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워싱턴 선언> 이후 정치권 일각에서 ‘묻지 마’식 혹평들이 쏟아졌다. 어떤 정치인은 “의전과 환대를 대가로 철저히 국익과 실리를 내준 회담”이라고 했고, “국민이 준 시험지를 찢어버리고 미국이 하라는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고 일갈한 정치인도 있었다. “한반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드는 대북 선전포고”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하지만 <워싱턴 선언>은 기본적으로 안보에 관한 문건이기에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선언에 담긴 안보 관련 진실들을 개인의 정치적 성향으로 재단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만큼 <워싱턴 선언>은 북핵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한국의 국가 생존과 직결되는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당연히 한국이 얻은 것도 있고 얻지 못한 것도 있다. 그래서 ‘반잔의 물’이라 할 수 있다.
지금부터 한국에게는 채워진 ‘반잔의 물’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나머지 ‘반잔의 물’을 채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채워진 물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을 바탕으로 당면 안보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며 나머지 반잔을 채워나가야 하는 이유는 한국이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부강한 나라를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워싱턴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북핵에 대해 안보 차원의 대비를 망각한 채 보낸 ‘잃어버린 30년’을 반성하면서 향후 한국의 안보 비전과 핵 자주국방을 설계해나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우선 목표는 제1단계 핵균형의 완성
필자는 지금까지 신냉전 대결구도와 북한이 가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핵보유 의지를 포함한 내외의 안보정세를 종합하여 ‘두 단계에 걸친 핵균형’을 주장해왔다. 즉, 첫 단계에서는 ‘동맹의 핵역량에 의존하는 핵균형(alliance-reliant nuclear parity)’을,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자주적 핵역량을 통한 핵균형(self-reliant nuclear parity)’을 구축해야 함을 강변해왔다. 제1단계에서 동맹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국이 반대하는 상황에서의 독자적인 핵무장은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제2단계 핵균형, 즉 핵 자주국방을 위한 준비도 해나가야 하는 이유는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하거나 중국이 대국주의 행보를 멈출 가능성이 전무한 데다 미국이 아시아 동맹국들에게 핵우산을 제공하면서 독자 핵무장을 만류하는 현 비확산 정책을 무한정 고수한다면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 전체의 전략적 균형이 대륙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사실을 미국도 알고 한국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 일행의 방미를 앞두고 전문가들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제1단계 핵균형을 얻어오기를 기대했었다.
결과적으로 <워싱턴 선언>은 이런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북핵 위협을 상당 수준 상쇄하는 ‘확대억제 강화’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이 선언으로 재래전쟁 억제를 위해 작동해온 한미동맹에 핵억제 개념이 추가되어 동맹의 격과 내용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은 큰 성과였으며, 양국이 북핵 대처의 시급성에 공감하여 핵 기획 및 정보의 공유에 합의하고 미국이 ‘핵을 포함한 미국 역량을 총동원한 확대억제 지원’을 재확인한 것도 유의미한 성과였다. 특히, 최대 무장 시 2차 대전에서 사용된 모든 화력의 8배에 달하는 24Mt의 핵미사일을 탑재하는 전략핵잠수함(SSBN)의 한국 기항과 미 전략자산 정례적 현시(現視)를 약속한 부분은 앞으로 어떻게 실행하느냐에 따라 평양 정권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 수 있다. 즉 한국이 갈급해 했던 ‘확대억제력의 구체화’에 진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설치될 핵협의그룹(NCG)도 운용하기에 따라 향후 한미 간 핵협력을 나토(NATO)의 핵 공동관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지금은 워싱턴 선언이 거둔 성과의 많고 적음을 놓고 정쟁(政爭)을 벌일 때가 아니며 그보다는 기왕에 이룬 성과를 디딤돌 삼아 미 전술핵 재배치,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인근 상시 운용, 주한미군의 제2격 능력(2nd strike forces) 확대, 핵대응 연합훈련 상시화 등 추가적인 합의를 통해 제1단계 핵균형을 완성시키는 동맹외교에 진력할 때이다.
핵 자주국방을 향해 시동 걸어야
제1단계 핵균형을 구축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제는 지금부터 제2단계 핵균형, 즉 ‘독자 핵보유를 통한 핵억제’을 향한 행보에 착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은 정부가 북핵과 ‘대륙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분명한 인식들을 가져야 한다. 북한에게 있어 핵무력 건설은 6·25 전쟁 직후부터 시작되어 반세기가 넘도록 지속해온 최우선 국책사업이라는 점,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사업이라는 점, 궁극 목표인 주체통일을 위한 핵심적 수단이자 최대 장애물인 한미동맹을 이완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 등을 종합할 때 북한 내부의 빈곤이나 외부의 제재 또는 회유가 북핵 포기를 가져올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경제·군사적 ‘덩치’를 앞세우고 ‘전랑(戰狼) 외교’를 펼치면서 주변국들에게 수직적 질서를 요구하는 중국과 상호존중에 기반하는 비적대·선린 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도 궁극적으로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대한민국’을 건설해야 한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이나 대봉(大峰)·소봉(小峰)’을 읊조리는 저자세 외교만으로는 중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을 절감해야 한다. 핵균형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한반도 비핵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과거 미·소 간의 핵군축 조약들이나 브라질-아르헨티나의 상호 핵개발포기 협정(ABACC, 1991)에서 보듯 핵군축 또는 비핵화 협상은 양쪽 모두가 핵경쟁으로 인하여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음을 공감할 때 성사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 만이 핵을 가진 현 핵비대칭 상태에서는 북한을 진정성이 있는 핵협상에 나오게 할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한국이 핵 자주국방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들은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이는 동맹과 함께 가야 하는 길이다. 즉 한미 양국이 시시각각 심화되는 신냉전 대결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북쪽으로부터의 위협’에 공감하면서 필요할 때 필요한 조치들을 함께 강구해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안보 여건상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가 불가피하면 미국은 협력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필요하다면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 능력 배양에 협력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국가 생존을 위해 핵보유가 절실했을 때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메이어(Golda Meir) 수상과의 1969년 비공개 회동을 통해 ‘핵보유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방식(policy of ambiguity)’하의 이스라엘 핵보유를 용인했었다. 때문에 앞으로 한국의 동맹외교는 <워싱턴 선언>이 한국의 핵행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보다는 한국의 핵안보를 돕는 출발점이자 이정표가 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