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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지혜를 찾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2025년 11월 22일 오후 1:31
미켈란젤로 작,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년~151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 퍼블릭 도메인미켈란젤로 작,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년~151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우리의 예술 전통은 지혜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호기심 어린 마음과 열린 자세로 문화와 역사 속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는 위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위대한 예술이 가득하다. 미켈란젤로의 이야기와 예술은 지속적인 본보기가 되어준다.

미켈란젤로 작,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년~151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이 이야기는 서양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빠르게 떠오르던 16세기 로마에서 시작된다. 33세의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였고, 천장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에 “회화는 내 예술이 아니다”라고 거절한다.

그렇다면 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 아니라 그림을 맡겼을까? 조르조 바사리의 책 『화가 열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교황을 위해 일하던 저명한 건축가 브라만테가 자신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함으로써 평판을 망치려 한다고 의심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브라만테와 다른 미켈란젤로의 경쟁자들은 그를 조각에서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미켈란젤로가 조각에는 완벽하다고 보았고, 억지로 그림를 그리게 하면, 프레스코 기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없을거로 생각했다.”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 기법을 몰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것 때문에 주저하지는 않았다. 미켈란젤로 연구의 권위자인 윌리엄 월리스 박사는 말한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릴 당시,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다비드’를 조각했던 예술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나는 최고의 조각가다. 또, 이제 최고의 화가가 될 거다. 나는 결국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될 거다.’ 그는 아직 젊었고,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려 4년 동안,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 기법에 대해 배운 것을 바탕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지치지 않고 그려 나갔다. 그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운 화가는 아니었지만, 결국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경이로운 프레스코화 중 하나를 완성하게 된다. 이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스 킹의 책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화』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을 하며 가족 문제, 경쟁자들과의 갈등, 기술적 문제, 정치적 상황까지 함께 감당해야 했다. 그의 개인 노트에는 천장화를 그리는 동안 겪었던 고충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극심한 불안 속에 살고 있으며, 극심한 육체적 피로에 시달린다. 아무런 친구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식사할 시간조차 없다.”

미켈란젤로는 그 어떤 고난에도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시련을 신성함에 대한 시각적 찬미로 바꾸었다. 로스 킹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처음 제안된 열두 사도의 천장화 구상에 만족하지 못했고, 교황에게 더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그는 인간의 육체를 통해 인간과 신의 관계를 더 깊이 탐구하고자 했다. 교황은 이를 허락했고, 열두 사도만을 담았던 초기 구상은 300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복잡한 구성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기독교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고대 이교적 전통의 인물들까지도 함께 담아냈다. “시스티나 천장화는 단순히 창세기의 아홉 가지 이야기만을 담아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풍요로운 보고다.” 월리스가 설명한다.

“시스티나 천장화는 ‘모든 창조’를 담아낸다. 그것은 기독교와 이교의 구분을 드러내는 그림이 아니다. 신은 기독교를 만들기 전에 이교 세계를 먼저 창조했다. 시빌라(여예언자)들은 예언자들의 대응자로, 기독교가 오기 전의 이교 세계를 대표한다. 시스티나 천장화에는 이교의 시빌라들이 있는 것처럼, 유대교의 이야기들도 함께 존재한다. 시스티나 천장화는 기독교도, 유대교도, 이교도 아닌, ‘모든 창조’를 담고 있다.”

미켈란젤로 작, ‘리비아의 시빌라 습작’, 1510~1511년, 종이에 붉은색·흰색 분필 및 목탄, 크기 28.9cm x 21.4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퍼블릭 도메인

미켈란젤로 작, ‘리비아의 시빌라’, 1508~1512,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 퍼블릭 도메인

미켈란젤로는 기독교, 유대교, 이교의 인물들을 한 작품에 담았을 뿐만 아니라, 신을 시각적으로 묘사했다. 이 당시에 예술가가 신을 묘사하는 일은 드물었다. 월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며 신의 창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신은 그려질 만한 가치가 있다. 이전의 기독교 미술에서는 신이 전혀 등장하지 않거나 손만 그려지기도 했는데, 신의 모습을 상상해 표현하는 것은 매우 대담한 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에게 신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를 제공했다.”

신을 묘사한 『아담의 창조』는 시스티나 천장화의 일부로, 세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이다. 미켈란젤로는 깨어나는 순간 자신의 창조주를 만나게 되는 아담을 그렸다. 몸을 기대고 누운 아담은 갈망 어린 눈빛으로 신을 바라보며, 창조주에게 손을 뻗는다. 신과 그를 둘러싼 성서 속의 인물들은 큰 에너지를 가지고 아담을 향해 움직인다. 자신의 구상에 만족한 신도 역시 아담에게 손을 내민다.

미켈란젤로 작, ‘아담의 창조’ 부분, 1508년~151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아담과 신의 손가락 사이 공간은 매우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진다. 월리스는 자신의 저서 『미켈란젤로, ‘예술가, 인간, 그리고 그의 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손끝을 가르는 몇 센티미터의 간격은 미술사에서 가장 거대한 시간과 이야기의 정지 상태이다.” 아담이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신과 같은 공을 들인다면, 신에게 손을 닿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들 사이의 거리는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300명이 넘는 인물을 150개가 넘는 별개의 화구(그림 단위)에 그려 넣은 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천장화를 완성했다. 시스티나 천장화는 1512년 11월 1일 만성절(All Saints Day)에 공개됐다.

“그가 직면한 어려움을 생각해 보면, 그가 끝까지 버텼다는 것은 매우 존경스럽고 놀라운 일이다,”라고 월리스는 말한다. “천장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엄청난 압박 속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고 버텨냈다는 점을 우리는 존경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포기했을 도전과제를,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 작,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1512,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여기에서 미켈란젤로 이야기 속 지혜의 핵심을 찾을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신성함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믿음과 열망으로 고난을 견뎌냈다. 낯선 과제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순히 그 과업에 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의 형태를 통해 신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영감 어린 노력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감탄하며 감상하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 글은 『Radiant Life』 잡지에 게재되었습니다. 

*애나 조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