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현재’라는 중독의 해독제: 역사 공부

2025년 09월 12일 오전 7:18
새롭고 혁신적인 것들에 의해 역사는 종종 잊히지만, 지혜의 샘으로서의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 Shutterstock새롭고 혁신적인 것들에 의해 역사는 종종 잊히지만, 지혜의 샘으로서의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 Shutterstock

학창 시절에 한 번쯤은 ‘역사를 왜 배워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의문은 여전할 것이며 어쩌면 평생을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역사 연구는 병을 고치거나, 고층 빌딩을 짓거나, 더 나은 자동차를 만드는 등의 현실적인 일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런 데다 역사의 중요성을 거시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끝없이 이어지는 연대와 왕들의 이름은 머리만 지끈거리게 할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역사를 배우는 것이 과연 무슨 쓸모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를 옥죄는 ‘현재’라는 중독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다. 이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목적과 의도, 평온함을 지닌 채 세상과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사고 체계를 갖게 된다. 과거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인생’이라는 바다 위에서 방향타를 단단히 쥐고 있는 배와 같아서 ‘변화’라는 바람과 ‘여론’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곧장 항해할 수 있다.

현재와 과거

“‘현재’의 횡포(tyranny of the present)”란 말이 있다. 무슨 뜻일까? 역사학자 스티브 바이덴코프(Steve Weidenkopf)는 “현대 사회는 즉각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으며 과거를 거부하고 있다”라고 했다. 현실이란 사슬에 묶인 사람들은 현재 일어나는 일만 우선시하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소위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집어 던진다. 과거의 사건들은 경시되거나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바이덴코프의 지적처럼, 현재에 대한 이러한 강박은 “현대인이 만든 구조물 안에 자신을 가두어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시시각각 쏟아지는 뉴스는 종종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감정을 이리저리 흔든다.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에 휩쓸리다 보면 과거에 대한 기억은 물론, 과거로부터 배우려는 자기성찰에 대한 추구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최근 수십 년간 기술과 역사는 점점 더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Miljan Zivkovic | Shutterstock

현재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태도는 우리 자신과 세상의 진정한 상태를 파악하는 능력을 저해한다. 바이덴코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역사적 기억의 거부는 역사적 맥락의 부재를 초래하고, 이는 곧 인간사에 대한 관점의 결여로 이어진다”라면서 “현대인은 역사적 참조의 틀을 바탕으로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라고 했다.

그로 인한 결과는 심각할 것이다. 바이덴코프에 따르면, 협소한 관점은 성급한 판단을 낳고 이는 모든 문제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섣부른 비난은 “모든 말과 행동을 극단적으로 해석”하게 하기에 “현실에 중독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날카롭고 선동적인 비평”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소셜미디어를 하다 보면, 그런 비평이 쉽게 사람들의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과장된 내러티브 행태와 극단적인 사상이념의 독을 중화시키려면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해독을 돕는 것이 바로 역사이다. 역사적 지식에 깊게 뿌리내린 사람은 쉽게 조종당하지 않으며, 마치 산 정상에서 아래 계곡을 바라보듯, 전체 속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을 다른 일과 비교해 적절하게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다. 계곡의 바닥에서는 마치 어떤 유명인이 거인처럼 보이고 어떤 일이 곧 세상의 종말처럼 보이지만, 산 정상에 서서 전체 맥락 속에서 본다면 그 사람과 그 일은 본래 위치로 돌아가므로 우리는 덜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현실’에 중독된 사람들이 계곡에서 느끼는 불안과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역사적 소양을 갖춘 사람은 역사에 무지한 이보다 이념(이데올로기), 유명인, 정당, 사건, 전쟁 등을 더 잘 평가할 수 있으며, 급진적인 것에 더 잘 저항할 수 있다. 그들은 역사 전반에 걸쳐 반복돼 온 인류의 과잉 반응과 과격주의(극단주의)의 패턴을 알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혼란하게 한 그 일이 실제로 위험한지 위험하지 않은지 분별할 수 있으며, 집단 히스테리에도 쉽게 감염되지 않는다.

탄탄한 역사 교육은 시급하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분별하게 한다. Diego Grandi | Shutterstock

현실은 복잡해서 단순한 흑백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진리의 빛을 따르기 위해서는 미묘한 차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G.K. 체스터턴(G.K. Chesterton)은 “넘어지는 건 항상 간단해서 무한한 각도로 넘어질 수 있지만, 바로 서려면 단 하나의 각도뿐이다”라고 말했다. 진리 위에 바로 서려면, 분별하고, 미묘한 차이를 알아보며, 폭넓은 시야로 사고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역사는 우리를 도와, 세상을 형성하고 시간에 따라 변화를 일으키는 방대하고 복잡한 힘들을 우리 앞에 드러내 줄 것이다.

또한 역사는 한 집단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실제 삶의 복잡함을 잊기 시작할 때, 그리고 환원주의적 세계관(세상의 다양한 현상을 기본적인 하나의 원리/요인으로 설명하려는 견해)에 따라 행동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역사 교사 스티브 하임러(Steve Heimler)는 ‘우리 대 그들’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구도에 기반한 거짓되고 단순한 세계관을 퍼뜨리는 것은 독재자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편향된 사고는 설령 일부 진실을 안다 하더라도 왜곡되고 위험한 세계관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임러는 “우리 세상은 복잡미묘함 속에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며, 그러한 사고방식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역사 연구”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역사를 이해하면 겸손을 함양하게 된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진, 시대의 거대한 태피스트리(벽걸이 융단)를 보면서 지금 현재가 얼마나 짧은 순간인지를 깨닫는다. 세대는 세대와 이어진다. 2천 년 전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 썼듯이, ‘나뭇잎이 어떤 것은 바람에 실려 땅 위로 흩뿌려지는가 하면, 어떤 것은 봄이 오면 숲에서 싹을 틔우고 새잎이 자라니, 사람도 그와 같아서 한 세대가 오면 한 세대는 떠나가는 법’이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즉 시간이라는 지각판에 비하면 우리 인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느끼게 한다. 이 깨달음은 우리를 ‘지금’과 ‘자아’라는 사슬에서 해방시키고, 현재의 자극적인 뉴스 속보에서 시선을 거둬 더 영구적이고 안정적인 것들로 향하게 한다.

역사학자 샘 와인버그(Sam Wineburg)는 자신의 저서 ‘Historical Thinking and Other Unnatural Acts’(한국어판: 역사적 사고와 역사교육, 책과함께)에서 역사 공부와 겸손 함양 간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과거와 현재의 세상을 자신만의 심상으로 바라보지만, 역사에 기반한 성숙한 이해는 자신의 심상을 넘고, 자신의 짧은 생을 넘으며, 자신이 태어난 찰나를 넘어 더 넓은 인간의 역사로 나아가도록 가르친다. 라틴어로 ‘교육(ēducō)’이  ‘바깥으로 이끌어낸다’라는 뜻을 갖듯이, 역사야말로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를 교육한다. 세속의 모든 교육 과목 중에서, 인간이 알 수 있는 능력의 한계 앞에서 겸손하도록 가르치고, 역사의 광대함 앞에서 경외심을 갖도록 가르치는 최고의 과목이 바로 역사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감옥과 ‘자기 이익만 위하는 이기심’이라는 감옥에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그 하나의 관점으로만 본다. 만약 역사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게 된다면, 자기의 시야를 가리는 먼지를 털어내어 자신을 훨씬 더 큰 전체 중의 일부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과거의 불가사의, 인류가 아무리 연구하고 알아내려 노력했어도 어느 정도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채로 남아 있는 그 불가사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모르고 있음을 인정하게 한다. 우리는 더욱 겸허할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소크라테스가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것도 바로 자신이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 깨달음의 지혜를 증명한다.

* 임은혜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