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사회주의의 약속은 왜 늘 파국으로 끝나는가
뉴욕시장 당선 후 기뻐하는 조란 맘다니 | AFP/연합 남아공·베네수엘라·쿠바·뉴욕이 던지는 경고
20세기 이후 수많은 나라가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외쳤다. 그러나 역사는 냉정했다. 사회주의 실험이 시작된 곳마다 풍요는 사라졌고 자유는 억압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력난, 베네수엘라의 기근, 쿠바의 암울한 침묵, 그리고 최근 뉴욕의 선거 결과까지, 시대와 대륙은 달라도 그 끝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다 ‘공정’의 이름 아래 번영이 무너지고, ‘보호’의 약속 속에 자유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아공의 몰락, 이상이 현실을 짓눌렀다
한때 ‘희망의 무지개 나라’로 불렸던 남아공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프리카 대륙의 유일한 산업국이었다. 요하네스버그의 야경은 ‘아프리카의 뉴욕’이라 불릴 만큼 화려했고, 국영 전력회사 에스콤(Eskom)은 남부 아프리카 15개국에 전력을 수출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1994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집권하면서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내세운 대전환이 시작됐다. 정부는 과거의 인종차별을 보상한다며 흑인경제권한강화(BEE) 정책을 강제했다. 기업은 인종 할당제를 따라야 했고, 공공기관의 인사는 충성심이 기준이 됐다.
그 결과는 혹독했다. 전력망은 낡았고 정전은 일상이 됐다. 숙련된 기술자와 관리자들이 떠나면서 산업 기반은 붕괴했다. 실업률은 30%를 넘어섰고, 범죄율은 세계 최악 수준이다. ‘공정’을 내세운 정책이 오히려 모두를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자조가 사회 전반에 퍼지고 있다.
남아공에서는 “정의의 이름으로 효율을 죽였다”는 비난은 더 이상 우파의 주장이 아니다. 많은 노동자들조차 “이 나라의 문제는 부족한 정의가 아니라 사라진 책임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복지의 낙원이 무너진 날
1998년, 우고 차베스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군 출신의 카리스마로 무장한 ‘국민의 구세주’였다. “국가가 국민을 먹여 살린다”는 사회주의 구호가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됐다.
차베스는 석유회사 PDVSA를 국유화하고 대기업을 몰수했다. 기름값과 식료품 가격을 통제하며 ‘무료 복지’를 약속했다. 초기에는 국민들의 환호가 이어졌지만, 시장은 조용히 죽어갔고 생산은 멈췄으며 투자는 사라졌다. 오직 석유 수입만이 남았지만 유가가 폭락하자 국가는 한순간에 붕괴했다.
후계자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 들어서는 상황이 더욱 비참해졌다. 인플레이션은 수백만 퍼센트에 달했고, 지폐는 휴지보다 싸졌다. 병원은 정전으로 멈췄고, 슈퍼마켓 선반은 텅 비었다. 중산층은 국외로 탈출했고, 남은 이들은 빵 한 덩이를 위해 몇 시간을 줄서야 했다.
차베스가 약속했던 ‘국가의 보호’는 결국 국민을 의존적 존재로 만든 덫이었다. 시장의 기능이 사라진 뒤 정부가 국민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배급표와 선전뿐이었다.
쿠바, 혁명의 섬이 남긴 황폐한 현실
카리브해의 섬 쿠바는 한때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그러나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권력을 잡은 뒤, 그 낙원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감옥으로 변했다. 그는 처음에는 민족주의 + 사회개혁의 형태로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했으나, 토지를 몰수하고 사유재산을 폐지했으며, 공산주의 체제로 치달았다. ‘노동자의 천국’을 꿈꿨지만, 현실은 ‘국가의 천국’이었다.
생산은 급격히 줄었고 공장은 멈췄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요의 흔적은 빠르게 사라졌으며, 소련의 원조가 끊기자 쿠바 경제는 사실상 붕괴했다. 1990년대 ‘특별시기(Periodo Especial)’라 불리던 시절, 국민들은 자전거로 출근하고 비누를 나눠 써야 했다. 의사와 교수조차 생계를 위해 거리에서 관광객에게 담배를 팔 정도였다.
오늘의 쿠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젊은이들은 바다를 건너 미국 마이애미로 불법 이민을 시도하고 있다. 정부는 여전히 ‘사회주의의 승리’를 외치지만, 그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자유시장과 개인의 기회를 보장하는 나라들이다. 혁명은 오래전에 끝났고, 남은 것은 ‘배고픈 침묵’뿐이다.
뉴욕의 경고, 낡고 실패한 약속의 귀환
이제 사회주의의 그림자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심장부로 스며들고 있다. 이번에 뉴욕 시장에 당선된 34세 조란 맘다니는 자신을 “민주사회주의자”라 부른다. 부유층 증세, 임대료 동결, 무상 교통, 보편적 보육 등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공약이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문장들이다. ‘토지를 인민에게’, ‘공장을 노동자에게’, 지난 세기의 수많은 독재가 바로 이런 말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뉴욕은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세계 금융의 수도다. 그런 도시에서 사회주의자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지역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 대가로 평등을 택하려는 유혹이 미국 사회의 심장부를 흔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뉴욕에서는 범죄 문제뿐 아니라 ‘제도적 약탈’이 일어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시 당국이 ‘공정한 분배’를 내세워 세금을 인상하고, 성공한 이들을 향한 비난 분위기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성실하게 일한 대가가 오히려 죄가 되는 사회”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공산체제에서 국가는 폭력으로 재산을 빼앗았다면, 오늘의 서구 사회주의는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같은 일을 한다. 부자는 ‘착취자’로, 가난한 사람은 ‘희생자’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근면과 책임은 가볍게 여겨지고, 능력 있는 사람조차 마치 잘못을 저지른 듯 평가받기도 한다.
국가 보호의 유혹과 자유의 상실
젊은 세대가 사회주의 구호에 끌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무료’, ‘평등’, ‘보편적 복지’라는 말이 따뜻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대가 없는 선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할 때, 시민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자유를 내어줘야 한다.
공짜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대가는 자립심의 상실이다. 한 사회가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스스로 만드는 것’을 잊게 된다. 노력 대신 보조금을, 경쟁 대신 평균화를 택하면 공동체는 활력을 잃는다. 결국 평등의 이름으로 모두가 같은 가난 속에 묶이게 된다.
20세기는 이 단순한 진리를 증명하는 시대였다. 소련은 ‘만인의 평등’을 외치며 수천만 명을 굶겨 죽였고, 중국은 ‘공동 번영’ 아래 국민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역시 수천만 명을 굶어 죽게 했다. 오늘의 중국 본토에서 벌어지는 언론 통제와 인권 탄압 역시 모두 ‘국민을 위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자유가 사라진 사회에서 개인은 곧 국가의 부속품이 된다. 중국에서 밤사이 연예인, 작가, 기업인이 이유도 모른 채 사라지는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뉴욕은 지금 그 기로에 서 있다. 자유시장과 창의의 상징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공정’의 미명 아래 또 하나의 실험실로 전락할 것인가이다.
오늘날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는 복지와 세금을 통해 크고 작은 형태의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완전히 자유시장만을 고수하는 나라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며, 각국은 다만 그 강도와 균형의 정도를 조절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국가의 개입이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그 현실에 익숙해졌다. 세금의 확대나 복지의 팽창을 더 이상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익숙함 속에서 인류는 자신도 모르게 사회주의의 굴레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경찬 논설위원은 정치 PR 전문가로, 한국커뮤니케이션에서 정치 홍보를 담당하며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쌓았습니다. 이후 정치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정책과 정치 현장을 깊이 이해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에포크타임스 기자로 오랜 기간 활동하며 언론의 최전선을 경험했습니다. 현재는 미디어파이 대표로서, 정무·언론·홍보 전반에 걸친 통합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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