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고난을 이겨낸 그녀, 꺾이지 않은 마음의 힘

2025년 09월 04일 오후 7:24
2025년 8월 31일, 중국의 박해를 피해 미국 뉴욕 오티스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공샤오옌과 어머니 선둥샤 | Petr Svab/The Epoch Times2025년 8월 31일, 중국의 박해를 피해 미국 뉴욕 오티스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공샤오옌과 어머니 선둥샤 | Petr Svab/The Epoch Times

전화기가 울렸다.

그날 아침, 중국 동북부 보하이만 인근 빈저우는 차가웠다. 설날을 이틀 앞둔 시기, 가족들이 모일 때였다. 그러나 치관메이는 딸이 찾아올 거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었다.

“엄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치관메이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화기 너머로는 흐느낌만 이어졌다. 몇 달 만에 들은 딸의 목소리였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울기만 했다.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치관메이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딸은 범죄자가 아님에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정의는 없었고, 오직 고통만이 남아 있었다. 그해는 2006년이었다.

어머니가 사망하기 넉 달 전, 치관메이의 딸 선(孫)둥샤는 파룬궁 서적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파룬궁은 중국 공산당이 잔혹하게 탄압하는 수련 단체다.

선의 딸 공(龔)샤오옌은 가족의 이야기를 ‘에포크타임스’에 전했다. 그것은 수십 년간 이어진 박해의 기록이었고, 그 비극은 그녀의 영혼을 꺾지 못했다. 뉴욕 주 북부 자택에서 마주 앉은 공은 당시의 기사와 사진을 펼쳐 보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안락한 삶’

공은 중국 공산당 체제 속 특권 계층의 안락함 속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인민해방군 대령이었고, 어머니는 국영기업 선전부에서 일했다. 공의 말에 따르면, 그 일은 높은 보수에 비해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자리였다.

“우리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함 없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체제의 본질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정부가 좋은 줄만 알았죠. 우리는 나라를 사랑했고, 공산당을 사랑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아 왔으니까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계급의 군인이라면 권력을 돈과 특혜로 바꾸어 큰 부를 쌓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것은 공의 말대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달랐다.

1990년대 중반, 아버지는 어머니 선(孫)과 함께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뒤로 권력을 이용해 부를 쌓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1992년 중국에서 일반인에게 소개된 파룬궁은 빠르게 확산됐다. 느린 동작의 연공과 함께 ‘진·선·인’이라는 원칙에 기반한 가르침이 결합되어 있었다. 많은 수련자가 건강과 도덕성의 향상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국에서 수련하는 어린 파룬궁 수련자들 | Minghui/Falun Dafa Information Center

공은 1995년, 칭다오의 집에 외할머니 치관메이가 찾아왔을 때를 기억했다.

외할머니가 부모에게 파룬궁 책 한 권을 건넸고, 부모는 단 하루 만에 그 책을 다 읽었다. 공산당원으로서 공식적으로는 무신론자였지만, 부모는 파룬궁의 영성에 강하게 이끌렸다.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 책 읽어봤어요?”

“응, 읽었어.”

“책에서 말하는 걸 믿어요?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진실이야.”

그 무렵 집 근처 공원에는 파룬궁 연공 모임이 다섯이나 생겨났다. 다른 공원에도 점점 더 많은 수련자들이 모여들었다.

열 살이던 공은 거의 매일 아침 어머니와 함께 공원에 갔다. 어머니 선이 연공을 하는 동안 그녀는 곁에서 놀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공이 물었다.

“아이들도 수련할 수 있어요?”

그날 이후, 공(龔) 역시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모함

공이 뭔가 달라졌음을 느낀 건 1999년 4월이었다.

그달, 톈진에서 파룬궁을 비판하는 신문 기사에 이의를 제기한 수련자들이 체포됐다.

문화대혁명을 겪었던 많은 중국인은 언론의 비난이 정치적 변화의 전조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권이 파룬궁을 적으로 돌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체포에 따른 항의가 커지자 톈진 당국은 사람들을 베이징에 있는 ‘국가신방국(국민청원사무소)’으로 돌려보냈다. 이론적으로는 중국 시민이 정부에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4월 25일, 약 1만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베이징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경찰에 의해 가로막혀 결국 중난하이 주변 거리로 몰리게 됐다. 그들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때 주룽지 총리가 직접 나와 몇몇 대표를 안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대표들이 다시 나왔을 때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전했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공의 가족은 아무것도 몰랐다. 들려온 소식은 단지 몇몇이 체포되었고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7월 20일이 찾아왔다.

늘 그렇듯 아버지는 저녁 7시, 거실에 앉아 CCTV 뉴스를 틀었다. 평소에는 30분짜리 방송이었지만 그날은 1시간으로 늘어났다. 전부가 파룬궁에 관한 내용이었다.

중국중앙TV의 대표 선전 뉴스 프로그램인 ‘신원롄보(新闻联播)’의 오프닝 장면. 1999년 7월 20일, 이 방송은 파룬궁 수련자들을 위험하고 불안정한 집단으로 묘사하는 한 시간 분량의 특별 보도를 내보냈다. | CCTV/Screenshot via The Epoch Times

“다른 주제는 없었고 오직 파룬궁뿐이었이요.” 공은 회상했다.

“저는 TV 앞에 서서 한 시간 내내 보고만 있었는데 입이 딱 벌어져서 움직이지도 못했죠.”

방송은 파룬궁 수련자들을 자신과 남을 해치는 위험한 광인처럼 묘사했다.

“그때 나는 열네 살이었어요. 너무 충격이었죠. 정부가 자기 국민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뉴스에서 말한 건 하나도 사실이 아니었거든요.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였어요.” 공은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가족은 파룬궁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칭다오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러 가기로 했다.

“많은 수련자가 모였어요. 사람들에게 파룬궁이 좋은 것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던 거예요. TV에서 보여주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말이죠.”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몇 달 뒤, 공은 어머니와 함께 베이징에 가서 다시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주소를 몰라 천안문 광장에 서 있던 어느 행인에게 길을 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광장은 사복경찰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남자는 친절하게 도와주는 척하며 우리들을 낡은 승합차로 데려갔다.

“이 차에 타면 그 사무소로 데려다 줄 겁니다.”

차 안에는 이미 몇 사람이 앉아 있었고, 잠시 후 또 다른 이들이 합류했다. 차량은 곧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사무실 같은 건물이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우리들은 몇 시간 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 칭다오에서 온 관리들이 나타나 우리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 보냈다. 공은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끝내 알지 못했다. 자기소개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정신병자 취급을 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2000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경찰이 한 파룬궁 수련자를 연행하자 주변에 군중이 몰려들고 있다. | Chien-Min Chung/AP Photo/연합

세뇌

그날 이후, 공의 가족은 끊임없는 압박 속에 놓였다.

어머니는 현장근무 자리로 강등되었고, 정기적으로 상사에게 불려가 ‘교육’을 받아야 했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파룬궁 수련을 그만두게 만드는 것.

“가장 중요한 건 베이징에 못 가게 막는 거였어요.” 공은 말했다.

“그게 제일 중요했어요. 엄마가 베이징에 가면, 모두가 돈을 잃게 되니까요. 그건 엄마나 상사 개인 문제만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문제였어요. 모두가 보너스를 잃게 되거든요.”

직원 중에 파룬궁 수련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사의 경력에는 치명적이었다. 승진에서 제외되는 것은 물론, 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다.

“상사와 동료들 대부분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엄마를 지키기 위해 많이 도와주셨죠.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그 모든 압력의 근원은 따로 있었다.

“‘610 사무실’이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어요. 그래서 상사들은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불러다 ‘교육’을 하고, 집에만 있도록 감시해야 했던 거예요.”

610 사무실은 박해가 시작되던 시점에 만들어졌다. 파룬궁을 뿌리 뽑기 위해 조직된 일종의 게슈타포 같은 초법적 기구였다. 정부의 각층 조직마다 지부가 설치되어 사회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감옥에 갇힌 파룬궁 수련자들은 일상적으로 고문을 당했다. 이는 여러 인권 단체와 유엔 보고서에 의해 확인된 사실이다. 또 여러 독립 조사기구들은 수많은 수련자가 2000년 무렵부터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중국의 장기이식 산업을 위해 살해됐음을 밝혀냈다.

공의 어머니는 수차례 ‘세뇌반’에 끌려갔다. 박해 초기 흔히 사용된 불법 구류 방식이었다. 죄명도 없고, 문서도 없고, 석방 날짜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불시에 낯선 곳으로 끌려갔다. 겉으로는 평범한 정부기관 건물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장소였다.

거기서 어머니는 다른 수련자들과 함께 하루 종일 반(反)파룬궁 선전 영상을 보도록 강요당했다. 구금은 며칠이 될 수도, 몇 달이 될 수도 있었다. 면회도, 전화도 허용되지 않았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610사무실’이 운영하는 세뇌반에서 중국 공산당의 선전 영상을 강제로 시청해야 했다. 610사무실은 파룬궁 박해를 위해 설치된 초법적 조직이다. 공샤오옌의 어머니는 여러 차례 이런 세뇌반에 끌려갔으며, 그 기간은 수일에서 수개월 동안 이어졌다. | Falun Dafa Information Center

“그들은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사람을 거기에 가둘 수 있어요.” 공은 말했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일주일, 때로는 한 달씩 집을 비우곤 했다. 그래서 공은 학교에서 돌아와 집이 텅 비어 있고, 어머니가 말도 없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곤 했다.

“내 어린 시절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어요.” 그녀는 회상했다.

그 압박은 학교에서도 이어졌다. 중학교 시절,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교실에서 불려 나왔다. 선생님들이 그녀를 앉혀 놓고 ‘교육’을 했다.

그것은 파룬궁을 그만두라는 설득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전향’이라 불렀다. 교육은 20분에 끝날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오후 내내 이어졌다. 어떤 교사는 부드럽게 설득했지만, 어떤 교사는 호통을 쳤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네가 믿음을 버리지 않으면, 고등학교에 지원할 때 어느 학교도 널 받아주지 않을 거다. 아무 학교도 널 받아들일 수 없다.’

2025년 8월 31일, 미국 뉴욕 오티스빌에 거주하는 파룬궁 수련자 공샤오옌. 그녀의 아버지 역시 수련자였으나 2021년 수감 중 세상을 떠났다. | Petr Svab/The Epoch Times

나는 대답했죠. ‘알아요. 그래도 제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결국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널 보니까 착한 아이 같고 곧 전향할 것 같아. 그래서 받아주기로 한 거야.’”

고등학교에서의 ‘교육’은 더 거세졌다.

그녀는 일주일에 몇 번씩 교실 밖으로 불려 나왔다. 정치 수업 시간에는 파룬궁에 관한 시험 문제가 나오곤 했다. 학생들이 주입받은 선전을 그대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문제였다. 공은 빈칸으로 남겼다.

어느 날 아침 조회 시간에 대형 현수막에 파룬궁을 규탄하는 서명을 하는 행사가 열렸다. 교사들은 누군가 서명을 거부해 망신을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미리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공은 거절했다. 결국 그날 아침 그녀는 교실에 남겨졌다.

그 모든 방해 속에서도 공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공은 몇몇 교사들이 외부의 강요하에서 억지로 이 압박에 참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좋은 분이 많았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게 그들의 일이었으니까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했어요.” 공은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 사회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요.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행을 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졸업을 앞두자 압박은 극에 달했다. 수련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대학도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중국에서 대학에 가지 못하면, 밝은 미래의 길은 거의 닫혀요. 대학에 못 가면 인생은 끝난 거나 다름없죠. 비참하게 살아야 해요.” 현지 공청단 비서까지 나서서, 학교에서 퇴학시키고 노동교양소로 보낼 수 있다고 위협했다.

결국 공은 굴복했다. 다시는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게 제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단 한 가지예요.” 그녀는 낮게 말했다.

비극

2005년 여름, 공은 상하이에 있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방학 동안 집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아는 분의 아파트를 방문한 뒤 집으로 향하던 순간,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체포됐다. 경찰은 어머니의 가방에서 파룬궁 전단을 찾아냈다. 집 역시 경찰에 의해 샅샅이 수색당했다.

어머니는 “법 집행을 방해했다”는 허위 혐의로 기소됐다. 파룬궁 수련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던 명목이었다. 아버지는 세뇌반으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공은 짐작했다.

“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공은 아버지의 직장에 찾아갔지만, 쫓겨났다. 결국 또 다른 파룬궁 수련자가 한 세뇌반의 이름을 귀띔해 주었다. 공은 그곳으로 매일같이 찾아갔다.

처음에는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대신 감독관 두 명이 나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지만 아버지가 그곳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공은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찾아간 끝에, 직원들은 마침내 아버지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또 몇 번의 방문 끝에, 마침내 그녀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됐다.

공이 아버지를 처음 마주한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머리와 수염이 전부 하얗게 변해 있었어요. 불과 몇 달 사이에 20년은 늙어버린 듯했죠. 너무 충격이었어요. 거의 걷지도 못했고, 손은 떨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밖으로 끌려 나왔다.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지만, 공은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같이 그곳에 갔어요.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냥 정문 앞에 앉아 있었죠.”

어느 날, 아버지가 창문 너머로 그녀를 보았다. 둘은 큰 소리로 몇 마디 나눴지만, 곧 아버지는 잡혀 끌려갔다.

날씨가 추워지자 공은 아버지를 위해 두꺼운 옷을 가져갔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옷은 아버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옷을 달라며 항의하자 오히려 심한 구타를 당해 내장이 손상되었다.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뒤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05년 7월 20일, 호주 시드니 차이나타운 인근에서 파룬궁 지지자들이 중국 공산당이 수련자들에게 가한 고문을 재현한 배너를 전시하고 있다. | Greg Wood/AFP/Getty Images/연합

어머니는 가족과의 어떤 접촉도 허락되지 않았다. 단 한 번, 재판정에서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고위층과 연줄이 있던 지인이 형량을 완화해 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자기네가 아는 사람들은 웬만한 범죄자도 빼낼 수 있다고. 살인을 저질러도, 마약을 거래해도 1~2년이면 풀려난다고. 하지만 파룬궁은 불가능하대요. 누구도 손쓸 수 없다고 헸어요.”

공은 그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신문에서 어머니와 또 다른 수련자가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충격이 밀려왔다. “그저 울 수밖에 없었어요.”

외할머니는 더욱 심하게 울었다. 외할머니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침대 위에 쓰러져 울부짖었다. 공은 그때 깨달았다. ‘이제는 울면 안 돼. 할머니가 버티질 못해.’

얼마 후 대학에 입학할 시간이 다가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배웅해 주셨다.

공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두 분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불과 몇 달 만에 할머니는 몸무게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결국 그녀는 또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옷이 너무 헐렁했어요. 그 모습을 보니 견딜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은 아마 내가 그냥 향수병에 걸린 줄 알았을 거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첫 번째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다행히 회복은 빨랐는데, 그것을 파룬궁 연공 덕분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혈압은 여전히 높았고, 의사들은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해 겨울 방학, 공은 칭다오에서 북서쪽으로 몇 시간 떨어진 빈저우에 있는 외가로 갔다. 2006년 1월 27일, 그곳에서 할머니는 감옥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첫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세상을 떠났다.

새로운 삶

대학 시절, 공은 늘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여전히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가끔 파룬궁 이야기를 꺼내곤 했지만, 정작 자신이 수행자라는 진실은 마음 깊이 감춰야 했다.

매달 교도소를 찾아 어머니를 면회하는 일은 그녀의 일상이었고, 2007년 그래픽 디자인 학사 학위를 받은 뒤 상하이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2009년, 강제노역으로 복역 기간이 줄어 조기 석방된 어머니 선(孫)을 보며, 공은 새로운 결심을 했다. 억압의 땅을 떠나 자유로운 세상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나이지리아에 있는 중국계 회사에 취업했고, 1년 뒤에는 보츠와나에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저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아프리카가 어떤 곳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죠.”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샤오옌은 아프리카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중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쁨과 자유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 Chris Jackson/Getty Images

아프리카는 그녀의 삶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빈곤했지만, 그 속에는 중국에서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기쁨과 자유의 숨결이 있었다.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지 기업에서 또 다른 자리를 얻었고, 2011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운명처럼 남편을 만났고, 2013년 결혼에 골인했다. 몇 해가 흐른 뒤에는 귀여운 딸도 태어나게 되었다.

산후 몇 달 동안은 어머니가 중국에서 건너와 딸을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귀국길에 오르는 순간, 또다시 그들의 삶을 뒤흔드는 박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지막 타격

2017년 10월, 공(龔)의 아버지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 친구 역시 파룬궁 수련자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경찰이 들이닥쳐 친구를 연행한 상태였다. 아버지 역시 함께 체포됐고, 집은 샅샅이 수색당했다. 어머니 선(孫) 또한 곧바로 구금됐다.

경찰은 집에서 발견된 파룬궁 자료에 대해 추궁했지만, 어머니는 모른다고 부인했다. “나는 막 해외에 있는 딸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진술한 끝에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위험은 여전했다. 그녀는 곧바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마침내 딸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남아 있었더라면 다시 잡혀 갔을 거예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공은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버지는 결국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공과 어머니는 편지를 통해서만 아버지와 연락할 수 있었지만, 답장이 도착하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

“아버지의 모든 편지는 경찰의 검열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밖에 쓰지 못했어요. 실제로 어떤 상황인지 우리는 알 수 없었죠.”

2021년 4월, 공은 중국에 있던 친척으로부터 충격적인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공식 사인은 고혈압 악화로 인한 뇌졸중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가 수감 중 받은 학대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아버지는 건강한 분이었어요. 아무런 지병도 없으셨습니다.” 공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공샤오옌이 중국 샌프란시스코 주재 중국 총영사관 앞에서 아버지의 석방을 호소하고 있다. | Cao Jingzhe/The Epoch Times

시대의 먼지

뉴욕 교외의 고즈넉한 시골 마을, 푹신한 쿠션이 놓인 소파에 앉아 있는 공(龔)의 집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깨끗한 것이 마치 그녀의 차분한 성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전업주부가 된 지금, 그녀의 하루는 오롯이 어린 딸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곳에서는 공산 중국의 잔혹한 박해가 마치 아득한 타국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기억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는 “시대의 먼지가 개인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그것은 곧 산처럼 무거워진다”는 오래된 중국 속담을 인용하며 말했다.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꼭 필요하지 않으면 과거를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공은 이어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히 꺼냈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중국 수백만 파룬궁 수련자들이 겪은 전형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박해가 시작된 후에도 신념을 지켜온 이들 주위에는 우리보다 더 비극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는 개인의 비극에 그치지 않습니다. 가족과 친구, 더 나아가 공동체와 직장, 학교, 사회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사회의 모든 사람이 파룬궁을 두고 입장을 표명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국민 전체가 속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양심을 거스르는 선택을 강요받았죠. 중공의 파룬궁 박해는 중국인 전체의 도덕성을 급격히 무너뜨렸고, 결국 나라와 국민을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기호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