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섬멸?…패주를 승전으로 미화한 中 공산당의 항미원조
중공군, 어떻게 한반도에서 무너졌나 – 무력 침공과 패주의 전쟁사 ①
1950년 6월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서 38선을 참호에서 관찰하는 한국 군인들. | INTERCONTINENTALE/AFP via Getty Images 중국 공산당(중공) 관영 매체들은 한국 정부의 중국군 유해 송환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송환된 유해를 ‘이기고 돌아온 영웅’으로 포장했다. 이는 중국 사회의 애국주의 정서를 자극하기 위한 전형적인 선전 방식이다. 그러나 중공이 ‘항미원조[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운 전쟁]’라고 부르는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주장은, 전쟁의 경과와 결과를 살펴볼 때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러한 왜곡을 바로잡는 일은 단순한 역사 논쟁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된 선택이 미화된 채 반복되는 것을 막고, 그로 인한 현재와 미래의 피해를 예방하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 – 역주
중공은 1950년 10월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진입시켜 다섯 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벌였으며, 비공식 자료를 통해 미군 39만여 명과 기타 유엔군 2만9000명, 한국군 66만 명을 궤멸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미국에 따르면 한반도에 투입한 미군 병력은 총 32만6000명으로 전투 사망자 3만3686명, 실종자 7586명, 비전투 사망자는 2830명이다. 전투 중 부상자는 10만3284명으로, 다수는 치료 후 복귀했다. 미군을 제외한 유엔군의 전사자는 3730명, 실종자는 379명으로 집계됐다.
중공군 피해자 집계도 양측에 차이가 있다. 중공은 전사자 11만4000명, 부상자 34만 명, 실종자 7600명이며 포로 7110명이 송환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0년에는 전사 18만3108명, 실종 2만5621명으로 수정했고, 2014년에는 전사자를 19만7653명으로 다시 상향 조정했다. 같은 시기 공개된 자료에는 치료 83만8417명, 중상자 38만3218명, 치유 후 복귀자 21만7149명이라는 수치도 포함됐다.
반면 미국은 중공군의 전사자를 40만 명 이상, 부상자를 48만6000명, 포로를 2만1839명으로 추산했다.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전사·실종 60만 명, 부상 71만6000명으로 집계했다.
이와 관련, 중공 해군 중좌(중령) 출신 야오청은 중공 군사학교가 발행한 공식 자료에서 전사 39만 명, 부상·실종자가 100만 명을 넘는다는 기록을 직접 확인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미군과 호각 승부? 병력·사상자 격차가 보여주는 한국전 실상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높다고 평가되는 미국 측 전투 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보병의 73%가 한반도에 투입됐으며, 34개 집단군 중 25개, 109개 보병사단 중 79개가 참전했다. 또한 공군의 52%, 전차부대의 55%, 포병사단의 67%, 철도공병부대는 전부가 한반도에 투입됐다.
중공이 순차적으로 투입한 병력은 200만 명을 넘었고, 최대 추산치는 약 297만 명에 달한다. 피해가 컸던 탓에 병력 보충이 이어졌으며, 한때 한반도 주둔 병력은 135만~145만 명에 달했다.
병력 규모는 미군을 훨씬 웃돌았지만 전투력에서는 열세였다는 평가다. 중공군는 최고 지휘부에서 일선 병사에 이르기까지 현대전 경험이 부족했고, 장비뿐 아니라 전술 역량에서도 미군과 큰 격차를 보이며 반복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중공은 결국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어 휴전 협상에 응했지만, 이를 ‘호각의 승부’로 주장하고 있다. 미국과 대등하게 싸웠다는 항미원조 선전은 사실상 체면을 살리기 위한 자기 미화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는다.
양측 투입 자원…중공은 ‘국가 총력전’ VS 미국은 ‘제한전’
미국은 이 전쟁에 약 300억 달러를 지출했다. 1950년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약 2540억 달러로, 전쟁 비용은 GDP의 11.68%에 해당한다. 3년 평균으로는 연간 약 3.89% 수준이다.
중공의 전쟁 비용은 100억 위안(약 33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며, 소련의 지원은 포함되지 않았다. 종전 당시 13억 달러의 전쟁 채무도 남겼다. 1950년 중국의 공업·농업 총생산은 574억 위안으로, 전쟁 비용은 18.33%에 해당한다. 채무를 포함하면 약 25.56%로, 3년 평균 연간 8.5% 이상을 차지했다.
1950~1953년 전쟁 비용 지출은 중공 정부 연간 예산의 34~43%를 차지했다. 중공은 사실상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전쟁을 치렀다는 평가다. 마오쩌둥은 미군의 원정 보급이 한계에 이를 것으로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중공군의 보급·후방이 최대 약점으로 드러났다. 한반도 주둔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베이징에 여러 차례 막대한 피해와 보급난을 보고하며 단기간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인정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제한전으로 규정했다. 한반도는 미국의 핵심 아시아 방어선에 포함되지 않았고, 전면전은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한반도 통일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은 결국 전략 기조를 어겼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미군과 유엔군은 38선을 사수했고, 전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기에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게 됐다.
중공은 휴전에 불만을 품고 전투를 이어가다 추가 손실을 입은 뒤에야 정전에 서명했다. 막대한 인명·재정 손실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은 없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북한의 남한 침공(남침) 부대, 핵심 전력은 중공군 출신 조선족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했을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와 한반도에 진입했고, 미군은 아직 태평양 전선에 있었다. 미·소는 급히 38선을 경계로 점령지를 나눴다. 유엔은 한반도 총선거를 추진했지만 소련과 북한 공산당은 이를 거부했다.
1948년 한국은 단독 선거로 정부를 수립했고, 북한에서는 공산 정권이 세워졌다. 미·소 군대는 이후 철수했다.
하지만 중공은 내전 과정에서 소련과 북한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물자와 인력을 확보했으며, 1949년 집권 후에는 김일성의 지속적 요구에 따라 중공군 소속이었던 5만~7만 명의 조선족 병력을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이들은 이후 북한의 남침 작전 핵심 전력이 됐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탱크 연대 사진. 날짜 및 장소 미상. | AFP via Getty Images
北, 소련제 전차 수백 대 보유…전쟁 전 남북한 군사력 비교
1950년 중반 북한군은 15만~20만 명 규모로, 보병 10개 사단과 전차·공군 사단을 갖췄다. 소련은 T-34 전차 274대와 항공기·포 등을 지원했다. 반면 한국군은 약 9만8000명으로 중화기가 없었고, 공군 전력도 미미했다.
북한과 중공은 한국이 먼저 침공했다고 주장했으나, 병력·장비 열세를 고려하면 설득력이 없다는 평가다. 1948년 이후 북한은 남한 내 무장 반란과 침투를 지속해 남한군의 역량을 분산시켰다.
1950년 봄 스탈린은 남침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고, 중공의 지원을 조건으로 김일성의 계획에 동의했다. 소련은 직접 참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일부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유엔 측은 대규모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중공 병력을 주력으로 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27일 서울이 함락됐고, 한국군 병력은 급감했다. 미국은 신속히 개입을 결정했고, 유엔군 지휘체계가 구축됐다.
미군 떠난 한반도, 소련·중공 힘입은 북한군의 기습
1950년 봄, 스탈린은 중공이 내전에서 승리했고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했으며,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남침의 여건이 성숙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했지만, 필요할 경우 중공이 증원 병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소련군은 미군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공개 참전을 하지 않기로 했다.
38선 인근에서는 간헐적인 교전이 이어졌고, 일부 한국과 미국 정보 당국은 북한의 대규모 공격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실제 침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50년 들어 북한군의 남하 집결 정보가 포착됐으나, 방어적 조치로 판단돼 전면 침공 가능성은 낮게 평가됐다. 유엔 감시단 역시 전쟁 임박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중공군 병력을 주력으로 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일부 한국군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전차를 앞세운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방어선은 붕괴됐다. 6월 27일 서울이 함락됐고, 불과 닷새 만에 한국군 병력은 약 2만2천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미국은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 진영의 침략을 저지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6월 27일 미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같은 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회원국의 군사 지원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7월 7일 유엔군 통합지휘체계가 출범했다.
1950년 8월 미국 의회는 한국전 군사작전에 12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승인했다. 이는 당시 미 국방예산에 육박하는 규모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830억 달러에 달하던 미 국방비는 1950년 137억 달러까지 줄었으나, 1953년 정전 당시에는 다시 528억 달러로 급증했다.
국방비 감축과 핵폭격기 중심 전략 탓에 미군의 재래식 전력은 즉각적인 대규모 투입이 어려웠다. 이로 인해 한국으로 충분한 병력을 이동시키는 동안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열세 속 한국군의 ‘춘천 대첩’…중공군 출신 주력 병력의 첫 패배
북한군은 서부 전선에서는 빠르게 진격해 서울을 점령했으나, 동부 전선에서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동부 전선을 맡은 북한 제2군은 보병사단 3개로 구성됐으며, 이 가운데 제7사단은 중공군 출신 조선족 병력 1만2천 명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은 춘천·홍천 일대에서 한국군 제6사단의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중화기가 없던 한국군 제6사단은 지휘와 전투 의지가 뛰어났고,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격전을 벌이며 북한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뒤 질서 있게 철수했다. 이 전투는 미군 증원을 위한 귀중한 시간을 벌어준 계기가 됐다.
이 전투는 ‘춘천 전투’ 또는 ‘춘천 대첩’으로 불린다. 북한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중공이 병력을 제공한 제7사단은 이후 제12사단으로 개편됐으나 홍천 공격에서도 실패해 사단장이 교체됐다. 이후 부산 방향 공세에서도 다시 큰 피해를 입어 다른 부대에 흡수됐다.
중공은 침략의 실상을 인정할 수 없었고, 제공한 주력 부대가 전쟁 초반 한국군에 패배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도 두려워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소련 보고서에는 북한군 내부의 지휘·통제 문제가 지적돼 있다. 총참모부가 실질적인 전투 지휘를 하지 못했고, 지휘부의 전투 경험 부족으로 하급 지휘관들이 명령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전차와 포병 운용 전술도 비합리적이었다는 것이다.
북한군은 초기 승리를 확신하며 이러한 문제를 덮은 채 공격을 계속했다. 중공군 출신 병력들은 중국 내전 경험은 있었지만 현대전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고, 그 이후의 전개는 이미 예고돼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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