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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한국 외교의 분열, ‘자주와 동맹’의 낡은 프레임이 다시 고개 들다

2025년 10월 07일 오후 3:51
이재명 대통령이 제44차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이재명 대통령이 제44차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한국 외교가 다시 ‘자주냐 동맹이냐’라는 해묵은 갈등에 휘말린 모양새다. 지난달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여당 싱크탱크 세미나에서 “한국에는 동맹파가 너무 많다”며 “자주를 외치면 금세 색안경을 씌우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한다”고 현 정부의 외교 인사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권의 훈수가 아니라,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잠재돼 있던 노선 갈등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 대통령이 내세웠던 ‘실용주의 외교’가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정부 내부에서도 대미 외교 노선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감지되며, 외교 정책이 혼돈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단순한 정책 선택의 차원을 넘어, 한국이 지향해야 할 국가 정체성과 가치관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보다 본질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시각도 제시된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자주와 동맹 갈등

‘자주 대 동맹’ 갈등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노무현 정부 초기에 등장한 ‘자주 외교’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21세기 한국 외교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대미 종속에서 벗어난 ‘대등한 한미관계’를 제시했다. 이는 냉전의 유산을 극복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려는 진보 진영의 주장이 응집된 결과였다.

당시 청와대 핵심 참모들은 대북 포용과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조하며 ‘자주파’의 논리를 폈지만, 외교·안보 부처 다수는 굳건한 한미동맹이야말로 안보와 경제 번영의 토대라며 반박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외교부, 국방부, 통일부 간에 정책 조율을 넘어선 노선 투쟁이 빈발했다.

당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과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 등은 한미동맹을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보고 북한을 협상의 대상으로 다루며 미국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라는 자주 조치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라는 동맹 강화 조치를 동시에 추진하며 실용을 모색했다.

그럼에도 ‘자주’와 ‘동맹’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남겨진 상흔은 지금까지도 민주당 DNA 속에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자주’와 ‘동맹’ 노선의 충돌이 여러 번 있었다. 2017~2018년 사드(THAAD) 추가 배치를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당시 청와대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추가 사드 배치 불가 ▲미국 미사일방어(MD) 체계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 등 이른바 ‘3불(不) 정책’을 공식화했다.

반면 국방부와 외교안보 라인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려면 사드 운용과 한미 미사일방어 협력이 필수적이라며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청와대의 대중(對中) 유화 기조와 안보 부처의 동맹 중시 노선이 충돌하며 정책 갈등이 표면화됐다.

정세현 전 장관 발언과 자주파 부활

자주파의 원로로 평가받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현 외교가 미국·일본 중심으로 지나치게 기울었다며 ‘동맹파의 폐해’를 지적했다. 그의 발언은 과거 학생운동 시절부터 민족 자주와 반미 성향을 강조해온 진보 진영 인사들에게 명분을 제공했다.

이재명 정부 외교 당국자들이 이를 공개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당내 일부 핵심 인사들이 이러한 자주 성향과 궤를 같이해온 만큼 민주당의 기조가 ‘자주’ 프레임에 갇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자주파의 논리는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국익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한국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급변하는 국제 질서를 외면한 채 과거식 반미 담론에 기대는 낭만이자 위험한 선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현실에서 동맹과 거리를 두면 대국민 홍보용 구호는 얻을지 몰라도, 중국의 경제 압박과 북한의 군사 위협 앞에 고립무원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 상황에서 ‘자주 노선’은 더 큰 위험을 안길 수 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동맹 재조정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동맹 무용론’이나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우면 미국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동맹국”이라는 불신을 초래해 국익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외교는 국익을 위한 전략적 연대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동맹 강화는 정파적 선택이 아니라 국가 생존 전략이다.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로서 미국이라는 동맹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security umbrella)’ 아래에서 경제 성장과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왔다. 한미일 안보 협력은 북한의 핵 위협과 역내 불안정에 대응할 유일한 현실적 해법이다.

자주파는 동맹을 ‘종속’으로 규정하지만, 외교는 국익을 위한 전략적 연대다. 한미동맹은 단순한 군사 협력을 넘어 자유·민주·인권·법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이 자유민주주의의 대오이며, 이를 이탈할 경우 얻는 ‘자주’는 외로운 고립일 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 북·중·러의 군사 협력 심화는 ‘동맹 없는 자주’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 산업 경쟁에서도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시장과 안보 모두를 지키기 어렵다. 이처럼 안보와 경제가 맞물린 복합 위기 시대일수록 한국은 가치와 이해를 공유하는 동맹 안에서 힘을 발휘해야 한다.

APEC 앞두고 일관된 외교 노선 내세워야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은 자주·동맹 갈등을 정리하고 일관된 외교 노선을 천명해야 한다. 회의장에서의 메시지는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한국의 신뢰도를 가늠할 시험대다. 낭만적 구호가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과 보편 가치에 입각한 강력한 동맹 외교만이 한국을 혼돈에서 구하고 미래 번영을 담보할 수 있다.

동시에 정부는 장기 전략도 세워야 한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 구도와 경제 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한국이 중견국으로서 주도성을 발휘하려면, 동맹과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다자 협력과 가치 외교를 확장해야 한다. 내부 분열을 외부에 노출하는 것은 국가적 자해이며 국민에게도 불안과 손실만 초래할 뿐이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과거 정치권의 ‘자주-동맹’ 프레임에 갇혀 혼란을 되풀이할 여유가 없다.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굳건한 동맹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유일한 전략이다.

*이경찬 논설위원은 정치 PR 전문가로, 한국커뮤니케이션에서 정치 홍보를 담당하며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후 에포크타임스에서 기자로 오랜 기간 활동하며 언론 현장을 깊이 경험했고, 현재는 미디어파이 대표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