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람은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소크라테스의 변명

로레인 페리에(Lorraine Ferrier)
2024년 01월 06일 오전 9:58 업데이트: 2024년 02월 05일 오전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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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일생을 철학에 관한 연구와 토론에 전념하다 기원전 399년 5월 7일 생을 마감했다.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기보다는 담론의 기회로 삼아 평생 그랬듯이 자신의 가치를 계속 지켜나갔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석공이자 조각가인 아버지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다. 40세 무렵엔 교육자로 변모해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많은 청년들에게 정의・절제・용기 등을 가르쳤다. 그의 교육에 큰 감화를 받은 청년들은 좋은 학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서양 철학의 기초를 세운 플라톤도 그중 한 명이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당시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30인 정부를 이끌고 공포정치를 펼친 크리티아스(기원전 460~기원전 403)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았다결국 그는 ‘청년을 부패시키고 아테네의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기소당했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선고됐다.

최후의 연설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며 항소가 아닌 연설을 준비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변론)’에 이 마지막 연설을 기록했다.

소크라테스는 노인으로서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를 억압하고 적대시했던 사람들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됐으나,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의 시간은 재판으로 앞당겨졌다.

그러나 그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가치에 반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죽음을 피하기보다 타락을 피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타락은 죽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그를 비난했던 이들은 불의에 복종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분노하며 그를 더욱 비난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훨씬 심각한 형벌이 내려질 것이라 말했다. 자신을 고발한 이들은 스스로 저지른 악행과 불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타인의 문제를 관찰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재판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평생 신의 인도를 받아왔으며, 악이 나타날 때면 종종 신이 나에게 경고했다”는 그는 “이번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은 신의 경고를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사형 선고를 축복으로 여기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죽음에 대하여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의 세부, 자크 루이 다비드.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공개 도메인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소멸 또는 영혼의 이동, 두 가지 형태일 거라고 추측했다. 이 중 소멸을 최상의 수면 상태에 비유하며 최고로 여겼다. 영혼의 이동은 지하 세계로 가서 진실한 심판자의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르페우스, 호메로스 같은 존경스러운 인물들과 대화할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믿었다그러므로 어느 쪽이든 죽음은 기쁜 일이라 여겼다.

그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기분도 언급했다. 그는 “선한 사람에게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악한 마음이 없다. 신은 선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게 일어난 일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선한 사람은 신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결백을 밝힌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사형에 처하게 만든 이들에 대한 연민을 드러냈다. 그는 세속적인 삶이 끝나면 각자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며, 신성한 정의의 저울이 판단할 것이라 믿었다.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다

부당한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도주할 수도 있었지만, 태연히 독배를 들이마시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철학과 신에 대한 존경과 믿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가 생전 추구한 가치와 신성은 지금까지 남아 철학적 가치를 전하고 있다.

로레인 페리에는 영국 런던 교외에 거주하며 에포크타임스에 미술과 장인 정신에 대해 글을 씁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