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4월 25일 일요일, 중국 시민 약 1만 명이 중국 공산당 본부(집무실) 소재지인 베이징 중난하이 앞에 몰려들었다.
모인 시민 모두가 파룬궁 수련생들이었다. 중국 공산당 정권(CCP)에 파룬궁 탄압을 중단할 것을 평화적으로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날 이후, 공산당 당국은 파룬궁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24년이 흘렀다. 지난 2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플러싱에서는 1999년 4월 25일 파룬궁 중난하이 시위 24주년 기념 파룬궁 박해 중단을 외치는 행진이 열렸다. 이른바 ‘4·25’ 기념 행진이다. 이날 거리에는 약 4천여 명이 함께했다.
24년 전 베이징 시위 현장에 있었던 40대 여성 엘시 허 씨도 행진에 동참했다. 허 씨는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허 씨는 돌이켜보건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역사의 목격자가 되는 일이 아닌가 싶다고 털어놓았다.
평화로운 시위
1999년 당시 대학 신입생이었던 허 씨.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날씨가 흐렸다. 가벼운 평상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허 씨는 다른 친구 세 명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중난하이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와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시민들은 교통 흐름에 방해되지 않게끔 인도 위에 길게 줄을 섰다. 대부분이 조용히 서 있었고, 일부는 책을 읽거나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몇은 쓰레기를 수거하기 위해 비닐봉지를 들고 움직이기도 했다.
총 1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은 이처럼 평화로운 방식으로 파룬궁을 수련할 자유를 호소했다. 천안문 사태 이후로 중국 최대 규모의 평화 시위였다.
이에 주룽지 당시 중국 국무원 총리가 파룬궁을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시위는 해산됐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중국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파룬궁 탄압이 시작됐다. 중국 정권의 약속은 공허한 말뿐이었다.
“당신들이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안다”
진(眞)·선(善)·인(忍)을 원리로 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심신수련법인 파룬궁은 199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추산에 따르면 1999년 기준 중국 인구 13억 명 중 1억 명이 파룬궁 수련에 임했다.
같은 해 중국 공산당은 파룬궁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공개적인 박해를 가하기 전인 1999년 초, 중국 대도시 톈진에서 파룬궁 수련자 수십 명이 불법 체포 및 구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당국은 구금자들의 석방을 원한다면 수도인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라고 안내했다.
허 씨는 “파룬궁 수련자들은 진(眞)·선(善)·인(忍)을 따르기 때문에 모두한테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며 “여기에는 중국 정부도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허 씨에 따르면, 당시 파룬궁 수련자들은 톈진에서 발생한 일은 정부가 파룬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파룬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면 중국 당국이 다른 입장을 취하리라 여겼다는 것.
허 씨는 “파룬궁 수련자들은 친절과 신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그런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기를 선택했다”고 했다.
1999년 7월 이후 중국 공산당 정권은 파룬궁 말살을 목표로 수련자에 대해 불법 구금·고문·벌금·노역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해 왔다. 특히 강제 장기 적출로 인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파룬궁 수련자인 허 씨의 경험은 다른 많은 파룬궁 수련자 가족이 겪은 일들과 비슷하다. 지난 2001년 대학교수였던 허 씨의 모친과 대학생이었던 허 씨, 그리고 동생 세 사람이 구금됐다.
허 씨는 “파룬궁에 대한 정보를 은밀히 수집하려던 당 간부가 동급생 한 명에게 나와 친구가 될 것을 지시했다”면서 “몇 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중국 공산당은) 모든 수련자들의 행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며 “수련자들에게 혐의를 씌우려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허 씨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많은 중국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박해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2012년에는 중국 공안이 또 한 번 허 씨 가족의 집을 급습했다. 또다시 허 씨 모친이 끌려갔다. 허 씨의 부친은 충격으로 쓰러졌고 그대로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허 씨 부친은 약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당시 중국 공안은 허 씨 가족을 향해 “당신들이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안다”면서도 “파룬궁 수련자를 체포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 파룬궁 수련자 한 명당 4천 위안(한화 약 77만원)을 받는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남겼다.
“이정표적 사건”
중국 분석가 제임스 고리는 에포크타임스 자매 매체 NTD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공산당은 무신론 국가를 추구하지만 실은 두려워하고 있다”고 평했다.
“사람들은 폭력이나 억압으로는 깰 수 없는 무언가에서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두려워하는 이유”라는 게 고리 분석가의 설명이다.
그레고리 코플리 국제전략연구협회 회장은 파룬궁의 저항이 고무적이라고 분석했다.
코플리 회장은 NTD와의 인터뷰를 통해 “파룬궁 철학은 개인의 정신을 진(眞)·선(善)·인(忍)으로 고양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는 중국 공산당 같은 조직이 억압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고리 분석가는 파룬궁 커뮤니티가 1999년 4월 25일 시위를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념하고 축하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중국 역사에서 공산당 쇠퇴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남을 수 있도록 4.25 시위를 다룰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구를 위한 선택
4월 23일 뉴욕 파룬궁 행진에 참여한 사회 각계 인사들은 자유 세계가 보다 분명한 입장을 취할 것을 촉구했다.
거스 빌리라키스 미 하원의원은 모든 인권의 가장 기본을 침해하는 오래된 박해에 맞서 전 세계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빌리라키스 의원은 에포크타임스에 “우리는 오랜 기간 침묵해 온 사람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러한 범죄에 대해 침묵한다면 시민사회의 위험을 불러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발언했다.
전직 언론인 자오 루오시 씨는 방관하는 이들의 ‘선택적 맹목성(selective blindness)’ 때문에 악이 득세할 상황을 우려했다.
자오 씨는 “어떤 사람들은 ‘나는 파룬궁을 박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침묵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러한 탄압이 일어나도록 묵인하는 행위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박해가 계속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라고 지적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파룬궁 수련자들은 아직도 두려움에 시달린다. 중국에 남아있는 사랑하는 이들의 안전 문제 때문이다.
10년 전 중국을 탈출한 왕샨샨 씨는 파룬궁 박해를 알렸다는 이유로 최근 징역 4년형을 선고받은 자신의 모친에게 도움을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런가 하면 아내와 아들을 미국으로 보낸 또 다른 파룬궁 수련자 저우더용 씨에게는 이달 20일 징역 8년형이 선고됐다.
이날, 허 씨는 중국 정권의 계속되는 탄압에 맞서 모든 사람이 선택을 해야 한다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목소리를 내겠습니까, 아니면 무관심으로 침묵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