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제2차 여성운동은 어떻게 미국을 병들게 했는가?
Evgeny Atamanenko/Shutterstock 어쩌면 내 인생에는 다른 길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내가 바로 그 길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성공한 레스토랑 사업가였고,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었으며, 누구나 ‘성취’라고 부를 만한 단정하고 깔끔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잘 길들여진 반려동물 몇 마리, 골프장 안의 아름다운 집, 그리고 잘 돌아가는 사업을 가진 싱글 여성으로서의 삶을 그대로 이어갈 수도 있었다. 의무도, 방해도, 셔츠를 잡아당기는 끈적한 어린 손도 없는 삶, 사회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박수를 치며 ‘자유’라고 불렀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 나는 매일 수천 명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좋은 재료와 전통적인 요리 방식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영양을 준다’는 것의 더 깊은 의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단순히 몸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요리하고 먹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세대적 정체성을 만드는 그 일 말이다.
지금 내 삶은 그때와 완전히 다르다. 나는 네 아이와 농장을 가지고 있고, 우리 삶에는 조용함도, 완벽한 통제도 없다. 바로 어제, 열 살 난 아이가 내 옆에서 블루베리와 블랙베리로 잼을 만들었고, 우리는 직접 만든 바비큐 소스를 병에 담았다.
어린아이들은 맨발로 우리 주변을 뛰어다니며, 제비처럼 부엌을 들락거리며 웃음, 질문, 그리고 빵부스러기의 흔적을 남겼다. 혼란스럽고, 불완전하고, 느린 하루였다. 그런데 그 소란 한가운데에서 나는 아주 오래된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맞다’고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시간들은 원래는 아주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가 되어버렸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내 안에서는 뭔가가 계속 요동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불편해서 애써 피하려는 질문도 떠올랐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가족을 먹이고 돌보는 일이 왜 선택 사항이 되어 버렸을까? 왜 불편한 일, 심지어는 짐처럼 여겨지는 일이 되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능력들이 어째서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을까?
과거를 돌아볼수록, 사람들은 말하기 꺼려하지만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다다른다. 제2차 여성운동 시대에 여성들이 가정을 떠난 것이 미국의 건강 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건강 문제뿐 아니라 이 글에서 다 풀어내지 못할 수많은 사회적 문제의 뿌리이기도 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하고 싶다. 제1차 여성운동은 반드시 필요했다. 투표권, 재산권, 법적 보호, 그리고 삶의 선택권은 너무나 필수적이었다. 그것은 정의였다.
하지만 제2차 여성운동은 달랐다. 단순히 기회의 평등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여성다움’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짜 맞췄다.
여성들은 ‘어머니가 되는 것은 선택일 뿐’이라는 말, ‘집을 돌보는 일은 억압’이라는 말, 그리고 ‘가족을 먹이고 보살피는 일은 잠재력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가치가 있는 곳은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이라는 메시지가 공공연하게 퍼졌다.
그리고 나와 같은 세대의 모든 여자아이들은,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약속이 있었다. ”너는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어.”
나는 자주 말하곤 한다. 현대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작은 거짓말’들이 참 많다고. 그런데 이 거짓말은 작은 게 아니다. 아주 큰 거짓말이다.
우리는 이 말(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다는 말)을 스스로에게만 되뇌는 게 아니라, 다른 여성들에게도 강요한다. 지친 삶을 ‘성취’라 부르고, 버거움과 혼란을 ‘균형’이라고 포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대가는 없는 척한다.
사실 진짜 문제는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여성들”만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결과는 사회 전체로 퍼져버렸다.
우리는 정서적으로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충분히 돌봄받지 못하고,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상태다. 말 그대로, 감정도 몸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돌보지 못하는 사회가 돼버렸다.
한 세대가 제대로 된 음식도, 가족의 리듬도, 가족이 함께 요리하고 식사하던 문화적·생물학적 기억도 없이 자라고 있다.
여성들에게 “가치 있는 일은 집 밖에 있다”는 메시지가 퍼지던 바로 그 시기에, 식품 기업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시 배급 식량을 생산하던 거대한 제조 인프라는 이미 갖춰져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기업들은 그 물량을 소화해 낼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하는 여성’들이라는 완벽한 해답을 찾아냈다.
간편식은 ‘자유’로 포장됐다. 분유는 ‘과학’으로 선전됐다. 냉동식품은 ‘진보의 상징’으로 불렸다. 요리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필요 없고, 심지어 ‘진지하게 대접받고 싶은 여성’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처럼 여겨졌다.
어떤 회의실에서 누군가 이런 심리를 계산해냈던 거다. 여성들에게 “가족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잠재력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믿게 만들 수만 있다면, 가공식품이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될 거라는 계산 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두 세대가 지난 지점에서 그 결과를 마주하고 있다. 어린이 만성질환은 이제 흔한 일이 됐고,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람들은 간단한 식사조차 만들 줄 모른다. 아이들은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업에 의존해 먹고 사는 삶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의존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잃은 것은 단지 영양이 아니다. 관계, 예의, 리듬, 그리고 정체성을 잃었다.
나는 이것을 완벽한 삶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집 밥상도 집 부엌이 아니라 동네 농가 식당에서 해결되는 날이 훨씬 많다. 가족이 모두 같은 시간에 앉아서 식사하는 일도 드물다. 나 자신도 내 안에 자리 잡은 ‘현대적 습관’을 천천히 벗겨내는 중이다.
하지만 그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도, 나는 해결책이 ‘역사를 되돌리는 것’이 아님을 안다. 해결책은 잃어버린 것을 인정하고, 중요한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작은 행동이라도 의미가 있다.
무언가를 키워보라.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보라. 아이들에게 냄비를 저어보게 하라. 설령 그 과정이 더 오래 걸리고 어질러지더라도 말이다. 공장에서 나온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음식을 선택해 보라. 그리고 가끔이라도 모두 함께 앉아 식사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먹이고 돌보는 일은 결코 사소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가족, 문화, 사회의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였다.
어쩌면 오늘날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집안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가진 의미를 되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몰리 엥겔하트(Mollie Engelhart)는 ‘소브린티 랜치’에서 재생 농업과 목축을 실천하는 농장주로, 식량 주권, 토양 회복, 그리고 자급자족·홈스테딩 교육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Debunked by Nature: 당신이 음식, 농업, 그리고 자유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뒤집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비건 셰프이자 LA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그녀가 손으로 흙을 만지는 ‘진짜 농부’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솔직하고 강렬한 기록으로, 자연이 어떻게 그녀의 문화적 고정관념을 산산이 부숴버렸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기호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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