군이 서울 외곽에서 중공군 포로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미국은 한국전(1950~1953년) 기간 3만7천명을 파병해 한국을 지원했고 전쟁은 휴전으로 마무리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3년간 2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 AFP via Getty Images 새 연재 알림…중화권 군사평론가 선저우가 본 한국전쟁
유해 송환 계기로 되짚는 중국 ‘항미원조’의 역사적 실체
지난 9월 한국 정부는 중국군 병사 유해를 중국 측에 송환했다. 이는 2013년 박근혜 정부 당시 한·중 간 합의에 따른 조치로 2014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인민해방군 수송기 Y-20에 ‘도하(渡河) 50’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이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위해 압록강을 건넌 역사를 기리기 위한 조치다.
도하 50이란 명칭은 작년부터 사용됐지만 올해에는 유해 인수 임무에 투입된 수송기를 호위한 스텔스 전투기 J-20에도 ‘개선(凱旋)’이라는 콜사인이 붙었다. 송환된 중국군 유해를 ‘이기고 돌아온 영웅’으로 규정하는 중국 공산당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대목이다.
한국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번 송환식은 관영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인민일보, 환구시보 등은 다수의 사진과 영상이 포함된 비중 있는 기사로 유해 송환 과정을 상세히 전했다. 보도에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영웅”, “위대한 항미원조 정신”과 같은 정치적 수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이는 중국 관영 언론 체계에서 중앙선전부 차원의 선전 지침이 내려졌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보도 양상으로 평가된다.
중국 측 보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식 채널들은 ‘평화’, ‘친선’, ‘협력’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이번 유해 송환을 한-중 양국 협력의 상징으로 부각했다. 신화통신은 주한 중국대사관 성명을 인용해 “이번 협력은 중한 양국이 역사적 간극을 극복해, 평화롭고 우호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공동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며 “한국 측의 적극적인 협력”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지난해 중국군 유해 송환 당시에도 일부 매체에서 ‘영웅의 귀환’, ‘양국 친선’ 등의 표현이 동원됐지만 “한국 측의 적극적인 협력”이나 “우호적인 미래”와 같은 외교적 수식은 사용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신화통신은 “제11차 재한 중국인민지원군(한국전 파병 중국군에 대한 중국 측 표현) 열사 유해가 송환된다”며 “중한 양국은 2014년부터 국제법과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솔직하고 우호적이며 실무적으로 협력해 11년 동안 총 981구의 재한지원군 열사 유해 및 관련 유품을 인도했다”고 짤막히 보도하는 데 그쳤다.
‘이기고 돌아온 영웅’…정치 선전으로 이용된 인도적 조치
올해 신화통신 기사는 중국 국무원 홈페이지에 게시됐다. 그러나 ‘역사적 간극 극복’이라는 표현 외에 중국이 북한을 지원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한반도의 전쟁 피해가 확대됐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물론 최소한의 언급조차 없었다(중국 국무원 게시물[영문]).
한국은 전쟁의 적국이었던 중공군 병사들에 대해서도 인도적 차원의 유해 송환을 선택했지만, 중국 공산당은 이를 ‘항미원조’ 선전과 결합해 정치적 메시지로 확장하고 있다. 특히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된 가운데, 중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돼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선전 도구로 활용되는 양상이다. 지나간 역사에 대한 성찰은 생략된 채, ‘한국도 중국에 협력하고 있다’는 단순화된 정치적 메시지가 부각되는 구조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미국의 군사평론가 선저우(沈舟)가 ‘중공군은 조선(한반도) 전장에서 어떻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나’라는 다소 직설적인 제목의 연재를 기획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인 출신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사 왜곡을 통해 현 집권 체제를 정당화하려는 중국 공산당의 선전 방식을 꾸준히 비판해 왔다.
선저우는 중공 정권이 정치·외교적으로 불리한 국면에 처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소환해 온 ‘항미원조’ 선전이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전쟁 기록과 객관적 자료를 통해 체계적으로 검증하고 있다. 이 연재는 한국전쟁을 ‘영웅적 정의의 전쟁’으로 포장해 온 중공의 공식 서사를 정면으로 해체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며, 현재까지 15편이 공개됐다.
승리한 전쟁? 역사적 기록으로 교차 검증한 ‘항미원조’ 선전
이 연재물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중국의 선전이 단순한 과거사 해석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체제 정당화와 대외 강경 노선의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저자인 선저우는 중공·북한·미국·한국 측 전쟁 기록을 교차 분석하며, 중공군의 한반도 개입이 방어적 선택이 아니라 대규모 무력 침공이었고, 그 결과가 중공이 주장해 온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짚어 나간다.
이 연재물을 한국 독자, 특히 젊은 세대에게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책임에 대해서는 비교적 널리 인식돼 있는 반면, 한국전쟁 당시 중공이 한반도에 개입해 한국의 생존 자체를 위협했던 사실과 그 전쟁의 실상이 충분히 공유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항미원조’라는 이름 아래 포장된 중공의 개입이 실제로는 한국의 숨통을 끊으려 했던 무력 침공이었다는 점은, 한국인의 집단 기억 속에서 해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이번 기획은 한국전쟁이 한미동맹과 자유진영의 결정적 방어전이었으며, 그 결과가 오늘날 한국의 자유와 생존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역사 기록에 근거해 다시 확인하려는 시도다. 동시에 일본의 과거 침략을 비판하면서도, 같은 시기 한국을 겨냥해 무력을 사용했던 중공의 역할과 책임을 상대적으로 간과해 온 인식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이 한국전쟁을 둘러싼 선전과 실제 역사 사이의 간극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중국군 VS 중공군… ‘침략의 주체’에 관한 한국 사회의 인식 변화
한편, 선저우는 이 연재에서 ‘중국군’이 아닌 ‘중공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오늘날 국내 언론에서는 통상 ‘중국군’이라는 용어가 쓰이지만,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들이 ‘중공군(中共軍)’으로 불렸다. 이는 단순한 명칭 차이가 아니라, 참전 주체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중국의 군사 개입은 일반적인 국가 행위가 아니라, 북한을 지원해 전쟁에 개입한 중국 공산당 정권의 침략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쟁기와 냉전기 한국 사회에서는 중국을 ‘중공’, ‘중공 정권’, ‘중공 치하 중국’으로 지칭했고, 그 군대 역시 ‘중공군’으로 불렀다. 이러한 용어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외교 관계 정상화와 함께 점차 ‘중국’, ‘중국군’으로 대체됐으며, 한반도를 침공했던 중국 공산당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은 경제적 의존도의 심화와 함께 해제됐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외교 관계 정상화 속에서 용어와 인식을 조정해 온 것과 달리, 중국 공산당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라는 공식 서사로 고정한 채 이를 체제 정당화와 대외 정치 선전에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 이 기사에서는 6·25 전쟁을 국제 용례에 맞춰 한국전쟁으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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