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8일.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한국을 포함한 6개 나라의 외교 수장과 수석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들이 모인 주요 목적은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하는 것.
북한 대표로 참석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북한의 모든 핵 물질을 신고하는 조건으로 한미 합동군사 훈련 중단을 요구했고, 이에 미국 대표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자신의 집무실에 있는 잔을 예로 들며 북한 측 대표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5일간의 회의를 거쳐 ‘2.13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고 핵시설을 불능화하면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고 중유 100만 톤을 지원하겠다.’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예로 들었던 ‘잔’은 주한 미국 대사로 재직할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물한 ‘계영배’였습니다.
국제 협상 테이블에서 숨은 역할을 한 ‘계영배’. 이 잔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조태환 씨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계영배’ 재현에 성공한 도공입니다.
[조태환 | 도예가 ] :
“함안 박물관에 들렀는데 거기에서 책을 보다 보니까 계영배 자료가 책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보는 순간에 ‘아, 내가 한번 만들어 봐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기능이 굉장히 처음에 와닿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좀 만들어 봐야 되겠다.”
‘경계할 계(戒)’, ‘찰 영(盈)’, ‘잔 배(杯)’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잔.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조태환 도공이 재현한 ‘계영배’에 술을 따라봤습니다. 잔에 술이 가득 차는 순간 모두 밑으로 새어버립니다. 딱 70%가 차 있을 때만 술이 그대로 있죠. 일반 잔과 다른, 계영배의 독특한 기능입니다.
[조태환 | 도예가 ] :
“옛날에는 가운데 봉이 있었는데 제가 그것을 옆으로 눌러서 개량을 했어요. (봉이) 서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똑같은 원리예요. 근데 그 기능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죠.”
기둥 밑에 뚫린 구멍이 잔의 7할쯤 되는 부분에서 ‘U’자처럼 휘어져 바깥쪽 구멍까지 연결되는데, 술이 차면 그 압력으로 술이 새는 원리입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사이펀 원리라고 합니다.
[조태환 | 도예가 ] :
“맨 아랫 부분에 구멍이 있어요. 그 구멍을 따라서 올라가서 뒤를 보면 구멍이 연결이 돼있거든요. 그래서 밑으로 해서 이 밑의 구멍으로 빠지게 돼있어요.”
사이펀은 공기압의 차이로 액체를 이동시키는 구부러진 관입니다. 대기압의 작용으로 사이펀은 물을 끌어올리고, 관에 도달한 물은 중력으로 인해 아래로 떨어지는 원리입니다.
‘계영배’는 ‘가득’을 향해 치닫는 욕심을 경계하고, ‘적당히’를 지킬 줄 아는 절제의 지혜로 옛 선조들이 곁에 두었던 잔입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이 극히 드뭅니다. 조 도공은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풀어 계영배를 만들었고, 실패를 거듭하며 3년 만에 완성품을 내놓았습니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사람들에게 계영배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조태환 | 도예가 ] :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내가 욕심을 부리면 내가 가지고 있던 것까지 다 잃는다’ 그런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제가 공직에 있는 분들한테 선물도 꽤 많이 했어요. 그냥 선물한 것도 많아요. 그런데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걸 좋아서 그렇게 받아들이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내가 무슨 뭐 부정부패나 저지르는 사람이야’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는 설명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자기 마음 다스리는 데 쓰는 메시지가 됐으면 좋죠.”
계영배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전해내려오는 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 군주가 올바로 처신하도록 경계하기 위해 사용했던 ‘기기(欹器)’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기기’는 물이 가득 차면 뒤집어지고, 절반 정도 차면 반듯하게 놓입니다.
‘기기’에 대한 이야기는 ‘순자(荀子)’의 유좌(宥坐)’편에도 나옵니다. 공자가 노(魯)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방문하였을 때 이 그릇을 보았고, 공자도 이를 본받아 항상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습니다.
“가득 채우고도 기울지 않는 것은 없다.”
서양에도 계영배와 비슷한 ‘피타고라스의 컵’이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만들었는데, 이 컵도 물을 가득 채우면 밑으로 새어버립니다. 물이 부족한 사모스 섬에서 물을 아끼기 위해 발명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실학자 하백원과 도공 우명옥이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에게 전해졌고, 이 잔을 늘 곁에 두고 자신의 욕심을 다스리는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임상옥은 이 문장을 자신이 사용하던 계영배(戒盈杯) 밑바닥에 새겨두고 과욕을 부리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넘치는 것을 경계하는 잔. 계영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자기성찰의 의미를 담은 잔입니다.
옛 선조들은 이 원리 안에서 인생의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차지 않는 여분(餘分)을 즐길 수 있는 부족함의 지혜’를요.
‘가득 차면 넘치고, 가득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NTD뉴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