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가 아니라 제거”…미 투자자 중재 문서에 담긴 ‘쿠팡 사태’ 전모
쿠팡 로고가 배경 화면과 스마트폰 바탕 화면에 보인다. | 로이터/연합 미 투자사들, 한미 FTA 위반 공식 제기… “미국 기업 표적화”
“정부 차원의 총공세”로 규정, 여당 고위 인사 발언도 ‘증언’ 수집
미국의 대형 투자사들이 한국 정부의 쿠팡 제재를 문제 삼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위반 의혹을 공식 제기했다.
쿠팡의 주요 주주인 그린옥스와 알티미터는 한국 정부의 조치가 정당한 규제를 넘어, 미국 기업을 시장에서 배제하기 위한 차별적 행정·정치적 작전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제 중재 절차 착수를 예고하며, 그 근거로 한국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18쪽 분량의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다(보도자료).
이번 의향서는 단순한 항의를 넘어 국제투자분쟁(ISDS)을 염두에 둔 정교한 법률 문서다. 투자사들은 중재 요건인 ‘차별성’, ‘의도성’, ‘비례성 상실’, ‘간접 수용’ 등의 논리에 맞춰 정부 조치와 정치권 발언, 타 기업 사례를 배치했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이 증거들을 들고 국제 재판으로 가겠다”는 강력한 최후통첩인 셈이다.
간접수용이란 법적·제도적 규제로 자산을 무력화해 사실상 강제수용했다는 의미다. 이런 용어가 직접 의향서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투자사들은 지금까지 수집한 증거를 보여주면서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이러한 증거를 들고 중재로 간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한국 정부에 전달한 셈이다.
이 대통령·정홍식 법무부 차관 앞으로 의향서 제출
투자사들은 이재명 대통령과 정홍식 법무부 차관(국제법무과)를 수신인으로 한 의향서 서두에 쿠팡이 2021년부터 뉴욕증시에 상장된 기업이자, 미국 투자자들이 주식 15억 달러를 보유한 기업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이들은 “그린옥스는 설립 후 14년간, 알티미터는 18년간 총 30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면서 어떤 개인·기관·국가를 상대로 단 한 번의 법적 조치도 취한 적이 없다”며 “한국 정부의 충격적 행위로 인해 미국 투자자들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됐다”고 배경을 밝혔다.
이어 ▲쿠팡에 대한 공격 즉각 중단 ▲회사의 정상적인 사업 영위를 위한 완전한 회복 ▲장기간 지속된 차별적 캠페인의 영구적인 종료 등을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한국을 상대로 수십 억 달러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중재 절차에 착수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쿠팡, 미국의 성공적 투자 사례…한국에도 가치 창출”
투자사들은 쿠팡의 성장 과정이 미국의 성공적 투자 사례이자 한국 소비자와 근로자에게도 직접적 이익을 제공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쿠팡이 자체 물류망, 자동화 시스템, 새벽배송 등을 통해 가격·속도·선택 폭에서 기존 유통 질서를 혁신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 전자상거래 시장 전반의 효율성을 끌어올렸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가 이뤄졌고, 대규모 고용이 창출된 점도 부각했다.
이는 쿠팡이 한국 정부가 지적하는 것처럼 문제적 기업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성공적인 외국인 투자 사례라는 기준점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의 쿠팡 제재가 ‘미국 투자자 보호’라는 국제조약 위배로 다뤄질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전례 없는 범정부 총공세…베네수엘라에서 볼 법한 일”
의향서에 따르면 사건의 발단은 2025년 발생한 쿠팡 개인정보 유출이다. 중국 기반 위협 행위자(전 직원)가 3300만 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외부로 유출된 정보는 약 3000개 계정에 그쳤고 금융정보, 정부 발급 신분증, 로그인 정보 등 핵심 민감 정보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투자사 측 설명이다.
그럼에도 이후 한국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고용노동부, 금융감독원, 관세청, 경찰, 국토부 등 최소 14개 이상 기관이 동시다발적으로 쿠팡에 대한 조사·점검에 착수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개인정보나 사이버 보안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분야였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세청 150명 규모 태스크포스, 경찰 86명 전담 수사팀, 전국 387개 물류시설에 대한 동시 점검 요청 등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며, 사건 성격에 비해 대응이 과도했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압박을 ‘정부 차원의 총공세(whole-of-government assault)’로 규정했다.
아울러 “이는 베네수엘라나 러시아 같은 전체주의 적대국에서나 예상할 수 있는 행위”라며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이자, 경제 선진국이자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것이라고는 미국 투자자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치권 발언을 ‘증거’로 제시… ‘이념적 요인’ 정조준
투자사들은 SK텔레콤(2023년), 카카오페이(2024년) 등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례에서도 범정부 차원의 동시 조사나 기업 운영을 마비시킬 수준의 압수·점검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등 중국계 전자상거래 기업 역시 개인정보·보안 논란에 직면했지만, 쿠팡과 같은 조사 강도나 정치적 압박을 받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러한 대비는 (한국) 정부의 쿠팡 대응이 개인정보 보호라는 공익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특정 기업을 표적으로 삼아 차별적으로 집행되는 점을 보여준다”고 비판하면서 특히 민주당-이재명 정부 출범 후 한국의 쿠팡 제재에 ‘이념적 요인’이 더해졌다고 주장했다.
투자사들은 그 근거로 주한 미군을 “점령군”으로 부른 이 대통령 발언, 반미 친중 성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민주당에 대한 한국 내 일부 평가 등을 언급하고 여당 고위 인사들이 “수천만 명 피해”, “쿠팡 몰락의 시작”, “퇴출” 등을 언급한 발언을 날짜·회의명과 함께 나열했다.
특히 김민석 국무총리의 발언은 별도로 강조했다. 김 총리가 쿠팡 제재를 두고 “마피아를 소탕할 때와 같은 결기”, “인력·자원 걱정 말고 강력한 경제 제재”를 언급한 점은, 투자자 측에 의해 “법치주의보다 정치적 처벌을 우선하라는 신호”로 해석됐다.
국제 중재 선례… 베네수엘라·러시아 모두 정부가 패소
기업-국가 간 국제 투자 분쟁에서 당사국 고위 정치인의 공개적 발언은 중요한 증거로 채택된다. 이후 행정적·사법적 조치가 독립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제 투자 분쟁에서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캐나다 금광업체 크리스탈렉스와 베네수엘라 정부 간 소송에서,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중재판정부는 2016년 크리스탈렉스 손을 들어주며 베네수엘라 정부에 12억 달러(약 1조 7천억원) 규모의 배상 판정을 내렸다.
이 사건에서는 “외국 기업이 전략 자산을 통제하게 할 수 없다”, “광산은 국민의 자산”이라는 베네수엘라 고위 정치인들의 발언이 쟁점이 됐다. 크리스탈렉스의 베네수엘라 광산 연장 허가 심사에서, 당국의 엄정한 심사보다 정치적 동기가 배후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증거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오일회사 유코스와 러시아 정부 사건에서도 헤이그 소재 상설 중재재판소(PCA)는 러시아 고위 정치인 발언과 검찰, 국세청, 사법당국을 동시 동원한 제재가 “악의적 의도”를 판단하는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여 2014년 러시아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미국 투자사들이 한국 정부에 보낸 중재의향서는 표면적으로는 쿠팡 사태을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한국 정부 전반을 겨냥하고 있다. ‘한국이 여전히 규칙 기반의 투자 환경을 유지하는 동맹국인가, 아니면 정치적 판단에 따라 외국 기업을 표적화할 수 있는 국가로 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청원 접수 후 45일 이내에 공식 조사 착수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조사에 착수할 경우 통상 대응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따른 국제 중재 절차 역시 일정 기간 협의 이후 본격화될 수 있어, 쿠팡 사태가 기업 분쟁을 넘어 한미 통상 현안으로 확산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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