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美 지원 교통망, 南캅카스 판도 바꾼다…“中 일대일로 뒤엎는 전략”

2025년 08월 11일 오후 9:36
도널드 트럼프(가운데) 미국 대통령과 일함 알리예프(왼쪽)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니콜 파쉬냔(오른쪽) 아르메니아 총리가 2025년 8월 8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합의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Andrew Harnik/Getty Images도널드 트럼프(가운데) 미국 대통령과 일함 알리예프(왼쪽)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니콜 파쉬냔(오른쪽) 아르메니아 총리가 2025년 8월 8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합의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Andrew Harnik/Getty Images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8월 8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지원을 받아 수십 년간 이어진 양국 간 갈등을 종식하기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하고 역내 교역로 개설에 합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날 백악관에서 서명식을 주재한 가운데 니콜 파쉬냔 아르메니아 총리와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은 미국이 개발한 역내 교통 회랑 구축을 위한 두 번째 합의문에도 서명했다.

‘국제 평화와 번영을 위한 트럼프 노선(Trump Route for International Peace and Prosperity·TRIPP)’으로 명명될 이 육상 회랑은 아제르바이잔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나히체반 자치공화국과 본토를 연결한다. 나히체반은 아르메니아에 의해 본토와 분리돼 있으며 터키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지정학 분석가 아나 마리아 에반스는 이번에 계획된 루트가 “이 지역과 그 너머에서 중대한 지정학적·경제적·안보적 변화를 이끌어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포르투갈 가톨릭대학 교수인 에반스는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효율적인 무역로는 두 나라 모두를 글로벌 공급망의 ‘앞좌석에 앉게 할(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외교정책위원회 산하 중앙아시아-캅카스연구소 선임연구원 마무카 체레텔리는 TRIPP가 “남캅카스를 거쳐 대(大)중앙아시아와 유럽, 지중해 간 자유롭고 개방적인 연결을 위한 장기적 기회를 창출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명식에서 기자들에게 이번에 계획된 회랑을 “아제르바이잔이 나히체반 영토에 완전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아르메니아의 주권을 온전히 존중하는 특별 교통 구역”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르메니아는 이 회랑 개발을 위해 미국과 배타적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 파트너십은 최대 99년간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기업들이 대규모 인프라 개발을 맡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들 기업은 두 나라에 진출하기를 매우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합의문 서명 직전 백악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TRIPP의 인프라 건설과 운영 관리는 컨소시엄이 맡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체레텔리 연구원은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회랑 합의가 하나의 ‘틀’에 불과하므로 “아직 조율해야 할 세부 사항이 많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번 교통 회랑 계획에서 미국이 맡은 역할을 “장기적으로 미국의 지역 내 존재감을 확립할 지정학적 돌파구”라고 평가했다.

무역 촉진

아르메니아를 거쳐 아제르바이잔을 나히체반 자치공화국과 연결하는 육상 회랑 구상은 지난 5년 동안 간헐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 아이디어는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 전쟁 이후 처음 제안됐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분쟁 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탈환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터키는 이 회랑을 ‘잔게주르 회랑’이라 불러왔다.

2020년 10월 23일 아제르바이잔 테르테르시(市) 인근 분쟁 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 상공에서 전투 중 비행하는 아제르바이잔 군 헬기. ⎟ Umit Bektas/Reuters

나히체반과 짧지만 중요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는 이번 계획된 경로를 통해 오랜 동맹국인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어지는 육상 교두보를 마련하고 이를 넘어 카스피해까지 영향력을 동쪽으로 확장하는 수단으로 보고 있다.

체레텔리 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이 지원하는 이번 통과 계획은 역사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그리고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 무역·통과에 인위적인 장벽을 제거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어 “(이 경로는) 카스피해에서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아르메니아로, 나히체반을 통과한 뒤 터키로 이어지는 노선 또는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구 그루지야)를 거쳐 터키나 조지아의 흑해 항구로 이어지는 등 여러 운송 경로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체레텔리 연구원은 또 TRIPP는 “가장 비용 효율적인 방식으로 나히체반 자치령에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경제 발전을 촉진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터키)는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남캅카스 지역의 무역과 경제발전의 더 큰 자석 역할을 하게 돼 아르메니아의 성장 전망까지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체레텔리 연구원은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르메니아는 자국 영토 내 미국의 상업적 존재를 통해 영토 보전에 대한 안보 보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에반스 교수 역시 계획 중인 이 회랑이 수십 년간의 상호 적대 관계 끝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 ‘경제 통합을 촉진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TRIPP의 더 넓은 지역적 파급 효과에 대해 에반스 교수는 “간소화된 규제와 세관 절차를 갖춘 안정적인 환승 운영은 중간 회랑(Middle Corridor)의 운송 능력을 높여 중국과 유럽 간 통과 시간과 비용을 줄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간 회랑’으로 더 잘 알려진 ‘트랜스-카스피 국제 운송로’는 중국 롄윈강에서 동유럽까지 이어지는 복합 운송 동서 회랑이다.

이번 조약으로 새로 조성된 길이 약 3000마일(약 4828km)에 달하는 중간 회랑은 카자흐스탄과 카스피해를 거쳐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터키를 지나 남캅카스 지역을 통과한다.

중국 정부는 중간 회랑을 중앙아시아와 남캅카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동서 무역 연결성을 강화하려는 자국의 광범위한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의 일부로 보고 있다.

‘적수(敵手)를 우회하다’

백악관에 따르면 TRIPP는 러시아, 이란, 중국을 통과하지 않고도 남캅카스 지역과 중앙아시아를 통해 물자가 이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여기서 패자는 중국, 러시아, 이란이다.” 한 백악관 고위 관리는 협정 서명 전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승자는 서방이다. 이 회랑이 미국 기업과 유럽 전역의 에너지 자원에 가져올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에번스 교수는 중국, 러시아, 이란이 “동서 공급망의 핵심 거점이 될 예정인 계획된 회랑에서 미국이 존재감과 임대권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미국의 회랑 내 교통 인프라 투자는 공급망 다변화에 기여해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줄일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조지아 흑해 연안의 아낙클리아 항만(중간 회랑의 일부)에 대한 자국 투자에서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낮은 무역 점유율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에번스 교수는 TRIPP 계획을 “‘일대일로를 통한 운송·물류 지배’란 중국의 무역·외교 전략을 뒤집는, 뜻밖이면서도 환영할 만한 반전”이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이 운송 경로에 대한) 미국의 투자는 글로벌 공급 물류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할 혁신적인 외교정책 조치”라고 말했다.

에번스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운영이 시작되면 이 새로운 경로는 제재 대상인 북부 회랑(Northern Corridor)을 통한 운송량을 더욱 줄이고 미국의 존재감을 이란 코앞까지 확대할 것”이라고 했다.

중국과 유럽을 잇는 또 다른 운송 경로인 북부 회랑은 러시아와 인접국 벨라루스를 거쳐 연결된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침공을 개시한 이후 서방은 북부 회랑을 통한 교역을 억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수많은 제재를 부과해 왔다.

이번 회랑 신설 계획이 실현될 경우 TRIPP는 이란 국경 바로 북쪽의 아르메니아 남부를 관통하게 되며, 이는 러시아와 이란을 잇는 남북 무역 경로를 위협할 가능성도 있다.

지난 7월 27일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고문 알리 아크바르 벨라야티는 미국이 개발한 이 운송 경로가 이란의 남캅카스 지역 연결을 차단하고 “이란과 러시아에 대해 이 지역 남부에서 육상 봉쇄를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체레텔리 연구원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란은 이념적·지정학적 선택으로 인해 약화됐지만 앞으로도 이 지역에서 하나의 행위자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란–러시아 무역은) 주로 카스피해를 통한 기존 회랑과, 아제르바이잔을 경유하는 국제 북남 운송 회랑(International North–South Transport Corridor)에 의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직 개발 중인 ‘국제 북남 운송 회랑’은 또 하나의 다중 모드 무역 경로로, 완공되면 북유럽과 러시아 북부를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인도양의 해양 항구들과 연결하게 된다.

8월 9일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 화해는 “당사국과 인접국의 우선순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이 인용한 발언에서 “역외 국가들의 개입은 평화 의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하며 추가적인 어려움과 분열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정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