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신비로운 네페르티티 흉상

2025년 05월 06일 오후 4:58

고대 이집트의 네페르티티 왕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인이자 스타일 아이콘이며 시대를 초월한 대중문화의 상징이다. 그녀의 삶은 일반 대중에게 깊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숙련된 학자들조차 혼란스럽게 만든다.

현대에 들어 네페르티티가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기원전 약 1351년에서 133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의 흉상이 발견돼 전시되면서부터다. 석회암과 회반죽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의 이야기는 주인공인 네페르티티의 전설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

‘아름다운 이가 오셨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네페르티티는 이집트 파라오 아멘호텝 4세의 제1 왕비였다. 그녀는 기원전 약 1370년경 왕족이 아닌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출생 연도와 부모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는 점은 이후 베일에 싸인 그녀의 삶의 서막을 알리는 단서가 됐다.

네페르티티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일부 문헌과 예술작품은 후계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됐고 그녀의 무덤이나 미라의 발견 또한 기대와 달리 번번이 무산됐다. 이로 인해 그녀의 삶에 대한 거의 모든 세부 사항은 추측과 상반된 이론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왕 부부와 ‘아텐’

가정 제단: 태양신 아텐의 광선을 받는 이집트 제18왕조의 국왕 아크나텐(아멘호텝), 네페르티티 부부와 세 딸. 33.5cm×39.4cm×3.5cm 크기의 석회암에 조각. 독일 베를린 국립박물관 내 이집트 박물관 및 파피루스 컬렉션.⎟Margarete Büsing / CC BY-SA 4.0

네페르티티와 그녀의 남편은 십 대 시절 결혼해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에서 권력을 가진 부부가 됐다. 두 사람은 여섯 명의 딸을 두었으며 그중 한 명은 후대에 유명해진 투탕카멘과 결혼했다. 투탕카멘은 아멘호텝과 다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추정된다(투탕카멘은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텝 시대 직후 통치했으며 기원전 약 1332~1323년 재위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왕이 돼 18세 전후 원인 모를 이유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무덤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발견돼 20세기 초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아멘호텝은 개혁적인 군주였으며 네페르티티는 그 개혁의 핵심 파트너였다. 그는 왕실을 테베에서 현재 이집트 아마르나 인근의 ‘아텐의 지평선(Akhetaten)’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옮겼다. 더불어 그는 다신교 중심의 이집트 종교 체계를 폐지하고 태양 원반 아텐(Aten)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종교를 세웠다. 이는 일종의 초기 일신교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다. 아멘호텝은 자신의 이름을 ‘아텐에게 기쁨을 주는 자’란 뜻의 아크나텐(Akhenaten)으로 바꿨다.

독일 베를린 노이예스 박물관에 소장된 석회암 조각 ‘가정 제단’은 아크나텐, 네페르티티, 그리고 세 명의 딸이 태양신 아텐의 광선 아래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왕실이 새 수도로 옮긴 직후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네페르티티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네페르티티는 여러 면에서 남편과 동등하게 묘사돼 있다. 그녀의 모습은 아크나텐과 같은 크기로 표현됐고 이름 또한 왕의 이름과 함께 왕실 카르투슈(royal cartouche, 고대 이집트에서 왕의 이름을 상형문자로 새겨 넣은 타원형 테두리 문양) 안에 기록돼 있다. 태양신 아텐의 광선은 생명을 뜻하는 ‘앙크(ankh)’ 기호를 두 사람의 코앞에 내밀며 부부 모두 신성한 생명의 수혜자임을 시사한다.

새로운 종교에서 왕실 부부와 태양신 아텐은 하나의 신성한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 가정 제단에는 정치적 상징도 담겨 있다. 네페르티티의 의자에는 파피루스와 연꽃을 묶는 매듭 문양이 장식돼 있는데 이는 고대 이집트의 상·하 이집트 통일을 상징한다.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3100년경 상·하 이집트가 통일돼 제1왕조가 시작됐으나 이후에도 끊임없이 갈등을 빚어왔다.

아이들의 머리가 길게 묘사된 것은 태양 원반이 지닌 생명력의 상징이다. 실제로 아크나텐이 이주한 이후 아마르나 시대의 예술 양식은 기존 고대 이집트 예술과 크게 다르다. 이전의 예술이 정적이고 형식적인 표현에 치우쳐 있었다면 아마르나 양식은 길게 늘어진 인물 묘사, 즉 가느다란 목과 도드라진 광대뼈 같은 특징과 더불어 자연주의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또한 이 시기의 예술은 가족 간의 애정 어린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아크나텐과 네페르티티가 손을 맞잡거나 여왕이 자녀를 다정하게 안고 있는 모습 등에서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 소장된 친밀한 조각 작품 ‘네페르티티와 딸’이 그 대표적인 예다.

‘네페르티티와 딸’. 기원전 약 1352~1336년 크기 22.2cm×3.3cm×44.5cm의 석회암에 안료가 칠해짐. 찰스 에드윈 윌버 기금. 미국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소장.⎟Brooklyn Museum

이 작품은 아크나텐의 종교 개혁이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아크나텐이 사망한 후 후계자들은 기존 전통을 복원하고 아크나텐이 세운 도시 아케트아텐(현 아마르나)을 폐기하면서 그와 제1 왕비였던 네페르티티를 역사에서 지우려 했다. 이 부조에는 네페르티티의 얼굴과 명문(銘文)에 의도적으로 훼손된 흔적이 남아 있다.

‘아크나텐과 네페르티티’. 이집트 제18왕조. 크기 22.2cm×12.2cm×9.6cm의 석회암 조각.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 고대 유물 부서 소장.⎟Public Domain

왕실 부부 사이의 관계 또한 오랫동안 학계의 관심 대상이 돼 왔다. 아크나텐 재위 12년 이후 네페르티티의 이름이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녀가 사망했거나 딸만 낳은 탓에 미움을 샀거나 아텐 신앙을 버렸다는 등의 다양한 가설이 제기돼 왔다. 그러나 2012년 초 아마르나 북쪽에서 발견된 암벽 비문이 이 이론들에 의문을 던졌다. 아크나텐 통치 16년 차에 해당하는 때 작성된 이 비문에는 네페르티티의 이름이 등장하며 그녀를 ‘위대한 왕비’로 칭하고 있다.

이 발견으로 인해 많은 전문가들은 네페르티티가 남편보다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부 이집트 학자들은 그녀가 공동 섭정으로 활동했거나 심지어 단독 통치자로 왕위를 계승했을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그녀의 무덤과 미라가 발견된다면 이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푸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의 무덤이 ‘왕들의 계곡’(파라오들의 무덤이 집중된 지역) 서쪽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투탕카멘 무덤 안에 숨겨진 비밀의 방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보르카르트 팀, ‘금광을 찾다’

네페르티티 흉상 초기 사진. 1912년 발견 후 촬영.⎟독일 동양학회/CC BY-SA 4.0)

1907년 독일의 이집트학자이자 건축·역사학자인 루트비히 보르카르트는 독일 동양학회(the German Oriental Society)에 고대 도시 아케트아텐(아랍어로는 텔 엘-아마르나)에서의 대규모 발굴을 제안했다. 이 장기 프로젝트는 베를린 출신의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 제임스 시몬이 승인했다. 발굴 비용 전액을 후원한 시몬은 독일동양학회 창립자이자 예술 후원자였다.

시몬은 자신의 수입 중 4분의 1을 자선 활동에 사용하며 ‘베를린이 가졌던 가장 관대한 후원자’로 칭송받았다. 그는 벨리니, 만테냐, 렘브란트와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베를린 국립미술관에 기증했고 네페르티티 흉상을 포함한 값진 고대 이집트 유물들도 기증했다. 그러나 유대인인 그의 이름은 나치 정권하에서 사회적 공헌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졌다. 그의 중요한 역할은 최근에야 밝혀졌고 베를린 국립박물관은 그의 이름을 딴 새로운 전시실을 개관했다.

이집트 고대유물위원회는 보르카르트와 그의 팀에 발굴 허가를 내줬고 그들은 1911년 겨울부터 1912년까지 작업을 시작했다. 초기 발견물로는 주택, 별장, 그리고 다른 복합 건물들이 있었다. 모든 지역은 번호가 매겨졌다. 모든 발견물은 스케치와 일기 형식으로 기록됐다. 가장 중요한 보물은 ‘P 47.2’에서 발견됐다.

1912년 12월 5일 ‘P 47.2’가 아마도 예술가의 작업장이었을 것임이 명확해졌고 그것은 조각가 투트모세의 작업실로 판명됐다. 그다음 날 보르카르트의 팀은 말 그대로 ‘금광’을 발견했다. 그들은 놀랍도록 생동감 있고 색감이 뛰어나며 잘 보존된 네페르티티 흉상을 발견했다. 보르카르트의 유명한 발굴 일기에는 이렇게 감동적으로 적혀 있다. “색이 마치 방금 칠해진 듯하다. 작업은 완전히 예외적이다. 묘사는 무의미하다. 반드시 봐야 한다.”

‘아크나텐 왕의 흉상’. 이집트 제18왕조 57.2cm×45.1cm×34.9cm 크기의 석회암. 독일 베를린 국립박물관 내 이집트 박물관 및 파피루스 컬렉션.⎟Sandra Steiß/CC BY-SA 4.0

투트모세의 작업장은 믿을 수 없는 예술 작품들의 보고였다. 네페르티티의 조각상이 있는 같은 방에서는 아크나텐의 흉상도 발견됐다. 불행히도 이 생동감 있는 색조각상은 네페르티티 흉상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파라오의 얼굴은 의도적으로 부서져 있었다. 원래의 모습은 웅장했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페인트와 금박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흉상은 고전 예술세계에서 많이 발견됐지만 이집트 예술에서는 인물 전체를 묘사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기에 드물게 나타나는 형태였다. 두 흉상 모두 왕궁이나 신전에서 왕과 왕비를 숭배하는 데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주요 발견은 ‘아크나텐과 그의 가족의 석판’이었다. 발굴이 끝날 무렵 독일 팀과 이집트 사이에 발견물 분배가 이뤄졌다. 이집트는 석판을 요청했다. 현재 그것은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독일 팀은 왕실 부부의 흉상과 여타 발견물들을 갖고 나가는 것이 허용됐다.

‘아크나텐과 그의 가족의 석판’. 이집트 제18왕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소장⎟Gérard Ducher/CC BY-SA 2.5

이 결정의 윤리적 측면과 법적 정당성은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독일 측의 몫은 발굴 조건에 따라 발굴 비용을 투자한 제임스 시몬의 소유가 됐다. 1920년 시몬은 아마르나 발굴에서 나온 모든 유물, 네페르티티 흉상을 포함한 것들을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곳은 현재 베를린 국립 박물관의 일부인 노이에스 박물관(Neues Museum)으로 불리며 시몬이 기증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팝 컬처 현상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 기원전 약 1351~1334년. 석회암에 채색. 회반죽,흑색 밀랍, 수정 사용. 49cm×24.4cm×34.9cm 크기. 독일 베를린 국립박물관 이집트 박물관 및 파피루스 컬렉션.⎟Sandra Steiß / CC BY-SA 4.0

지난 16년 동안 네페르티티 흉상은 베를린 국립박물관 내 북쪽에 위치한 노이에스 박물관의 ‘노스 돔 룸(North Dome Room)’에 마련된 전용 전시실에서 극적인 방식으로 전시돼 왔다. 높이 약 49cm에 무게는 약 20kg에 달하는 이 흉상은 1924년 처음 일반에 공개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가까운 지역은 물론 멀리서 온 방문객들까지 이 흉상의 미학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아한 백조 같은 목선과 도드라진 광대뼈, 자신감 넘치는 시선, 섬세한 목 근육 등 사실적인 디테일과 대칭적 아름다움은 곧바로 아이콘이 됐다. 이 네페르티티의 이미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 견줄 만한 상징으로 떠올랐고 미용 칼럼, 패션 디자인, 광고, 심지어 미키 마우스 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에 등장했다.

이 흉상이 끼친 스타일적 영향 중 가장 크고도 지속적인 것은 흑연으로 강조된 아몬드형 눈매였다. 이집트식 고양이 눈 화장은 흉상이 전시된 이후 수많은 여성이 모방했다. 레바논계 영국인 저널리스트이자 편집자인 자흐라 한키르는 자신의 저서 ‘아이라이너: 문화의 역사(Eyeliner: A Cultural History)’(2023년)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든 요소를 종합해 볼 때 진한 검은 선으로 강조된 여왕의 눈매는 그 매혹적인 면모가 비할 데가 없다. 선들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눈가에서 만나 그녀의 시그니처인 고양이 눈꼬리를 형성한다. 순전히 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아이라인은 네페르티티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창을 더욱 또렷하고 넓게 만들어주며 신선하면서도 관능적인 인상을 준다.”

네페르티티의 두상을 보여주는 석회암 조각. 이집트 아마르나 출토. 영국 런던의 피트리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소장.⎟Osama Shukir Muhammed Amin / CC BY-SA 4.0

이 흉상의 넓은 칼라(collar)를 모방한 의상이나 평평한 왕관 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모자와 헤어 스타일은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

고대 이집트 미술은 대부분 감정 표현이 결여돼 있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암시하는 네페르티티의 침착한 표정은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 특히 이 흉상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발견됐으며 손상이 왼쪽 눈의 결손과 귀, 왕관 일부 파손에 국한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조각가는 얼굴을 매우 정밀하게 묘사했는데, 이를테면 눈썹을 교차 음영 기법으로 한 올 한 올 표현한 부분에서 그 섬세함을 확인할 수 있다. 사용된 천연 안료에는 탄소흑, 녹색 프릿(glass frit), 적색 황토, 황색 오르피멘트(비소 광물), 그리고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인공 색소인 ‘이집트 블루’가 포함된다. 왕관은 금으로 된 띠로 둘러져 있으며 이집트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코브라 모양의 신성한 상징 ‘우라에우스(uraeus)’로 장식돼 있다.

남아 있는 오른쪽 눈의 홍채와 동공은 검은색으로 염색한 밀랍으로 만들어졌으며 각막 역할을 하는 얇고 매끄럽게 연마된 수정 조각이 그 위를 덮고 있다. 반면 왼쪽 눈에는 이에 해당하는 상감 장식이 없다. 보르카르트와 그의 팀은 철저한 조사를 했음에도 발굴 현장에서 왼쪽 눈을 찾지 못했다. 흉상의 왼쪽 눈구멍 자체에도 원래 상감이 있었던 흔적도 전혀 없다. 이는 왜 한쪽 눈만 제작됐는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학계의 합의된 설명은 아직 없다.

베를린 국립박물관은 네페르티티 흉상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이미지를 차용한 방식들의 다양성과 이 흉상이 고고학적 유물에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변화한 과정은 그 보편적 중요성을 증명한다. 이 모든 활용과는 별개로 네페르티티 흉상은 스스로 말한다. 이 작품은 진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기적처럼, 이 흉상은 세월의 풍화를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박경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