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이재민을 돕고 한국 재건에 힘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다.’고 평가받는 한 미국 장성에게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이 추서된다. 주인공은 고(故) 리처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 미국 육군 준장이다.
국가보훈처는 11월 8일, 리처드 위트컴 준장에 대한 훈장 추서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1월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위트컴 장군 자녀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리처드 위트컴은 1894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 캔자스시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조지 허버트 위트컴은 캔자스주 대법관을 역임한 저명 법률가였고 어머니 제시 위트컴 역시 당시 남자대학에서 최초로 강의한 법학 교수였다.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은 리처드 위트컴은 유년 시절 기독교적 정의와 인류애를 터득했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본(Washbon)대학에 진학한 후 미식축구 선수, 토론회 우수 토론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같은 시기 학생 자원 선교활동회(SVM·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에서도 활동하며 선교사로서 필리핀에서 사역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미국도 참전을 결정했다. 학군사관후보생(ROTC)으로 장교 임관한 위트컴도 전쟁에 참전하여 유럽에서 활약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당시 독일 해군의 이동 감시초소인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 건설 참여 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오마하 전투에 참전했다. 전투에서 그는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 군수 물자 수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와 더불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17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필리핀 상륙작전의 수송, 군수 보급 업무를 마치고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다 1953년 6·25전쟁 휴전협정이 무르익어갈 무렵 부산의 제2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1953년 11월, 부산역 부근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난롯불 부주의로 발생한 화재는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14시간에 걸친 화마는 부산역 인근 번화가의 주요 건물 및 민가 등 약 1,250호를 태우고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에 완전히 진화되었다. 피해는 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사상자 29명, 이재민 6,000여 세대 3만여 명이 발생하였다.
참상을 목격한 위트컴 장군은 민간에 사용할 수 없는 군수물자를 직권으로 풀어 추위에 갈 곳이 없는 이재민들에게 천막촌을 건립해 주고 먹을 것을 제공했다. 정부도 할 수 없었던 용단이었으나 군수물자 무단 전용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도 증언해야 했다. 의원들의 추궁에 그는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고 말해 오히려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미국 정부는 추가 군수품을 지원하기도 했다.
군수기지 사령관의 1차 소임은 장기전으로 소모된 유엔군에게 막대한 장비와 탄약을 재보급하여 화력전투를 보강하고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긴박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투에 사용할 군수물자를 무단으로 전용하며 민간의 아픔과 고통을 품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트컴은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고통과 필연적 후유증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가슴 아파했던 것이다.
부산 대화재를 계기로 위트컴 장군은 한국 정부와 부산시의 총체적인 재건을 위해 당시 테일러 주한 미8군사령관과 긴밀한 협의를 하면서 미군대한원조(AFAK)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미국 의회 등의 지원을 받았다.
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는 부산 대화재를 극복하기 위한 묘책으로 위트컴 장군이 제안하고, 미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이 승인해 탄생했다.
장군은 부산 중구에 메리놀병원을 증축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6.25 전쟁 두 달 전인 1950년 4월 15일 메리놀 수녀회에서 설립한 메리놀병원은 시설도 열악하였지만 밀려오는 피난민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메리놀병원은 위트컴의 노력으로 미군대한원조(AFAK) 기금을 지원받아 1954년 7월 29일 현재의 위치에 지상 3층 160병상을 가진 정식 병원으로 기공식을 하게 되지만 신축 자금은 부족했다. 위트컴은 사령관의 체면을 버리고 본인은 파란 눈의 갓을 쓴 노인으로, 메리놀 수녀회와 부대원들은 한복 서양인으로 단장하여 거리 가장행렬을 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다. 예하 미군 장병에게는 월급의 1%를 기부하게 하여 기금을 충당했다.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건립 등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장군의 발상과 헌신적 노력에 세계가 박수를 보냈다. 한복 차림의 벽안(碧眼)의 장군을 두고 ‘라이프(Life)’지는 ‘한국의 양반(Gentleman of Korea)’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권을 설득해 부산대 장전동 캠퍼스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약 50만 평의 캠퍼스 부지를 제공받았고 휘하 공병부대를 동원하여 교사(校舍) 건축을 도왔다. 이 외에도 이재민 주택 건설, 도로 건설, 의료 시설 건립 등을 지원하고 부산대를 비롯한 각급 학교 설립을 도와 한국과 부산 전후 재건에 힘썼다.
리처드 위트컴 장군은 1954년 퇴역 후에도 한국에 남았다. 당시 전쟁고아를 위해 함께 활동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한묘숙 여사는 남편과 결별 후 두 자녀를 키우던 ‘고아원 원장’이었고 선물 상자를 들고 고아원을 방문한 위트컴 장군은 독신의 노신사였다. 한묘숙의 보육 활동에 감동한 위트컴은 이듬해 전격적으로 청혼하였고 두 사람은 33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퇴역 후 전쟁고아 돕기, 미군 유해 발굴에 남은 삶을 바치면서 ‘전쟁고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다. 1982년 7월 12일 작고한 장군은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유엔기념공원 내 미국 묘역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러한 리처드 위트컴 장군의 인류애와 한국 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도 11월 10일 발족했다.
‘리차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 발족 행사장에는 각계각층 인사 100여 명이 모였다. 위트컴 장군의 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은 “조형물 건립은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며 청중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부산지역 정계, 재계, 언론계, 학계 인사로 구성된 ‘리차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는 2023년 11월 10일까지 1년간 시민 3만 명이 1만 원씩 내는 방식으로 총 3억 원을 모금해 조형물을 건립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사업에는 향토건설업체 협성종합건업 정철원 회장이 몇 년 전 조형물 건립을 위해 3억 원을 희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시민모금운동 방식으로 장군의 조형물을 건립하기로 한 것은 동상 건립 자체보다 장군이 부산시민을 위해 베푼 정신을 공유하고 기리자는 취지에서다.
모금 예상 인원 3만 명도 의미가 있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와 관련 있다. 이날 화재로 6000세대 3만 명의 이재민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만 했다. 3만 명은 당시 위트컴 장군의 도움에 대한 보은(報恩)의 의미가 담겼다.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은 2018년 한 차례 추진된 적이 있다. 당시 유엔평화기념관에 조형물 설치를 추진할 예정이었지만 노출 빈도가 떨어진다는 내부 지적 때문에 무산됐다. 이후 기약 없이 답보하던 조형물 제작은 올해 국가보훈처가 위트컴 장군에게 국민훈장 1등급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부산 남구를 지역구로 둔 박수영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시민위원회 발족식 개회사에서 “70년 전 부산역전 대화재로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던 이재민 3만 명이 위트컴 장군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제 되돌려줄 차례이다. 시민 3만 명의 성금 모금을 통해 기념조형물을 건립하고 장군의 정신을 되새기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