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中共의 제2차 세계대전·기념행사에 대한 ‘왜곡 거부’ 촉구

대만은 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는 올해 기념일(8월 15일)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주체가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중화민국 정부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CCP)이란 허위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며 중국 공산 정권을 규탄했다.
올해 8월 15일은 1945년 일본의 항복 발표로 아시아 전역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80주년이 되는 날로, ‘대일(對日) 승전 기념일(V-J Day)’로도 불린다.
대만은 공식 국호로 자국민 여권에 표기된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ROC)’을 사용하고 있으며, 1911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대륙을 통치했던 공화정의 마지막 영토다.
1949년 중국 대륙에서 중국 공산당에 패한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장제스(蔣介石)의 지도 아래 대만 섬으로 퇴각했다. 대만은 1945년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중국에 반환된 지역이었다. 이후 중화민국은 대만의 공식 국호로 유지돼 왔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1949년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PRC)을 수립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 한 번도 대만을 통치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무력에 의한 대만 병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공산 정권이 베이징에서 “항일전쟁 승리는 공산당이 이끌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군사 퍼레이드 등 기념행사를 개최하자 타이베이의 대중 정책 최고 책임자는 국민들에게 “중국 공산당의 역사 왜곡과 대만을 겨냥한 위협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대만 대륙위원회 주임인 추추이청(邱垂正) 장관은 8월 15일 사무실에서 공개한 영상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화인민공화국(PRC)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추 장관은 “중국 공산 정권은 최근 수년간 사실을 반복적으로 왜곡하며, 항일전쟁이 공산당이 주도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며 “심지어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는 허구까지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는 대만 국민들에게 퍼레이드와 같은 중국 공산당의 전쟁 기념행사에 참여하지 말고 “똘똘 뭉쳐 국가의 주권과 존엄을 공동으로 수호하며 대만이 주도하는 행사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대만(중화민국·ROC) 라이칭더(賴清德) 총통은 8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성명에서 중공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은 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은 단결이 승리를 가져오고, 침략은 패배를 부른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라이칭더 총통은 권위주의가 다시 세를 넓히고 있는 지금, 자유와 민주주의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일전쟁은 공산당이 아닌 중화민국이 주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화민국은 미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었으며, 공산군이 아니라 국민당 군대가 일본에 맞서는 핵심 전력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에포크타임스 칼럼니스트 리젠(李健)은 8월 14일 중국어판 기고문에서 수치와 사실을 바탕으로 항일전쟁의 주요 전투를 분석했다. 그는 “8년에 걸친 전쟁 기간 동안 중·일 간에는 22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있었으며 각각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됐다. 공산군이 참여한 것은 핑싱관 전투와 백단대전 두 차례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국민당 군대가 단독으로 싸운 전투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장제스가 이끈 중화민국 국민당군은 결정적인 전투에서 주력군이자 항일전쟁의 핵심이었다”고 썼다.

1940년 일본이 점령한 중국 및 주변 국가의 영토가 지도에서 주황색과 분홍색으로 표시돼 있다. ⎟ Public domain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1934~1935년)은 실제로는 중화민국 정부의 토벌을 피해 중국 남동부 장시성 내륙 근거지에서 서북부로 도망친 과정이었다. 중공은 이 과정 끝에 산시성 북부 산베이 지역 옌안에 새로운 근거지를 세웠다. 이곳은 일본이 점령했던 중국 동북·동부·남부 지역, 즉 제2차 세계대전(1937~1945년) 동안 중국과 아시아에서 주요 전투가 벌어진 지역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국민당군이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동안 공산군은 대부분 중국 북부 옌안에 머물렀다.
미국 역사학자 제이 테일러는 2008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 ‘총통: 장제스와 현대 중국을 위한 투쟁(The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Struggle for Modern China)’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장제스가 이끈 국민당군과 미군 간 연합 작전을 상세히 기록했다. 여기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활약한 미 공군 의용대, 즉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의 활동도 포함돼 있다.
영국 역사학자 라나 미터가 2013년 발간된 저서 ‘잊혀진 동맹: 1937~1945년 중국의 일본 전쟁(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이 일본과 벌인 주요 전투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8년 동안 국민당군이 수행했다. 이 책은 또한 중국 국민당군이 버마(오늘날 미얀마) 정글에서 영국군, 미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며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막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1942년경 중국의 어느 비행장에서 중국 병사가 ‘플라잉 타이거스’의 상징인 상어 얼굴 문양이 그려진 미국 P-40 전투기들을 경계하고 있다. ⎟ Public Domain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 이후 연안에 도착했을 때 그 군대는 겨우 6000명이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했을 때 중국 공산당의 정규군은 9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여기에 200만 명의 민병대가 추가됐다고 에포크타임스가 발행한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Nine Commentaries on the Communist Party, 9평)’은 전했다.
‘9평’은 “전쟁 동안 중국 공산당은 일본에 저항하는 시늉만 했을 뿐 실제로는 전선에서 떨어진 지역의 지방군과 게릴라 부대만 보유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곤 “북부 지방을 행군하면서 ‘일본과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며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1945년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자 중국 내전이 발발하기 시작했다.
미국 조지아주 상원의원 조 맥카시는 ‘미국의 자유로부터의 철수(America’s Retreat From Liberty)’에서 “장제스는 미국에서 훈련받은 39개 사단을 보유했고, 장비도 갖추었으며, 군사들의 사기도 높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육군 참모총장이던 조지 마샬이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미 특별대표로 중국에 파견돼 국민당 군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공산당과의 통합 정부 수립을 강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고 맥카시는 지적했다.
맥카시는 마샬의 행동에 대해 “마샬은 자신의 행동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했다. ‘참모총장으로서 나는 39개 반공 사단에 무장을 제공했다. 이제 한 번의 서명으로 그들을 무장 해제한다’”라고 전했다.
또한 맥카시는 “마샬이 장제스로 향하는 무기 공급은 차단하면서도 연안의 공산당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지원은 막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국민당이 대일 항쟁을 한 것과는 달리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 여러 차례 감사의 뜻을 표한 바 있다. 이는 중국 공산당 공식 문서에 기록돼 국제 역사학자와 언론에 널리 인용됐다.
예를 들어 1972년 마오쩌둥은 난징에서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와 만나 전쟁 중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마오쩌뚱의 당시 발언이다.
“(일본은) 사과할 필요가 없다. 당신들은 중국에 기여했다. 왜냐하면 제국 일본이 침략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우리 공산당이 어떻게 막강해질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장제스를 어떻게 무찌를 수 있었겠는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 보답하겠는가? 아니다, 우리는 일본의 전쟁 배상금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 정치가이자 국민당 장군 장제스(蔣介石, 1887–1975년). 1928~1931년, 1943~1949년 두 차례 중국 주석을 지냈다. 사진은 1943년경 촬영된 모습. ⎟ Keystone/Getty Images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신호니안(辛昊年)은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중국의 항일전쟁 관련 포럼 연설에서 “중국 공산당은 일본과 싸운 적이 없으며, 싸운 것처럼 거짓 주장했고, 심지어 적과 협력하며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항일전쟁에서 일관되게 싸우며 저항 전쟁을 이끈 국민당을 ‘일본과 싸우지 않은 당’이라고 지속적으로 비방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국가 전체를 이끌고 일본과 싸워 최종 승리를 이끈 영웅’으로 묘사해 왔다”고 신호니안은 지적했다.
신호니안은 공산당의 목적이 지속적인 기만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공산당은 대만을 통치한 적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 점령됐던 대만은 카이로 선언(1943년)과 포츠담 선언(1945년)에 따라 중화민국(ROC)으로 반환됐다. 당시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는 영국과 미국 지도자들과 함께 서명을 한 당사자 중 한 명이었다. ROC는 1945년 10월 25일 공식적으로 반환을 수락했다.
1949년 국민당 군대가 중국 본토에서 공산당에 패배하자 ROC 정부는 대만으로 후퇴했으며 공산당은 본토에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대만 총통 라이칭더(賴清德)가 2025년 3월 21일 타이베이 쑹산 공군기지를 방문해 ‘신속 대응 훈련’에 참가한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 I-Hwa Cheng/AFP via Getty Images
대만 총통 라이칭더는 2024년 취임 연설에서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과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은 서로 종속되지 않는다”고 명확히 밝혔다.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의 주권 주장을 부정한 라이칭더 총통을 ‘분리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라이칭더 총통은 올해 초 대만에서 여러 차례 공개 연설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이나 중화민국이 관할하는 주변 섬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주권을 행사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우리 나라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 (그것이) 중화민국이든, 중화민국 대만이든, 혹은 대만이든 — 우리는 독립된 국가다”라고 말했다.
*이정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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