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미국의 WHO 탈퇴 배경…세계 보건 방향을 둘러싼 갈등

2025년 07월 15일 오후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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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5월 역사적인 팬데믹 조약 채택을 기념하는 동안 미국은 이 유엔 산하 보건 기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미국은 WHO가 부패하고, 특정 이익 집단에 휘둘리며, 본래의 핵심 임무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5월 19일(이하 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78차 세계보건총회(World Health Assembly)에서 회원국들은 세계 최초의 팬데믹 협정을 반대표 없이 찬성 124표, 기권 11표로 통과시켰지만 미국 대표단은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장관이 화상 연설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이번 미국의 WHO 탈퇴를, 세계 각국 보건장관들과 WHO가 각성의 계기로 삼기 바란다. 트럼프 대통령과 제가 국제 협력에 대한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케네디 장관은 이렇게 말하며 이미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 접촉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WHO의 틀을 벗어난 대안적 글로벌 보건 시스템을 제안하며 전 세계 보건장관들에게 새 틀에서의 협력을 제안했다. 그는 WHO를 “이미 기능이 정지된 조직”이라고 표현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WHO 탈퇴를 위한 1년간의 절차를 시작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이미 2020년 탈퇴 절차를 개시했지만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이를 철회한 바 있다.

WHO는 성명을 통해 “1948년 창설 이래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인류를 보건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온 WHO의 성공적인 협력”을 강조하며 미국이 이번 결정을 재고해줄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WHO는 지금도 개혁을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아르헨티나 외에는 WHO를 공식적으로 탈퇴한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케네디 장관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탈퇴 행렬을 이끌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그가 던진 비판은 글로벌 공중보건의 향방을 둘러싼 훨씬 더 깊은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19의 긴 그림자 속에서 전 세계는 팬데믹 대응을 점점 더 우선시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백신 개발, 질병 감시 체계,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질병까지 겨냥한 첨단 기술적 통제 시도에 수십억 달러가 투입되고 있다.

그러나 자원이 한정된 현실 속에서 이러한 접근은 보건 증진을 우선하는 또 다른 패러다임과 충돌을 일으키곤 한다. 이는 영양, 위생, 경제 개발 같은 근본적인 요인들을 해결하고 지역 보건 시스템을 강화하는, 보다 일상적인 작업에 초점을 맞춘 접근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내세운 ‘미국 건강 회복(Make America Healthy Again, MAHA) 구상’은 만성질환의 근본 원인을 다루고 전인적 건강 증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후자의 접근과 철학적으로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동시에 WHO 탈퇴와 함께 해외 원조 감축, 특히 미국 국제개발처(USAID)를 사실상 해체한 조치는 국제 보건 체계 전반에 충격파를 일으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왼쪽)이 2025년 5월 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78차 세계보건총회에서 대표단을 상대로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이날 회원국들은 세계 최초의 팬데믹 협정을 승인했다. ⎥ Fabrice Coffrini/AFP via Getty Images

미국의 퇴장은 그로 인해 생길 권력 공백이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정권이나 제약회사와 같은 특수 이익 집단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그러나 일부 내부 관계자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조치가 팬데믹을 통해 드러난 체계적 문제들과 특정 이익 집단이 세계 보건 정책의 방향을 좌우해 온 자금 구조에 대해 마침내 근본적인 성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차세대 팬데믹’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헬스 폴리시 워치’는 지난 4월 한 팟캐스트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웨스턴케이프주의 스텔렌보스대학에 위치한 감염병 대응 및 혁신센터(CERI)를 이끄는 바이러스 전문가 툴리오 드 올리베이라를 인터뷰했다. 그는 코로나19의 베타와 오미크론 변이를 처음 발견한 팀을 이끈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의 WHO 탈퇴가 잘못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방금 팬데믹을 겪었고, 그로 인해 세계 경제에 얼마나 많은 달러가 들었는가?”라고 드 올리베이라는 말했다.

“미국은 전 세계 공중보건에 국내총생산(GDP)의 1%도 안 되는 금액을 기부하고 있지만 팬데믹이 발생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매년 들게 된다.”

그는 조류독감이 빠르게 확산돼 조류 개체 수가 급감하고 달걀과 가금류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5월 말 제약회사 모더나와 체결한 7억 달러(약 9450억원) 이상의 계약을 취소했다. 이 계약은 H5N1 조류독감 등 인플루엔자 아형을 겨냥한 백신 개발과 시험, 승인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모더나의 조류독감 백신은 코로나19 백신에도 사용된 메신저 리보핵산(mRNA)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미국 보건복지부(HHS)의 앤드루 닉슨 공보국장은 에포크타임스에 보낸 이메일에서 “현실은 mRNA 기술이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라며 “우리는 지난 행정부가 정당한 안전성 문제를 대중에 숨기면서 범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데에 국민 세금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현재 H5N1으로 인한 공중보건 위험은 낮고 사람 간 전염은 발생하지 않았다며 가금류와 낙농 소에서의 발병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밝혔다.

바이러스 전문가 드 올리베이라는 미국뿐 아니라 최근 해외 원조 예산을 약 40% 삭감하겠다고 발표한 영국 등 다른 국가들도 이번 결정을 재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지금은 감염병 발생 가능성이 더 커진 시대다. 결국은 자금을 투자하느냐의 문제다. 그렇게 투자하는 편이 새로운 병원체와 감염병의 물결에 계속 얻어맞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불린델라에서 획기적인 연구를 주도한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과학자 툴리오 드 올리베이라는 미국의 세계보건기구(WHO) 탈퇴 결정에 대해 비판하며 미국이 팬데믹과 감염병 발생에 대한 투자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Darren Taylor for The Epoch Times

최근 몇 년간 WHO, 세계은행(WB), 그리고 세계 최대 경제국들이 모여 경제협력을 논의하는 주요 20개국(G20) 등 국제기구들은 팬데믹 대응을 위해 매년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확보하려 노력해 왔다. 이 자금은 주로 백신 개발, 감시 시스템, 그리고 디지털 기술에 투입된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들이 근거로 삼는 위험 평가가 왜곡됐거나 약한 데이터에 기반하며 전통적인 보건 프로그램에 쓰일 기회를 빼앗는 비용이 된다고 지적한다.

“과도하게 부풀려졌다”

20년 넘게 세계 보건 분야에서 일해 왔고 WHO에서 의학 담당관과 과학자로 활동한 임상 및 공중보건 의사 데이비드 벨 박사는 에포크 타임스에 “팬데믹 위험과 감염병 발생 위험에 관한 전반적인 메시지가 잘못됐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벨 박사와 리즈 대학 연구진은 WHO 등의 기관들이 팬데믹 예산 확보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증거들을 분석했다. 그들은 여러 연구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정책 보고서에서 이런 증거들이 흔히 아직 존재하지 않는 추정 병원체인 ‘질병 X(Disease X)’나 이미 효과적인 통제 수단이 존재하는 병원체들로부터의 위협을 과장하기 위해 잘못 전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벨 박사는 “WHO의 메시지와 그 인용 자료, 그리고 세계은행과 G20 등이 사용하는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했다. 모두 팬데믹 위험을 과도하게 부풀리거나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보수주의 싱크탱크 브라운스톤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는 그의 연구 그룹 REPPARE(Re-Evaluating the Pandemic Preparedness and REsponse Agenda)는 팬데믹 투자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데이터가 오히려 위험이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WHO가 전염병 발생 가능성으로 인해 긴급 연구개발 대상으로 지정한 9가지 질병 중 하나는 코로나19이고 하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질병 X다. 나머지 7가지 중 에볼라 바이러스만이 기록된 역사에서 1만 명 이상 사망자를 낸 발병 사례가 있다.

2021년 G20 보고서는 팬데믹과 기후변화를 오늘날 인류 안보의 주요 문제로 지목하며 지난 20년간 전 세계적으로 4~5년 주기로 주요 감염병 발병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벨 박사는 코로나19와 2009년 발생한 H1N1(신종 인플루엔자)을 제외하면 2000년부터 2020년까지 언급된 모든 발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2만6000명 미만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신종 인플루엔자는 보통 계절성 인플루엔자가 매년 유발하는 사망자 수보다 적은 피해를 냈으며 인플루엔자 감시 체계는 이미 잘 확립되어 있다”고 벨 박사와 공동 저자들은 썼다. “이런 맥락에서 코로나19는 추세라기보다 예외적 사례로 보인다.”

G20 패널은 팬데믹 예방에 세계가 최소 연간 150억 달러(약 20조2500억원)를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벨 박사는 실제 요청 금액이 약 340억 달러(약 45조9000억원), 5년간 총 1710억 달러(약 230조8500억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2024년 5월 팬데믹 대비 비용 보고서에서 그는 팬데믹 예방을 위한 추산 지출이 전 세계 보건 해외개발원조의 최대 55%에 달할 수 있으며, 이는 더 높은 질병 부담에 대한 ‘고효과’ 투자에 필요한 한정된 자원을 빼앗을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벨 박사의 분석과 관련한 에포크타임스의 이메일 질의에 드 올리베이라 박사와 WHO는 응답하지 않았다.

2025년 1월 23일 스위스 제네바 세계보건기구(WHO) 본부 앞에 걸린 WHO 로고와 미국 국기. 트럼프 행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방식과 미국의 불균형적인 자금 지원 문제를 이유로 WHO 탈퇴를 결정했다. ⎢ Robert Hradil/Getty Images

핵심 임무…변화하는 우선순위

수십억 달러가 추정에 근거한 팬데믹 대응 계획에 투입되고 있지만, WHO 공동 창립 기관인 공공‧민간 백신 연합 GAVI(세계백신면역연합)는 올해 가장 심각한 신흥 질병 위협은 미확인 바이러스가 아니라 WHO가 수십 년간 싸워온 기존의 ‘느린 팬데믹’인 결핵, HIV, 말라리아라고 지적했다.

WHO에 따르면 이러한 ‘빈곤과 소외의 질병’은 매년 200만 명 이상을 사망에 이르게 하며 2023년에는 결핵이 코로나19를 제치고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으로 기록됐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고 미량 영양소가 결핍된 사람은 결핵, 말라리아, 설사로 사망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벨 박사는 말했다. 그는 영양이 과거 WHO의 주요 중점 분야였으나 자금 지원이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팬데믹과 모든 질병에 대한 회복력을 구축하려면 가장 먼저 영양 상태를 살펴야 한다”며 “우리는 이런 큰 ‘살인병들’에 대해 크게 진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벨 박사는 말라리아가 주로 5세 미만 어린이를, 결핵과 HIV는 주로 젊은 성인과 중년,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반면 코로나19는 주로 노년층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자원을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 코로나19가 아니라 이곳에 해야 한다. 하지만 WHO는 백신 중심 코로나19 대응에 재정을 집중했다. 그 이유는 재정적 압박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상업적 시장 예측 전문업체 프리지던스 리서치(Precedence Research)의 전망에 따르면 세계 백신 시장은 2025년 919억7000만 달러(약 124조1595억원)에서 2034년 1614억 달러(약 217조8900억원)로 증가할 것이 예상된다.

해외 개발원조 분야에서 팬데믹 지원 요청액은 말라리아 전체 지출의 3배가 넘는다고 벨 박사는 전했다. 한편 GAVI와 감염병대비혁신연합(CEPI) 같은 신생 조직들은 팬데믹과 백신에만 전념하고 있다.

“이 모든 자금이 WHO 예산의 전환을 초래했다”고 벨 박사는 지적했다. 그는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와 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글로벌 펀드도 이들 질병보다 팬데믹 대응에 더 많은 자금을 할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6월 26일 소셜미디어 플랫폼 X에 게시된 영상에서 케네디 장관은 GAVI가 백신 안전을 소홀히 하고 팬데믹 기간 동안 WHO와 협력해 이견을 검열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이 2001년 이후 GAVI에 지원한 80억 달러(약 10조8000억원)에 대한 정당한 설명이 있을 때까지 추가 자금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002년 11월 27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클리닉에서 의사가 결핵 환자의 엑스레이를 검사하고 있다. WHO에 따르면 결핵은 2023년 코로나19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이었다. ⎟ Spencer Platt/Getty Images

기부자 주도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WHO의 정책 우선순위가 바뀌는 배경에는 기구의 자금 조달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WHO는 점점 더 ‘지정 자발적 기부금’에 의존하게 됐으며, 이처럼 용도가 지정된 기부금이 이제는 회원국들이 납부하는 기본 분담금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지정 자발적 기부금은 민간 부문, 각국 정부 그리고 최근에는 공공‧민간 연합체로부터 들어온다.

예를 들어 2024~2025년 WHO에 들어온 전체 기여금 기준으로는 미국에 이어 게이츠 재단이 2위였지만 ‘지정 자발적 기부금’ 기준으로는 게이츠 재단이 가장 많았고 다음이 GAVI 백신 연합, 미국이 뒤를 이었다.

벨 박사는 “40~50년 전만 해도 WHO는 지역사회 통제를 강조하는 수평적 보건의료와 영양, 위생, 생활 환경 등 건강의 기본 요인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백신 같은 질병 대응 물품 중심의 수직적 통제 체계와 점점 더 중앙집권화된 관료 조직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벨 박사는 “이 변화를 주도하는 건 WHO가 아니라 자금을 대는 기부자들”이라고 강조했다.

개발도상국에서 수십 년간 보건 시스템 분야에 종사해 온 글로벌 보건 시스템 전문가 엘리자베스 폴 교수는 이 같은 변화가 WHO의 핵심 사명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브뤼셀 자유대 공중보건대학원 부교수이자 보건 정책 및 시스템 연구소 소장인 폴 교수는 “WHO가 각국 보건 시스템 성과 향상을 감독하고 지원하는 규범적 기관이 아니라 이제는 기부자 우선순위에 따른 집행기관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특히 제약 산업 등 기업 영향력으로 인해 이해충돌 문제가 당연히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팬데믹 대비 분야에서는 백신이 거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고 폴 교수는 덧붙였다.

“코로나19 때 벌어진 일을 보라. 백신에 엄청난 예산이 투입된 반면 보건 시스템 강화나 치료법 개발에는 거의 투자되지 않았다. 백신이 효율적이고 비용 효과적이며 유일한 해결책이란, 일종의 신화가 퍼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전체적인 의료 서비스 연속성을 잊고 있다.”

2021년 5월 4일 미국 시애틀에서 한 보행자가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 건물 앞을 지나고 있다. 전체 기여금 기준으로 게이츠 재단은 미국에 이어 세계보건기구(WHO)에 두 번째로 큰 기부자다. 비평가들은 이 조직이 영양과 위생 같은 지역사회 중심 보건 대책에서 중앙집권적 관료주의가 주도하는 백신 같은 물품 중심 질병 대응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지적한다. ⎥ David Ryder/Getty Images

질병 퇴치자 대 건강 증진가

이처럼 글로벌 보건 우선순위의 분열 뒤에는 근본적인 이념적 갈등이 있다고 폴 교수는 설명한다.

“우리 분야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질병과 싸우는 사람들과 건강을 증진하는 사람들이다.”

폴 교수는 전자를 두고 “훨씬 더 매력적이고 대중과 기부자들을 설득하기도 쉽다”고 말했다. “질병을 박멸하려는 시도에 자부심을 느끼거나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질병들과 근본 원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폴 교수는 질병을 ‘개별 사일로(격리된 분야)’로 나누면 모든 병원체로부터 인구를 보호하는 근본적인 조건들을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팬데믹을 대비하거나 예방하려면 기본적으로 보건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좋은 보건 시스템이 있고 인구가 건강하다면 MAHA(미국 건강 회복 구상)처럼 미래의 팬데믹에 대비할 수 있다.”

성공을 평가하는 방식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비용-편익 분석에 따르면 1000달러(약 135만원)를 투자하면 백신이나 다른 개입으로 한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그래서 10가지 백신을 맞은 아이는 10번이나 구한 것으로 계산된다. 하지만 그 아이가 다음날 영양실조로 죽을 수도 있다.”

더 많은 간호사를 고용해 생명을 구하는 효과를 보여주는 것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모하메드 라민 드라메 박사도 유사한 사례를 설명했다. 그는 수십 년간 WHO와 유럽 각국 정부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보건 시스템과 정책 전문가로 활동해 왔다.

“사업들이 항상 현지 이해관계자와 공동으로 설계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현지와의 협의 부족을 지적하며 “보통은 ‘일괄 적용식’ 해결책이 주어진다. 그리고 2년 후엔 목표 지표를 달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90%의 어린이를 접종하는 목표는 달성할 수 있지만 동시에 말라리아, 설사병, 호흡기 질환에 대한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으면 아이들은 말라리아로 죽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드라메 박사는 GAVI 백신 연합 독립 심사위원회 위원이기도 한데 현재 GAVI가 너무 긴급 대응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폴 교수는 질병 부담과 사망률의 근본 원인이 사회경제적·정치적 요인에 있다고 강조한다. 팬데믹 예방 구상에도 기술적 해결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경계했다.

“대부분의 글로벌 보건 문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건강 결정 요인과 막대한 불평등, 다양한 위험 요인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정치다.”

2025년 4월 7일 우간다 아팩 지역에서 보건 담당자가 말라리아 백신에 대해 지역 주민들을 교육한 뒤 아기에게서 말라리아 신속 진단 검사용 혈액 샘플을 채취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결핵, HIV, 말라리아 등 ‘빈곤과 소외’와 관련된 질병들이 여전히 연간 200만 명 이상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WHO가 이 문제 해결에 충분한 자원을 투입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 Hajarah Nalwadda/Getty Images

붕괴인가 개혁인가

미국의 WHO 탈퇴와 해외 원조 축소는 단기적으로 전 세계 보건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궁극적으로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난 5월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 제출된 증언에 따르면 미국의 원조 철회는 일부 HIV 프로그램에 큰 타격을 줘 일부는 완전히 사라졌고, 결핵 프로그램에 대한 자금 지원은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든 상태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지난 3월 ‘국제 보건 정책 및 관리 저널’에 게재된 사설에서 WHO의 예산 적자가 개발도상국에서의 예방접종, 모자보건 프로그램, 비상 대응 준비에 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미국은 질병 감시에 대한 접근권을 잃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WHO의 문제는 미국 탈퇴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미국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WHO의 주요 사업들은 만성적인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벨 박사는 팬데믹 예방에 집중된 자금과 기부자 중심의 우선순위가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전 세계적인 기아 위기는 심각해지고 있으며, 2023년 세계식량계획(WFP)은 기록적인 64%의 자금 부족을 보고했다.

WHO와 협력하는 에이즈·말라리아·결핵 퇴치 글로벌 기금(Global Fund)은 미국이 매년 수십억 달러를 기부했음에도 만성적인 자금 부족 문제와 경영 부실, 부정 의혹에 직면해 있다.

백악관 성명과 법무부 기소에 따르면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역시 사기, 낭비, 남용 혐의에 시달려 왔다.

폴 박사는 미국의 철수로 인해 단기적으로 WHO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국가들이 피해를 입겠지만 WHO가 인력 감축을 포함해 중복 사업을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한다.

최근의 감축 조치들이 이미 개선 효과를 냈다고 전한 그는 “새 프로그램이 완벽하지 않지만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덧붙였다.

또한 감축 대상이 된 많은 프로그램들은 애초에 효율적이거나 효과적이지 못했다며 중복과 비효율성은 자금이 특정 프로그램, 질병, 주제로 ‘사일로’ 형태로 조직된 데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WHO에 2022~2023년 2개년간 12억8000만 달러(약 1조7280억원)를 기여한 미국이 탈퇴함에 따라 WHO는 예산 삭감과 회원국 회비 인상을 강행했으며 회비가 이제 전체 예산의 40%를 차지하게 됐다.

케냐 키수무에 위치한 쿠요우 하위군 병원 복도에서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 병원은 과거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지원을 받았다. 키수무 지역은 케냐에서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감염률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로 성인 인구의 약 17.6%가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전국 평균의 거의 다섯 배에 달한다. ⎥ Michel Lunanga/Getty Images

중국이 공백을 메울까?

일부에서는 권위주의 국가들이 다가오는 공백을 메울 것이란 우려를 표한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 방문연구원 케네스 버나드는 지난 1월 KFF 헬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건 그저 어리석은 일이다. 미국이 WHO에서 철수하면 글로벌 보건 리더십에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은 분명히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중국이 채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이 WHO 자금의 대부분을 제공하는 반면 중국과 같은 다른 국가들이 운영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인구 규모에 비해 미국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기여해 왔다. 2024~2025년 의무 분담금으로 중국은 1억7500만 달러(약 2362억5000만원)를 내는 것으로 예정돼 있는 반면 미국은 2억6100만 달러(약 3525억5000만원)를 부담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은 향후 5년간 5억 달러(약 6750억원)의 자발적 기금을 약속했다.

벨 박사는 인구 규모를 고려하면 WHO가 권고 역할을 수행하고 각국의 보건 정책을 강제하거나 집행하지 않는 한 중국이 WHO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갖는 것은 이론적으로 적절하다고 말한다.

미국과 다른 국가들은 팬데믹 조약 최종안 채택 과정에서 주권 문제를 우려했으나 WHO 측은 이 조약이 국가나 국내법을 직접 지시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으며 여행 제한, 백신 의무화, 치료나 진단 조치, 봉쇄 조치 등도 강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미국의 WHO 탈퇴는 글로벌 보건계 안팎에서 단지 상징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며 실질적 변화를 강제하지 못할 것이라는 실망감을 낳고 있다.

더 큰 문제-재정과 기업의 영향력

벨 박사는 이 문제는 조약이나 WHO 자체보다 훨씬 크다고 강조한다.

“WHO는 경찰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말한다. “팬데믹을 우선시하고 공공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생각 뒤에는 매우 큰 재정 및 기업 기관들이 있다. 이들은 민간 기업이 이 분야에서 큰 이익을 얻도록 국가들을 설득하는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장관이 2025년 5월 20일 미국 워싱턴D.C. 캐피톨 힐에서 열린 상원 소위원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케네디 장관은 최근 GAVI 백신 연합이 백신 안전을 소홀히 했고, 팬데믹 기간 동안 반대 의견을 억압하고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WHO와 협력했다고 비판했다. ⎥ Madalina Vasiliu/The Epoch Times

작은 나라들은 특히 반대 입장을 취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금융 기관이 자금 접근을 제한하기 시작하면 정부가 의무 조치를 도입하거나 감시 체계를 정비하지 않는 한 반대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벨 발사는 말했다.

케네디 장관이 MAHA 원칙을 언급하며 세계 보건 체계의 전면 개편 가능성을 제기한 데 대해 폴 교수는 현 체계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동의했으며 벨 박사는 케네디 장관의 대안 제시에 힘을 실었다.

드라메 박사는 미국의 WHO 탈퇴가 아프리카 국가들이 국내 공중보건 예산을 늘리고 외교에 집중하며 투자를 유치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빌 게이츠가 하는 일은 환영하지만 아프리카에도 우리만의 빌 게이츠가 있다”고 그는 대륙 출신 억만장자들을 언급하며 말했다.

아프리카 밖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들은 매년 950억 달러(약 128조2500억원)에 달하는 송금을 고국에 하고 있는데 그중 1~2%만 공중보건에 투입돼도 국가 보건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드라메 박사는 강조했다.

그는 HIV 팬데믹을 회상하며 WHO가 임박한 위기에 대응하느라 미적거리는 사이 1996년 유엔 합동 에이즈 프로그램(UNAIDS)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WHO 구조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 방식으로 계속 운영돼서는 안 된다”고 드라메 박사는 말했다.

*이정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