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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소련 붕괴의 망령, 중공을 파멸로 몰아넣다

2025년 07월 30일 오전 11:41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공원에 블라디미르 레닌(오른쪽 첫 번째), 이오시프 스탈린(두 번째) 등 옛 소련 지도자들의 흉상이 전시돼 있다. | AP/연합뉴스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공원에 블라디미르 레닌(오른쪽 첫 번째), 이오시프 스탈린(두 번째) 등 옛 소련 지도자들의 흉상이 전시돼 있다. | AP/연합뉴스

개혁개방과 권력투쟁의 그림자 속에서 비틀거리는 독재 체제

중국공산당(중공)에게 소련의 붕괴는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2년 집권 직후 고위 간부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소련이 해체될 때, 남자다운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냉소적이지만 절박함이 배어 있는 이 발언은, 언젠가 중공도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시진핑은 소련의 몰락을 지도부의 무기력과 당 조직의 해체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이는 곧, 중공 역시 언제든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련 붕괴 이후 중공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그리고 그 여정 속에 어떤 모순이 쌓였기에, 오늘날에도 소련의 그림자에 떨고 있는가.

붕괴의 전야…덩샤오핑이 본 미래

1991년 12월 25일 밤, 크렘린 궁에서 붉은 소련기가 내려갔다. 베이징 중난하이의 외교부는 긴장 속에 술렁였다. 주(駐)모스크바 중공대사관의 긴급 전문을 받은 첸치천 중공 외교부장은 “예상된 일”이라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다음 날 오전, 중공 중앙은 불과 30분 만에 대책을 확정 지었다. 이미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실권을 쥐고 있던 덩샤오핑의 사전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덩은 일찍이 소련의 종말을 예감하고 있었다. 1989년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에서도 그는 “악수는 하되 포옹은 하지 않겠다”며 확실한 거리를 뒀다. 젊은 시절 소련에 머물며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을 목격한 덩은 강한 신념을 품게 된다. 낙후한 사회주의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요소를 일부 수용해야 한다는 것, 스탈린식 경직된 체제로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소련의 붕괴는 덩에게 필연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중공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전통 사회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서방과의 협력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개혁개방의 역설, 장쩌민의 권력 게임

소련 붕괴 이후 중공은 레닌의 신경제정책을 ‘개혁개방’이라는 이름으로 되살렸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모순적 개념을 내세우며 자본주의적 요소를 대거 수용했지만, 동시에 당의 통제는 오히려 강화하는 기형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직후 집권한 장쩌민은 거센 짐을 떠안았다. 그는 초기부터 자본가 계층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억압적 노선을 택했다. 리펑 총리와 극좌 원로들이 그의 뒤를 밀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이들에 대해 단호했다. “너희는 내 뜻을 전혀 모르고 있다.”

베이징에서 자신의 의중이 묻히자, 덩은 1992년 남방으로 향했다.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는 단순한 현장 시찰이 아니라 사실상의 정치 선언이었다. “개혁을 지지하지 않는 자는 물러나라.” 이는 장쩌민 노선을 향한 공개적인 경고였다.

덩의 뒤에는 군부가 있었다. 군사위 부주석 양상쿤은 해방군보를 통해 “군은 개혁개방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덩은 장쩌민에게 “당신을 교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며 압박을 가했다.

굴욕을 당한 장쩌민은 측근 쩡칭훙과 함께 복수를 결심하고, 양상쿤 형제를 겨냥해 비밀 조사를 시작했다. 양상쿤은 톈안먼 사태 재평가를 주장했고, 동생 양바이빙은 군부 실권을 쥐고 있어 덩샤오핑의 후계 구도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덩은 군사위 주석직을 장쩌민에게 넘기고 양상쿤 형제를 정계에서 밀어냈다.

이듬해인 1992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장쩌민은 군권까지 장악하며 실질적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이후 그는 경직된 정치 분위기를 완화하고 경제 성장에만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돈벌기’ 시대의 이중성

1990년대 중공은 정치적 냉소주의와 경제적 탐욕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덩의 ‘도광양회(韜光養晦·실력을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 전략, 그리고 장쩌민의 ‘조용히 돈 벌기’라는 슬로건 아래, 중공은 서방의 자본과 환상을 끌어들여 고속 성장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구조적 혼돈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장경제의 확산과 함께 신흥 부호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 중 다수는 정경 유착과 불법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쓰촨 출신의 모치중은 러시아와의 물물교환을 통해 군용기까지 들여오며 ‘따오예(倒爷·중개상)’ 전설을 썼으나, 끝내 부패 혐의로 수감됐다.

군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권사업에 뛰어든 군은 밀수와 뇌물에 손을 댔다. 대표적 사례가 1994년 샤먼의 사업가 라이창싱이다. 그는 ‘7자 결(七字诀)’이라 불리는 뇌물 전략으로 고위 관료들을 포섭했다. 돈, 술, 여자, 담배, 차, 골프, 집—이 일곱 가지 수단으로 권력층을 유혹해 500억 위안 규모의 밀수 제국을 일궜다. 중공의 부패가 얼마나 구조화됐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장쩌민은 경제 성장을 명분으로 통제를 일부 완화하고 국민의 정치적 불만을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뼈아팠다. 권력기관과 군부 전반이 부패에 찌들었고, 당의 기강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이 시점이야 말로 중공 내 부패가 일상화되고 관행처럼 굳어진 시기였다.

통제의 딜레마와 소련에 대한 공포

중국에선 정치 개혁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체제가 아닌 돈과 부패를 믿기 시작했다. 1997년 홍콩 반환은 국가적 자존심을 자극했고, 1998년 대홍수 당시 군을 동원한 ‘사투’는 일시적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권력 유지를 위한 통제와 부패가 더욱 공고해졌다.

중공은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지 않은 채 자본주의적 요소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며 기형적 성장을 지속해 왔다. 소련의 몰락을 반면교사 삼아 ‘권력 유지’를 절대 명제로 삼은 결과, 오늘날 중공은 정치 체제의 경직성과 경제 구조의 불안정성이라는 이중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처럼 내부에 도사린 모순이야말로 중공이 소련의 운명을 두려워하는 본질적 이유다. 외견상 강력해 보이는 체제일지라도, 그 기반은 언제든 내부에서 붕괴할 수 있다는 불안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소련의 그림자는 바로 그 불안의 실체이며, 중공 통치의 약점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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