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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부인’이 남긴 가슴 저린 사랑의 메아리

2025년 11월 28일 오전 11:38
2007년 7월 7일, 프랑스 오랑주에서 열린 ‘나비부인’ 리허설에서 초초상 역을 맡은 베로니카 비야로엘. | 보리스 호르바트/AFP via Getty Images2007년 7월 7일, 프랑스 오랑주에서 열린 ‘나비부인’ 리허설에서 초초상 역을 맡은 베로니카 비야로엘. | 보리스 호르바트/AFP via Getty Images

동서양의 고전 로맨스 ‘나비부인’은 미국 해군 장교 핑커턴과 결혼한 일본 게이샤의 비극을 다룬 이야기다. 단편소설인 원작은 미국에서 연극으로 각색돼 흥행을 이뤘고, 자코모 푸치니가 이를 바탕으로 작곡해 1904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이 초연됐다.

(왼쪽부터) 영화 ‘나비부인’의 초초상(실비아 시드니), 핑커턴 중위(캐리 그랜트), 스즈키(루이스 카터). | 파라마운트 픽처스

해바라기 같은 사랑

사랑하던 남자에게 배반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나비부인’. 영화에서 초초상(Cho-Cho-San)이라 불리는 15살 난 일본의 소녀는 게이샤로, 일본에 임시 주둔하던 미국 해군 장교 핑커턴 중위와 사랑해 결혼한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핑커선은 떠나야 했고, 두 사람은 3년간 떨어져 지내야 했다. 묵묵히 기다렸던 초초상은 남편 없이 아들을 출산하고, 하녀 스즈키만이 충직하게 그녀 곁을 지켜준다.

3년 뒤 일본으로 돌아온 핑커턴 곁에는 또 다른 ‘진짜’ 아내가 있었다. 핑커턴에게는 초초상과의 결혼이 일시적 계약일 뿐 미국에서 ‘진짜’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만난 핑커턴은 초초상과이 낳은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가 키우려 하자, 초초상은 아이를 보낸 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끊는다.

원작 소설 ‘마담 버터플라이(1898년)’의 작가 존 루터 롱은 피에르 로티의 반자전적 프랑스 소설 ‘마담 크리산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피에르 로티의 소설에서 핑커턴은 미국인이 아닌 프랑스인으로, 초초상 역시 ‘나비’가 아닌 ‘국화’로 묘사되어 있다.

오페라 선율을 담은 영화

오페라가 인기를 끌자,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세 편의 무성 영화 이후 유성 영화가 제작됐는데, 1932년 제작된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나비부인(주연: 실비아 시드니, 캐리 그랜트)’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페라를 바탕으로 제작된 많은 고전 영화가 있지만, 오페라 선율을 그대로 사용한 작품은 이 영화가 거의 유일하다.

할리우드에서 오페라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제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검열이 엄격하지 않았던 당시 제작된 영화는 누드, 외설적인 농담, 과도한 폭력 등 충격적일 정도로 대담한 장면들이 가감 없이 담겼고, 이로 인해 미국 전역에서 비판받고 있었다.

1932년 할리우드가 ‘나비부인’을 제작한 것은 ‘고급’ 영화로 개혁적 성향을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배경 음악도 오페라를 사용하고, 민감한 장면들을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받는 오페라

‘나비부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중 하나다. 다만 최근에는 인종에 대한 고정 관념적 묘사와 초초상이 사실상 15세의 미성년의 신부라는 사실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한다.

2022년 7월 15일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에서 열린 ‘나비부인’ 리허설에서 초초상(바르노 이스마툴라예바)과 핑커턴 소위(에드가라스 몬트비다스)가 연기하고 있다. | 레온하르트 사이먼/게티이미지

이런 논란에도 ‘나비부인’의 인기는 여전하다. ‘나비부인’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로 꼽힌다.

오페라 ‘나비부인’이 1904년 이탈리아에서 초연된 뒤 1907년, 3년 만에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에서 초연됐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공연된 푸치니의 첫 작품이었다.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출연했고, 이 공연으로 푸치니는 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이 일본과 전쟁 중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몇 년을 제외하고는 매 시즌 공연이 이어졌다. 오페라의 ‘비극적 사실주의(verismo)’에 대한 미국인의 사랑을 확고히 보여준다.

푸치니 오페라 초연 당시인 1904년 무대에서 나비부인 역을 맡은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 퍼블릭 도메인

미국에서는 커튼콜에서 핑커턴 역을 맡은 가수에게 관객들이 장난스럽게 야유를 보내는 것이 전통이 됐다. 푸치니의 오페라에서 핑커턴 중위는 가장 밉상인 남자 주인공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카르멘(Carmen)’의 돈 호세처럼 여주인공을 죽이거나, ‘알레코(Aleko)’의 젊은 집시처럼 다른 남자의 아내를 훔치거나, ‘리골레토(Rigoletto)’나 ‘파우스트(Faust)’에서처럼 순수한 소녀를 타락시키는 테너 주인공들처럼 극단적으로 잔인하지는 않다. 핑커턴은 악당도 아니고, 폭력적이거나 잔혹하지도 않다. 단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일 뿐이다.

핑커턴의 완벽하지 않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핑커턴이 푸치니의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할 때면 그가 초초상에게 보여준 냉혹함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만약 이 이야기가 뮤지컬이 아니라 일반 영화였다면, 핑커턴은 정말 괴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오페라의 조언자와 영화 속 ‘악마’

오페라에서 미국 영사 샤플리스(바리톤)는 핑커턴의 동료이자 조언자 역할로 비중 있는 조연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핑커턴의 결혼식에서 핑커턴에게 결혼 절차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경고한다.

반면, 영화에서는 원작 단편소설에 따라 샤플리스를 단순한 주변 인물로 설정했다. 영화 속 샤플리스는 이야기가 끝날 무렵, 초초상이 남편에 관해 묻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을 때만 등장한다.

대신 영화의 제작진은 새로운 인물, 미 해군 장교 바턴 중위(찰스 러글스)를 추가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하고 코믹한 캐릭터 같지만, 그는 핑커턴과 관련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샤플리스가 핑커턴이 애써 무시한 양심이라면, 바턴은 핑커턴 어깨 위의 악마같은 존재다.

영화에서 핑커턴 대위 역을 맡은 케리 그랜트는 1932년 장편 영화 데뷔를 한 배우로, ‘나비부인’은 그해에 참여한 여덟 번째 영화였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주연 배우를 명백한 ‘악역’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금기였다. 그래서 영화는 핑커턴을 보다 동정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영리한 장치를 마련했다.

여성 편력가인 바턴은 핑커턴을 게이샤 다방으로 이끄는 나쁜 동료다. 일본식 결혼제도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핑커턴이 아니라 바턴이다. 핑커턴은 짧은 결혼 생활이 일본의 신부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민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된다.

(왼쪽부터) 영화 ‘나비부인’에서 바턴 중위(찰스 러글스), 초초상(실비아 시드니), 핑커턴 중위(케리 그랜트)의 모습. | 파라마운트 픽처스

영화에서 오페라와 크게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초초상과 핑커턴의 관계 묘사다. 오페라에서의 핑커턴이 결혼 중개인의 알선으로 가구가 갖춰진 집과 아내까지 ‘세트로 갖춰진’ 삶을 쉽게 얻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 속 핑커턴은 그러한 욕심과 의도를 가지고 초초상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영화 속 핑커턴은 초초상과 정원에서 키스하는 모습을 들켜 초초상이 치욕을 당할 처지가 되자,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결혼하게 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린 것은 사실이지만, 핑커턴이 처음부터 그녀나 다른 일본 여성을 결혼 대상으로 삼으려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미국에 약혼녀가 있었다.

이 설정은 핑커턴이라는 캐릭터를 인간적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관객은 그가 초초상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고국에서 약혼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핑커턴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오페라에서 핑커턴의 행동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대표적인 이유로 두 장면을 꼽을 수 있다. 1막 초초상과의 결혼식에서 나중에 미국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장면과 3막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후 초초상을 피하는 장면이다. 그의 비겁한 생각과 행동은 초초상의 처지를 더욱 참혹하게 느껴지게 한다.

반면 영화 속 핑커턴은 결혼 기간 동안 초초상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다만 언젠가 미국으로 돌아가 약혼녀와 결혼해야 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 그의 마음 한 켠을 괴롭힌다. 그는 미국인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직접 초초상을 찾아가 상황을 솔직하고 반성 어린 태도로 설명한다.

초초상은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지만, 영화 속 핑커턴은 상황을 훨씬 성숙하게 처리한다. 오페라와 달리 그는 아내와 샤플리스에게 이 소식을 전하도록 떠넘기지 않고, 직접 그녀에게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한다.

아시아인 캐릭터와 연기

1930년대 미국에서는 백인 배우가 분장, 가발, 의상 등을 이용해 다른 국적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흔했다. 백인이 아시아인으로 분장하는 것을 흔히 ‘옐로페이스(yellow face)’라고 부르며, 오늘날에는 과장된 고정관념을 만들어내는 조롱으로 여겨져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할리우드 황금기 시절에는 당대 최고의 백인 스타들이 다른 인종을 진지하게 연기한 사례도 많았다.

영화 ‘나비부인’에서 핑커턴 중위(케리 그랜트)와 초초상(실비아 시드니). | 파라마운트 픽처스

‘나비부인’이 바로 그런 사례다. 실비아 시드니는 루마니아, 러시아, 유대인 혈통의 인기 배우였지만, 일본의 젊은 여성 역할을 매우 잘 소화했다. 그녀는 민족적 특징이 뚜렷하지 않은 얼굴 덕분에 아시아인뿐 아니라 다른 백인이 아닌 캐릭터도 여러 차례 연기할 수 있었다.

오페라는 일반적으로 배우의 외모보다는 성악 실력을 기준으로 캐스팅되기 때문에, 서양 오페라 단체에서 비아시아계 소프라노가 초초상 역을 맡는 것은 여전히 흔하다. 최근에는 인종적 차용 문제에 대한 우려로 일부 제작에서는 아시아풍 분장과 가발 사용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초초상과 다른 여성 배우들이 전통 일본 게이샤 복장을 착용하는 것은 여전히 표준적인 관행이다.

무대 위에서든, 93년 된 영화에서든, ‘나비부인’의 이야기는 푸치니의 가슴 아픈 선율과 결합할 때 그 비극성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지는 강력한 서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