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중공이 가장 먼저 ‘대만 독립’을 주장했다는 다섯 가지 증거
1947년, 중공 지도자 마오쩌둥은 “우리는 대만 독립을 찬성하며, 대만이 스스로 원하는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오늘날 중공의 ‘반(反)대만 독립’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역사적 기록이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중공)은 ‘대만 독립 반대(反台獨)’를 외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공이 대만에 대한 군사·외교적 압박을 강화할 때마다 내세우는 명분 역시 언제나 ‘대만 독립 반대’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가장 먼저 ‘대만 독립’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이론과 조직 차원에서 추진했던 세력이 다름 아닌 중공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본 글은 「중공은 중국에서 ‘독립’을 선동한 시초」 등 관련 사료와 연구 성과를 토대로, 중공이 어떤 배경에서 ‘대만 독립’을 주장하고 실제로 추진했는지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살펴본다.
중공 ‘대만 독립’ 이론의 뿌리
먼저 근본적인 질문부터 던질 필요가 있다. 중공은 왜 과거에 ‘대만 독립’을 지지했는가.
이 질문의 답은 중공 사상의 이론적 원류 가운데 하나인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찾을 수 있다.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 이전부터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 자결권’을 핵심 이론으로 제시했다.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식민지와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을 촉발해야 하며, 이를 통해 제국주의 국가들을 내부에서부터 분열시켜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레닌은 식민지 민족이 제국주의 지배와 자국 자본가 계급의 이중 억압을 받고 있다고 보았고, 이들이 계급 혁명과 민족 혁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1919년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공산 인터내셔널)이 창설됐다. 코민테른의 핵심 임무 중 하나는 식민지와 약소 민족 지역에 공산당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독립 운동과 공산 혁명을 병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국공산당, 조선공산당, 일본공산당, 대만공산당이 차례로 조직됐다. ‘대만 독립’이라는 구호 역시 이 국제 공산주의 전략의 산물이었다.
증거 1: 중공이 최초의 ‘대만 독립’ 강령을 기초
1927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이던 니콜라이 부하린은 일본공산당에 ‘일본공산당 대만민족지부’, 즉 대만공산당 설립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1928년 일본 경찰이 일본공산당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3·15 검거’를 단행하면서, 일본공산당은 대만공산당 설립을 주도할 여력이 없어졌다. 이 임무는 결국 중공으로 이관됐다.
중공은 이를 넘겨받아 준비 작업에 착수했고, 그 과정에서 최초의 ‘대만 독립’ 당 강령을 기초했다. 1928년 4월 14일, 대만공산당 창당을 위한 예비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중공 중앙대표 펑룽(彭榮)이 제안했다는 설, 중공 중앙임시정치국 주석 취추바이(瞿秋白)가 주도했다는 설, 또는 임시정치국 위원 런비스(任弼时)가 관여했다는 설 등으로 전해진다.
이튿날인 4월 15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치외법권 지역) 샤페이루 지역의 한 사진관 2층에서 대만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만 민족 독립’과 ‘대만공화국 수립’을 명시한 정치 강령이 채택됐다. 이는 대만 역사상 최초로 ‘대만 독립’을 공식 강령으로 내건 정치 조직이었다.
당시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중국의 합법 정부는 중화민국이었다. 그럼에도 대만공산당은 대만의 중화민국 귀속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이 노선은 중공 중앙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확립됐다.
증거 2: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헌법대강』의 민족 분리 인정
1931년 11월 7일, 중공은 장시성 루이진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는 중화민국 영토 내에 세워진 사실상의 ‘국중지국(國中之國)’이었다.
이들이 제정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헌법대강』 제14조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민족 자결권을 인정하고, 중국에서 분리돼 독립 국가를 수립할 권리까지 명시적으로 보장했다. 몽골·회족·티베트·먀오족·리족·고려인 등은 중국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하거나 탈퇴할 권리, 또는 독자적인 자치 구역을 설립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대만이 이 조항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일본 지배하에 있던 대만 역시 이 논리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증거 3: 마오쩌둥의 ‘대만 독립’ 지지 발언
미국 언론인 에드거 스노가 1930년대 중공 근거지를 취재해 쓴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에 따르면, 1936년 7월 연안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은 “조선 인민이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열렬히 지지할 것”이라며 “이는 대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했다.
항일전쟁 종전 후인 1947년 ‘2·28 사건’ 이후에도 마오는 연안에서의 방송 연설을 통해 “대만 인민이 장제스와 국민당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며, 대만 독립과 대만이 원하는 국가 수립을 찬성한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중공 기관지 『해방일보』에 실렸다.
증거 4: 중공 당 기관지가 대만을 ‘각국’으로 분류
1945년 5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는 「대만 등 각국 연안 체류 당원들이 중공 제7차 당대회에 보내는 축하 서한」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해방일보』는 축하 서한의 발신 지역을 소개하며 대만을 ‘각국(各國)’ 가운데 하나로 명시했다. 대만은 필리핀, 베트남, 태국, 말라야(현 말레이시아),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과 함께 나열됐으며, 중국의 성(省)이나 국내 지역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중공의 대만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일본의 패전이 가시화되던 시점에도 중공은 공식 당 기관지를 통해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외 여러 국가와 병렬적으로 분류함으로써, 대만을 중국 본토와 구분되는 별도의 정치적 공간으로 인식했음을 드러낸다.
『해방일보』가 중공 중앙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이러한 분류는 우발적 실수가 아니라 대만을 포함한 주변 지역의 분리·독립 가능성을 전제로 한 중공의 혁명 노선이 반영된 결과로 평가된다.
증거 5: 국내외 학자들의 체계적 연구와 사료 검증
중공과 마오쩌둥의 대만 관련 발언과 노선을 둘러싸고는 국내외 다수의 역사학자와 중국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이들은 중공의 공식 문헌과 당 기관지, 지도부 발언 기록, 코민테른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며, 중공이 건국 이전 상당 기간 동안 대만을 중국의 불가분한 일부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 왔다.
대만의 역사학자 스밍(史明), 미국의 중국학자 프랭크 샤오와 로런스 설리번, 독일의 중국학자 요르크-마인하르트 루돌프 등의 연구는 이러한 흐름을 대표한다. 연구 방법과 관점은 달랐지만, 중공 초기 지도부의 대만 인식에 대해서는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특히 루돌프는 박사 학위 논문 『중공과 대만』에서 1920~40년대 중공의 공식 문건과 지도부 발언을 분석한 결과, “적어도 1947년까지 중공 지도부의 기본 관점은 대만이 독립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중공이 대만 문제를 ‘민족 자결’과 ‘식민지 해방’의 틀에서 다뤘으며, 이를 중국 영토 회복 문제와는 구분해 인식해 왔다고 분석했다.
오늘날 중공은 이러한 해석을 부인하며 일부 발언이 왜곡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대만 관련 발언 원문은 다수의 1차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 미국의 중국사 연구자 스튜어트 슈람이 편집한 『마오쩌둥 혁명 저작집』에는 1930~40년대 마오의 연설과 담화, 서신이 원문 그대로 수록돼 있으며, 대만 독립이나 대만 인민의 자결권을 인정하는 취지의 발언도 포함돼 있다.
이처럼 여러 국가의 연구자들이 독립적으로 수행한 연구가 동일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중공이 과거 대만 독립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독립 가능성을 전제로 접근해 왔다는 사실은 단순한 해석을 넘어 축적된 사료 연구의 결과로 평가된다.
중공은 왜 태도를 바꿨는가
중공이 과거 대만 독립을 주장한 이유는 레닌의 식민지 혁명 이론과 코민테른 노선을 혁명 전략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공은 합법 정당도, 집권 세력도 아니었고, 중화민국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민족 자결과 분리 독립을 전술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 시기 중공은 티베트·신장·몽골 등의 분리 가능성을 인정했으며, 일본 지배하의 대만 역시 독립 또는 분리 가능성을 전제로 접근했다. 기존 국가 질서를 해체해야 혁명의 공간이 열린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1949년 정권을 장악한 뒤 중공의 입장은 급변했다. 혁명 세력에서 통치 권력으로 전환되자, 과거의 ‘민족 자결’은 체제 분열을 부르는 위험 요소가 됐다. 중공은 곧바로 대만 문제를 ‘주권’과 ‘영토 보전’의 문제로 재정의하며, 이전의 독립 관련 발언과 문건을 사실상 부정했다.
결국 중공의 태도 변화는 원칙의 진화가 아니라 권력 위치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독립’을 주장하다가, 권력을 쥔 뒤 이를 ‘분열’로 규정하는 방식은 중공 권력 정치의 일관된 특징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이경찬 논설위원은 정치 PR 전문가로, 한국커뮤니케이션에서 정치·선거 전략과 홍보를 담당하며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축적했습니다. 이후 한국정치사회연구소 연구위원과 정치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정책과 정치 현장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에포크타임스 기자로 오랜 기간 활동하며 언론 현장의 최전선을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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