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칼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영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쟁

폴 맥도날드
2025년 06월 28일 오후 3:53

엘리야 시대의 영적 결전 그리고 현대사의 이념 투쟁
공산주의, 신(神) 없는 유토피아의 허상…무자비한 탄압
개인의 자율성에 기초…‘위대한 풍요’ 이끈 자본주의

구약성서 ‘열왕기上’에는 선지자 엘리야가 북이스라엘의 갈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맞붙는 장면이 등장한다. 백성 앞에서 펼쳐진 이 영적 결투의 목적은 하나였다. 유대 백성이 섬길 대상은 야훼인가, 바알인가. 결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야훼가 승리했고,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되찾았다.

약 3천 년이 흐른 뒤, 또 다른 형태의 ‘영적 대결’이 시작됐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출간되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무대로 ‘영혼의 주도권’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 3권에 이르는 이 책은 단순한 경제 모델만 다룬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서로 다른 정신적·도덕적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과연 누가 이겼을까?

공산주의의 본질은 무신론 철학이다. 마르크스는 거침없는 무신론자였고 일부 저작에서는 신을 향한 혐오나 적개심까지 드러냈다. ‘마르크스와 사탄(1986)’이라는 책에서는 마르크스가 사탄 숭배자였을 가능성까지 제기하지만, 대다수 평론가는 그저 신앙을 부정한 인물로 해석한다. 그가 악마의 도구였다는 주장은, 그가 세상에 끼친 엄청난 영향을 생각하면, 억지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그 자신도 모른 채 이용당했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무신론적 성격은 역사 속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소련,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북한, 캄보디아 등의 공산 정권은 종교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공식 정책으로 삼았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부 수용했지만, 공산당식 교리 수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여전히 박해하고 있다. 신장 지역에서는 100만 명 이상의 위구르족 무슬림이 ‘재교육 수용소’에 갇혀 있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종교적 교리를 표방하진 않지만, 그 뿌리는 유럽 기독교 문화, 특히 청교도 정신 속에서 자랐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개인의 내면 수양과 영적 성장을 강조하는 청교도 정신이 자본주의 경제 원리와 자연스럽게 맞물렸다고 분석한다.

기독교는 인간 개인을 존엄성과 자유 의지의 주체로 바라본다. 신약성경은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을 강조하지만, 이를 구제하는 방식은 국가의 강제 명령이 아니라 개인의 사랑과 자발성이다. 재산은 나눌 수 있고 때로는 나눠줄 수 있어야 하지만, 구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도둑질은 금지된다. 이는 사유재산에 관한 성경의 일관된 입장이다. 즉 성경에서는 자산권과 자율성이 조화를 이룬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출간된 이후에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본주의 경제는 전 세계 수십억 인구의 삶을 변화시켰다. 미국 경제사학자 디어드리 매클로스키는 ‘부르주아 시대’ 3부작에서 “위대한 풍요(Great Enrichment)”란 개념을 소개하며,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평균 생활 수준이 30배 이상 높아졌다고 분석한다. 이는 세계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역사상 유례없는 변혁이었다.

정치학자 피터 맥나마라는 매클로스키의 ‘위대한 풍요’에 동의하면서 “상업 활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들과 기독교의 믿음·희망·사랑을 융합한 덕성을 길러냈다”며 “이를 바탕으로 한 ‘부르주아 계약’은 도덕적이면서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시스템”이라고 평가했다.

그 반대쪽 끝에 선, 공산주의·마르크스 체제를 받아들인 사회는 어떤 기억을 남겼을까.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96마일(154km)의 길이로 세워진 베를린 장벽, 기초적인 생필품이 부족해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이념을 거부하는 이들을 붙잡아 가두는 사상 경찰. 소련 반체제 인사였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곳곳에 설치된 강제 수용소를 고립된 섬에 비유해 ‘굴라크 군도’라고 불렀다.

두 체제 중 어떤 것이 잘 작동하는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이념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단지 마르크스나 그 이전의 엘리야 시대의 투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 본성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금지된 열매를 먹으면 너도 신처럼 될 수 있다”며 이브를 꼬드겼고, 인간은 유토피아라는 공허한 이상을 추구하다가 낙원을 잃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성경 속 뱀처럼 “모두가 우리 계획에 따르기만 하면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거짓과 투쟁, 엄청난 희생과 죽음도 정당화한다. 반면, 자본주의자들은 완벽한 인간이 없다는 점을 시인하며 현실적으로 나아간다.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발견한 중력의 법칙처럼, 수없는 실험으로 증명된 진실이다.

자본주의는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되,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노력하고 더 좋아질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제공한다. 이 자유로운 성장은 개인을, 나아가 사회를 더 풍요롭고 자유롭게 만든다. 한때 공산주의의 가장 큰 희망이었던 소련은 수십 년 전에 붕괴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미국은 위대한 풍요를 통해 자본주의의 힘을 증명했고 지금도 여전히 증명해 나가고 있다.

* 이 글은 미국경제연구소(AIER) 웹사이트에 게재됐다.
* 저자 폴 맥도널드는 노스 텍사스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프리랜서 작가로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월드 매거진 등에 기고하고 있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