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제도적 ‘과학’이 인간 이성과 충돌할 때
금주법에서 기후 위기 논쟁까지, ‘과학의 이름으로’ 벌어진 사회적 실험의 교훈
AdobeStock            지난주, 한 권위 있는 과학 저널에 다소 특이한 논문을 발표됐다. 이 논문은 잠시 전국 언론의 주목을 받다가 곧 사라졌다.
논문의 요지는 우리가 닭고기 대신 소고기를 먹는 습관—혹은 더 나아가 콩이나 벌레를 먹지 않는 습관—이 지구 온난화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이 연구의 ‘새로운 시도’는 소고기 소비량을 지역별 지리 정보와 결합해, 자신이 사는 지역(우편번호 기준)에서 벌어지는 나쁜 식습관이 기후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 연구를 보도한 기자들은 독자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 미리 논문 사본을 받아 준비했다.
독자는 자신의 우편번호를 입력해, 자신의 지역 사회가 전 세계적인 기후 안정화 노력에 얼마나 ‘협조적’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당신이 대도시에 살고 있다면, 옆집의 햄버거 애호가들 때문에 북극의 빙하가 녹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라는 식의 메시지가 따라왔다.
물론 터무니없게 들릴 수 있다는 점은 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주류 과학이 서 있는 현실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신문 기사나 라디오 뉴스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나도 시간을 내서 그 논문을 직접 읽어봤다.
연구진이 한 일은, 유엔(UN)의 최신 기후 모델을 사람들의 식습관 연구와 지리적 데이터에 겹쳐 분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류가 초래한 기후 변화를 멈추려면 우리의 식습관이 얼마나 바뀌어야 하는지를 추정하는 시뮬레이션을 실행했다.
결국 이 연구가 내포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스테이크 한 점이나 미트볼 하나를 먹을 때마다 깊은 죄책감을 느껴야 하며, 요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고기를 더 먹어야 한다”는 주장 따위는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문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유엔의 기후모델이 가진 문제점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반박과 재검증, 그리고 번번이 빗나간 예측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델에 의문을 제기하는 웹사이트를 찾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후를 측정하는 방식이 수천 가지가 있지만, 화석연료나 소고기 소비가 인간이 초래한 기후 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과학적 인과관계 증거가 단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기후모델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은 여전히 ‘비주류 이단자’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왜 이런 연구들이 계속 출판되고, 또 왜 세간의 주목을 받는가 하는 이유 말이다.
돈의 흐름이 그 근본 원인이었다. 이런 종류의 연구와 글쓰기는 자금이 흘러들어오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순간 자금줄이 끊긴다.
연구자가 기존의 ‘과학적 정설’을 세련된 방식으로 포장해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논문은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승진이나 추가 연구비 지원도 따라온다.
이런 연구들이 널리 홍보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이 정치적 의제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과연 이 연구들을 진심으로, 완전히, 정직하게 믿는 사람이 있기나 한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오늘날의 학문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질문’이다. 연구를 할 가치가 있다는 증거는 그 진실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잘 출판되었고 얼마나 많은 주목을 받았는가에 달려 있다.
진실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사고방식에 따르면, ‘진실’은 오히려 방해물이다.
진실을 따지다 보면 합의에 도달할 수 없고,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 교리가 거의 모든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학문 산업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타락이다.
그 결과, 현실과 동떨어지고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연구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받는다.
이를테면 이번 ‘소고기 연구’도 그렇다. 이 연구는 복잡한 자연 현상을 단순한 데이터 분석 틀로 축소해 컴퓨터 화면 속에서만 그럴듯하게 작동하도록 만든 전형적인 사례다.
지구의 온도를 측정하는 일은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지만, 방법은 수없이 다양하며, 새로운 측정기법이 나올 때마다 그 정확성을 거꾸로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가설적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런 불완전한 데이터 위에 ‘인과관계’라는 전제를 덧씌우고, 거기에 인간의 식습관 데이터를 얹는다면, 결국 ‘현대판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년 전, 한 물리학 노벨상 수상자가 연설을 했다. 그는 오늘날 가짜 과학(pseudoscience)이 폭발적으로 퍼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진정한 과학이 돈과 정치에 의해 훼손되고 있으며, 그 결과 ‘진실’이 아니라 ‘마케팅’이 과학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과학을 홍보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실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곧 진실입니다.
팔 수 있다면 그것이 진실이고, 팔리지 않으면 거짓이죠. 게다가 진실에 대한 인식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팔고 싶은데 팔리지 않는다면? 간단합니다. 바꾸면 됩니다. 진실도 바꿀 수 있고, 필요하다면 거짓된 관찰 결과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 우리 시대 가장 큰 과학적 사기극 중 하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강력한 발언을 남겼다.
“진정한 과학 연구를 한다면, 때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훌륭한 과학자라면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지금 다 논의할 시간은 없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진짜 기후 위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후 변화가 극단적인 기상 현상을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놀라운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관심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조차, 한 번 굳어진 정설(orthodoxy)과 선전(propaganda)의 장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역사 속 또 다른 사례를 보자. 바로 미국의 금주법(1920~1933)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정책이 근본주의 종교 세력과 밀주업자들의 이상한 동맹으로 탄생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결정적인 요소 하나를 빠뜨리고 있다. 바로 ‘과학자들’이다.
그렇다. 당시 거의 모든 과학계가 금주법을 지지했다. 단지 미국의학협회(AMA)뿐 아니라, 미국공중보건협회(APHA)와 그 학술지도 앞장섰다.
1921년, APHA의 창립자이자 당대의 존경받는 의사 스티븐 스미스는 이렇게 연설했다.
“범죄, 질병, 인간의 고통을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금주법을 엄격히 시행하여, 알코올을 오직 의사의 처방을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직 완전히 시행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술로 인해 발생하던 범죄, 광기, 폭력의 현저한 감소를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금주법이 철저히 집행된다면, 범죄율, 질병, 사망률이 놀라울 정도로 낮아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결과,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즐겨온 음주는 ‘인간 본성을 교정하기 위해’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무슨 일이 잘못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그 정책은 범죄와 질병, 사망률을 오히려 폭증시켰다.
밀주 제조와 조직폭력, 살인 사건이 급증했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무려 12년간 이를 지속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오늘날 금주법 시행은 정책 실패의 대표적 사례, 즉 ‘집단적 어리석음의 역사’로 평가된다.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이 있다. 그 모든 것은 ‘과학의 오만’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이었다.
당시의 믿음은 단순했다. 과학이 이미 사회 문제의 원인을 밝혀냈으니, 정치인들이 그것만 없애면 나라가 더 나은, 어쩌면 완벽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시절에도 많은 이들이 경고했다. “이 정책은 끔찍한 결과를 부를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리고 지금, 가짜 과학(fake science)의 문제는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해졌다.
만약 그 결과가 단순히 잘못된 이론이 논문에 남는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의 결과는 훨씬 파괴적이다. 산업문명의 붕괴,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건강과 삶의 급격한 퇴화—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일은 분명하다.
오류의 산업, 즉 왜곡된 과학이 만들어낸 거대한 구조를 멈추고, ‘진실’과 ‘이성’을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것이 인류 모두의 이익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제프리 A. 터커(Jeffrey A. Tucker)는 브라운스톤 연구소(Brownstone Institute)의 창립자이자 회장으로, 학술지와 일반 언론을 포함해 수천 편의 글을 발표한 저명한 사상가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5개 언어로 된 10권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그중 최신작은 ‘자유냐 봉쇄냐(Liberty or Lockdown)’입니다. 또한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사상을 정리한 편저 ‘The Best of Ludwig von Mises’의 편집자이기도 합니다. 현재 그는 에포크타임스에 경제 칼럼을 연재하며, 경제, 기술, 사회철학, 문화를 주제로 전 세계에서 활발히 강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기호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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