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발퀴레의 기행’…신화에서 음악이 된 명곡
'전투에 나서는 발퀴레들', 19세기, 요한 구스타프 산드베리 작품. 유화.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소장. | 퍼블릭 도메인 방대한 신화 속 고대의 전쟁 담아내며 서양 음악사에 한 획
사후 세계 ‘발할라’ 꿈꾸며 전장에서 최후를 맞이한 영웅 서사시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다. 북유럽 신화 속 하늘을 나는 여전사들의 모습을 웅장하게 그린 이 곡은 현대사를 거치며 공중전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새롭게 해석되기도 했다.
‘니벨룽의 반지’는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신과 거인, 난쟁이 니벨룽족(族)이 절대 권력의 상징인 반지를 차지하고자 투쟁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편의 대작으로 구성됐으며,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어진다. 그중 ‘발퀴레’는 인간과 신, 사랑과 운명, 권력과 희생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발퀴레의 기행’은 ‘니벨룽의 반지’ 연작 중 두 번째 작품인 ‘발퀴레’ 3막의 서막을 장식한다. 2막에서 지문트와 지클린데는 사회적 금기와 신들의 질서를 넘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지클린데는 이미 다른 이의 아내이며, 두 사람은 쌍둥이 남매라는 설정은 이 사랑을 더욱 비극적인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신들의 세계를 대표하는 보탄은 개인적 연민과 신적 질서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결혼의 수호신 프릭카의 뜻에 따라 두 연인을 파멸로 이끈다. 2막의 종결은 곧 인간적 사랑이 신들의 법 앞에서 무너지는 지점이다.
3막의 시작과 함께 울려 퍼지는 ‘발퀴레의 기행’은 이런 비극 직후 펼쳐지는 또 다른 차원의 장면이다. 발퀴레는 전사한 용사들 중 용맹한 이들의 영혼을 전사들의 낙원인 발할라로 인도하는 여전사 집단이다. 보탄의 딸인 9명의 발퀴레는 광폭한 영혼의 말에 올라 하늘을 가르며 달려오고, 전사한 영웅을 발할라로 운반한다. 이미 여덟 명이 도착해 자매를 기다리고 있고, 마지막에 나타난 브륀힐데는 영웅 대신 지클린데를 데리고 온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사랑과 신의 질서, 복종과 저항의 문제는 이후 ‘반지’ 전편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로 확장된다.
바그너는 이 방대한 신화적 소재를 자신의 음악극 세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신화 속 브륀힐드는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브륀힐데로 다시 태어나고, 이후 독일 낭만 오페라를 상징하는 인물상이 된다. 뿔 달린 투구와 중무장의 여성 전사라는 이미지 역시 이 과정에서 굳어졌다. 또 발퀴레가 용감하게 하늘을 나는 모습을 경쾌하면서도 웅장하게 풀어내며, 이 곡은 오페라 안에서의 기능을 넘어 교향악 레퍼토리로서도 독자적인 생명을 얻었다. 오늘날 ‘발퀴레의 기행’은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오페라 관현악곡 가운데 하나로, 정통 클래식 무대는 물론 대중 친화적 프로그램에서도 반복적으로 연주된다.
음악은 현악기의 짧고 빠르게 치솟는 음형으로 시작되며, 상성부 목관의 긴 트릴이 이를 긴장감 있게 받쳐 준다. 이어 바순과 호른이 제시하는 독특한 리듬은 곡 전체를 관통하는 추진력의 원형이 된다. 약 20초가 지나 호른이 힘차게 내뿜는 주제는, 이 리듬 위에서 비로소 완전한 형상을 드러낸다.

‘쓰러져 가는 영웅과 발퀴레’, 19세기, 한스 마카르트 작품. 유화.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소장. | 퍼블릭 도메인
바그너는 이 선율의 첫 제시에 ‘날카롭고 분명하게 강조할 것’이라는 지시를 덧붙였다. 9/8박자의 복합 리듬은 세 박의 큰 흐름을 만들어내며, 말발굽이 땅을 치며 질주하는 듯한 운동감을 형성한다. 중무장한 여성 전사들이 전쟁마를 타고 하늘을 가르는 신화적 상황에 어울리는, 육중하면서도 탄력적인 리듬이다.
주제는 점차 확대되다가 1분 17초 무렵 잠시 음량을 낮추며 숨을 고른다. 그러나 이 고요는 곧 다시 영웅적 주제의 귀환으로 이어진다. 약 3분 지점에서 음악은 대규모 반복부에 들어서며, 이 곡 특유의 집요한 에너지를 마지막까지 밀어붙인다. 바그너 특유의 누적적 구조와 음향적 압력이 가장 응축된 순간이다.
‘발퀴레의 기행’은 바그너의 작품 중 ‘결혼 행진곡’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곡으로 다양한 광고와 영화에 다채롭게 차용됐다. 다만, 날개 달린 천마를 타고 전장을 오가던 발퀴레의 숭고함과 명예를 상징했던 이 곡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려던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 이미지에 극적인 전환기를 맞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1979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는 헬리콥터 부대가 베트남 마을을 공격하는 장면을 배경 음악으로 ‘발퀴레의 기행’이 흐른다. 이는 영웅적 음악이 폭력의 이미지와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이 곡은 숭고한 신화적 이미지와 함께 현대 전쟁의 공포를 상징하는 음악으로 기억됐다. 로이터 통신은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은 병사들을 실전에 투입하기 전 사기를 끌어올리려 이 음악을 틀어줬다고 보도했다. ‘발퀴레의 기행’이 더 이상 19세기 낭만주의 오페라의 한 장면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 일화다.
– 저자 케네스 라파브는 작가이자 작곡가다. 웹사이트 케네스라파브뮤직닷컴(KennethLaFaveMusic.com)을 운영 중이다.
저작권자 © 에포크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