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피지, 중국의 군사적 야망에 반발…태평양 지역 단합 촉구

2025년 07월 08일 오후 3:28
2023년 2월 23일 피지에서 열린 태평양 제도 포럼(PIF)에 참석한 시티베니 라부카 피지 총리의 모습. ⎜ Ben McKay/AAP Image2023년 2월 23일 피지에서 열린 태평양 제도 포럼(PIF)에 참석한 시티베니 라부카 피지 총리의 모습. ⎜ Ben McKay/AAP Image

중국의 태평양 내 영향력이 커지는 가운데 시티베니 라부카 피지 총리는 7월 첫째 주 호주 방문 중 자국이 해당 지역 내에 중국의 군사기지 건설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다른 태평양 섬나라들에도 중국의 지정학적 야망에 맞서 연대할 것을 촉구했다.

라부카 총리는 7월 2일 호주 캔버라 국립프레스클럽 연설에서 “그들을 환영할 나라가 있겠나? 피지는 아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이는 태평양 섬나라 지도자가 중국의 군사적 확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가장 강경한 발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에 대해 피지 주재 중국 대사관은 즉각 반박 성명을 내고 해당 지역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일축했다.

남태평양 권력 구도의 전환점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회의적 시각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라부카 총리의 발언이 단순한 외교적 수사를 넘어 미국과 호주, 기타 민주주의 국가들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태평양 섬나라들이 더욱 전략적 독립성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을 반영한다고 분석한다.

피지의 이번 입장은 남태평양에서 변화하는 권력 구도를 보여주는 가장 최근 사례다. 2024년 9월 중국이 태평양 해역에 모의 탄두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이로 인해 호주, 뉴질랜드, 피지, 일본, 대만 정부가 잇따라 안보 우려를 표명했다.

피지의 라투 윌리아메 카토니베레 대통령은 같은 달 유엔 총회 연설에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며 “우리 지역에 대한 존중”을 촉구하고 도발적인 미사일 실험 중단을 요구했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중국의 의도에 대해 점점 경계심을 높이는 태평양 섬나라들에 전환점이 됐다고 보고 있다.

피지가 목소리를 낸 이유

대만 국방안보연구원(INDSR)의 선밍스 선임연구원은 라부카 총리의 발언이 단순한 외교적 메시지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계산된 행보라고 분석했다.

선밍스 선임연구원은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첫째, 피지는 이 지역 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호주 같은 주요 안보 파트너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피지는) 이러한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경제적·안보적 지원을 계속 받길 원한다”고 설명했다.

선 연구원은 둘째, 라부카 총리의 발언이 미국과 호주의 지지—혹은 최소한 권유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외교적 지원이 피지로 하여금 중국 공산당(CCP)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데 더 큰 자신감을 갖게 했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셋째, 피지는 다른 태평양 섬나라들이 단결된 입장을 취하도록 독려하길 바라고 있다. 선 연구원은 “라부카 총리는 남태평양과 서태평양에서 점점 확산되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에 맞서 이제는 함께 나설 때라는 신호를 지역 국가들에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과의 경찰 협력 종료

라부카 총리의 공개 발언뿐 아니라 피지는 자국 내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도 취해 왔다.

2023년 초 라부카 정부는 중국과의 경찰 협력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이어 2024년 3월에는 모든 중국 경찰 인력에게 피지를 떠나도록 명령했다. 이 조치로 인해 2011년 중국 공안부와 체결된 논란 많은 경찰 협력 협정은 사실상 큰 타격을 입었다.

이 결정은 솔로몬제도, 키리바시 등 인근 국가들에서 중국의 법 집행기관과 해양 감시선이 활동을 확대하는 데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내려졌다.

라부카 총리는 호주 국립프레스클럽 행사에서 중국 해경의 활동은 반드시 피지의 주권과 해양 경계를 존중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태평양 전략…‘단결과 평화의 바다’

라부카 총리는 현재 태평양 섬나라들의 주권과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지역 이니셔티브인 ‘평화의 바다(Ocean of Peace)’를 주도하고 있다. 이 제안은 경제적이든 군사적이든 외부 세력의 압박에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오는 9월 열리는 태평양 제도 포럼(Pacific Islands Forum) 정상회의에서 주요 의제로 논의될 예정이다.

이 구상은 포럼에 속한 18개 회원국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역내뿐만 아니라 세계 주요 강대국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구상이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태평양은 오래전부터 중국이 전략적 존재감을 확대하려는 주요 지역이며 괌과 하와이 등 미군의 핵심 기지가 위치한 곳으로 미국에게도 전략적 중요성이 크다.

대만 국방안보연구원의 윌리엄 청 연구원은 중국이 남태평양에서 존재감을 넓히려는 것은 미국과 호주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대만의 외교적 입지를 약화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태평양은 여전히 대만이 공식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다.

청 연구원은 에포크타임스에 “중국 공산당의 확장 전략은 대만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미국의 군수 물류 거점을 압박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며 “피지의 최근 입장은 베이징의 ‘깃발 꽂기’ 전략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이라고 말했다.

서방의 지원 확대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데 대한 대응으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태평양 지역에 대한 원조와 인프라 투자를 대폭 확대해 왔다. 미국은 2022년 이후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으로 해양 안보, 재생 에너지, 디지털 인프라 분야에 초점을 맞춘 40억 달러(약 5조원) 이상의 지원을 약속했다.

2024년 미국, 호주, 일본, 인도로 구성된 ‘쿼드(4자 안보 대화체)’는 태평양 섬나라들과의 기술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해당 국가들이 중국 투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도록 돕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인도는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며 대안적 개발 모델과 기술 이전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태평양 국가들에게 베이징 외에도 선택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하며 협상력 또한 키워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신흥 지정학적 격전지

많은 미국인에게는 태평양 섬들이 먼 지역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 지역이 현재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간 글로벌 경쟁에서 새로운 전선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한다. 라부카 총리의 연설은 그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중대한 순간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청 연구원은 “이들 국가들은 만성적인 예산 부족과 취약한 거버넌스 문제를 안고 있다”며 “중국 공산당 편에 서기보다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양측의 지원을 모두 활용하는 편이 이득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보 문제에 있어 중국의 군사기지가 허용된다면 이는 현재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청 연구원은 경고했다.

피지의 이번 선언은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태평양 섬 국가들이 국제 지정학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하면서 주권과 집단 안보, 평화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지역 질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정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과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