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메조소프라노의 전설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 “사랑한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2011년 샌프란시스코 허스트 극장에서 열린 헌정 공연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를 기리며’에서 무대 안팎에서의 활약을 기념하며 자리한 모습. | 사진=프레데리카 폰 슈타데 미국의 전설적인 메조 소프라노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 그녀는 세계적인 지휘자들 대부분과 협연했고, 수십 년간 세계 최고 오페라 무대에 섰다. 그녀의 오페라 ‘루살카’ 아리아 영상은 400만 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녀는 80세의 나이에도, 최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작품을 상연할 작곡가를 직접 발굴하고, 사회적 약자인 청소년들이 음악적 재능으로 대학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현재 80세인 폰 슈타데는 사회적 약자인 청소년들이 음악적 재능으로 대학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영 뮤지션스 코럴 오케스트라’입니다. 9세부터 18세까지 65명의 아이가 참여하는데, 정말 보람 있어요.” 폰 슈타데는 ‘아메리칸 에센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마음은 여전히 브로드웨이 소녀
폰 슈타데는 어린 시절 유복했지만 슬픔을 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라 클루커스 폰 슈타데, 아버지는 미국 폴로 챔피언 찰스 스틸 폰 슈타데였다. 1942년 미군에 입대한 아버지는 1945년 4월 전사했다. 유럽 전쟁 종전 한 달 전, 그리고 그녀가 태어나기 두 달 전이었다. 프레데리카는 워싱턴에서 자라며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어머니는 CIA에서 비서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녀는 ‘플리카(Flicka)’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폴로 선수였던 아버지가 키우던 조랑말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별명은 평생 그녀와 함께했다.
“제 이름은 고모의 이름을 따라 지은 프레데리카인데, 양가에 프레더릭 삼촌들이 많아서 프레디라는 이름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플리카가 됐죠.”

美 메조 소프라노의 전설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 사진=프레데리카 폰 슈타데
스무살 무렵, 플리카는 한창 전성기였던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길 원했다. 1964년에는 ‘헬로, 돌리!’, ;퍼니 걸’,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잇달아 초연되었다. 그녀는 훌륭한 목소리와 카리스마, 야망을 갖췄지만, 의외로 악보 읽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뉴욕 매네스 음악학교에 지원해 합격했는데, 그곳에서 리처드 로저스나 제리 허먼 같은 작곡가들의 악보를 읽는 것이 목표였다. 그녀는 마침내 모차르트를 노래하게 됐다. “세바스티안 엥겔버그 선생님과 함께 악보 읽는 법을 배웠어요.” 그녀는 엥겔버그가 자신의 음악 경력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분이 메트 오페라 오디션에 나가보라고 격려했어요. 저는 ‘나에겐 가능성도 없고 별거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상을 받게 됐어요. 상과 함께 계약도 따라왔고, 제 진로가 자연스레 결정됐죠.” 이렇게 오페라 무대와 클래식 노래가 그녀의 미래가 됐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페라가 브로드웨이보다 편할 때도 있어요. 브로드웨이는 일주일에 여덟 번 공연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그들은 정말 상황이 어려워지죠.”
브로드웨이 노래에 대한 사랑을 잃진 않았냐는 질문에, 폰 슈타데는 “전 브로드웨이를 절대 잊지 않았어요.”라며 ‘사운드 오브 뮤직’과 ‘온 더 타운’ 스튜디오 캐스트 음반, 로저스와 하트의 명곡들을 녹음한 CD들을 들어 보였다.
오페라계의 독보적 존재
그녀의 음반들은 대단하다. 1970년경 메조소프라노로 데뷔한 폰 슈타데는 초반에 ‘팬츠 롤’이라 불리는 남성 역할을 많이 맡았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에서 체루비노, ‘티토의 자비’에서 세스토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장-필립 라모, 조아키노 로시니, 쥘 마스네, 프란츠 슈베르트, 로베르트 슈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크토르 베를리오즈, 조셉 칸탈루브, 가브리엘 포레, 클로드 드뷔시, 빈첸초 벨리니, 구스타프 말러, 모리스 라벨 등 다양한 작곡가의 오페라, 콘서트, 리사이틀 레퍼토리를 소화하며 성장했다. 그녀의 연주가 담긴 CD도 다수 발매됐다.
가상의 무인도에 자신이 가진 음반 중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고르겠냐는 질문에, 폰 슈타데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로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말러 교향곡 4번을 꼽았다. ‘천국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가사와 음악이 자신의 가톨릭 신앙과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배역은 드뷔시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멜리장드이다. 그녀는 “평생 남자 역할을 많이 해온 여자인데, 아름다운 긴 드레스에 머리를 바닥까지 늘어뜨리는 게 얼마나 즐거웠겠어요? 일종의 놀이 같았죠.”라고 말했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재해석한 두 오페라,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와 마스네의 ‘센드리용’역시 그녀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1985년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극장에서 로시니 ‘라 도나 델 라고’의 엘레나 역으로 무대에 선 폰 슈타데. 사진=도널드 쿠퍼/alamy
젊은 예술가 지원
그녀의 레퍼토리 중 현대음악 지지와 홍보는 빼놓을 수 없다. 올해 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모비딕’을 성공적으로 올린 美 작곡가 제이크 헤기는 그녀가 발굴한 음악인이다.
199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공연할 때 홍보 담당이던 헤기가 그녀에게 민요 편곡집을 선물했던 게 인연이 됐다. 감명을 받은 폰 슈타데는 마침 오페라 ‘데드 맨 워킹’의 작곡가를 찾고 있었던 극작가 테렌스 맥널리와 헤기를 연결해 주었다. 2000년 초연된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뒀고, 헤기는 이후 여러 오페라 작품을 작곡했다.

2016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제11회 오페라 뉴스 어워즈 참석자들. 사진=밀렌 페르난데스/에포크 타임스
충만한 삶을 살다
1973년, 폰 슈타데는 베이스 바리톤이자 사진작가인 피터 엘커스와 결혼했다. 이후 1977년 첫째 딸 제니, 1980년 둘째 딸 안나를 낳았다. 이전까지 오페라계는 가정과 일을 병행하는 걸 좋지 않게 여겼지만, 그녀와 같은 세대의 성악가들이 그런 분위기를 바꿨다. 2020년 『클래식 싱어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성악가이면서도 아이를 갖고 싶고,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 여성 성악가들이 있어도 괜찮다는 분위기를 만들었어요. 덕분에 우리 대부분은 아이를 낳았고, 대부분 일을 이어갔죠. 정말 좋은 일이었어요. 노래하는 걸 사랑했지만, 엄마인 것도 정말 사랑했거든요.”
이제 할머니가 된 폰 슈타데가 젊은 오페라 지망생들에게 전하는 말도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저는 ‘포기하지 마’라고 적힌 작은 금팔찌를 항상 차고 있죠. 인생에는 정해진 공식이 없고, 언제 기회가 올지 아무도 몰라요. 이건 쇼 비즈니스고, 행운에 좌우지 되는 분야라고 할 수 있어요. 인정받지 못한 재능도 정말 많죠. 항상 공평하지도 않고, 모두가 관심을 가져주는 것도 아니지만, 당신이 사랑한다면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당신의 목소리를 사랑해 주세요. 매일 당신의 목소리가 당신을 위해 하는 일에 감사할 줄 알길 바라요.”
** 이 기사는 ‘아메리칸 에센스’ 매거진에 실렸습니다.
*이지수 인턴기자, 조윤덕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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