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26년 박해 속 파룬궁…생존과 탈출, 그리고 기억하기

2025년 07월 21일 오후 10:53
(왼쪽부터) 파룬궁(法輪功) 수련자 시바오화, 류쯔위, 헌터 왕, 허즈웨이가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 박해에서 벗어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Larry Dye/The Epoch Times(왼쪽부터) 파룬궁(法輪功) 수련자 시바오화, 류쯔위, 헌터 왕, 허즈웨이가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 박해에서 벗어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Larry Dye/The Epoch Times

시바오화는 눈을 떴다. 그녀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녀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척추가 골절됐고 갈비뼈 몇 개가 부러져 폐로 들어갔다. 또 손목이 부러지고 탈구됐으며 쇄골이 보라색으로 부어올랐다.

시바오화의 딸 친릴리는 시바오화가 3층 발코니에서 떨어진 뒤 혼수상태로 6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바오화는 그 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고 더구나 그런 일을 일부러 할 생각조차 없었다.

점차 일부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때는 2019년이었다. 일주일 전, 딸과 사위가 그녀를 찾아왔고 그들은 누군가의 미행을 받고 있었다.

경찰이 들이닥쳐 사위를 체포해 갔다. 딸은 간신히 문을 잠그고 경찰을 설득하려 애썼다. 시바오화는 뒷방으로 달려가 서둘러 프린터와 이미 출력된 파룬궁(法輪功) 자료들을 포장해 숨기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다음 기억은 없었다.

딸인 친릴리가 뒷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찰이 막아섰고 어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경찰이 어머니를 발코니에서 밀어 떨어뜨린 것일까? 오늘날까지도 가족은 그 진실을 알지 못한다.

시바오화의 이야기는 오늘날 중국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탄압 속에 떨어진 하나의 물방울에 불과하다. 중국은 반체제 서적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수년간 수감될 수 있는 전체주의 감시국가다. 수감자들은 종종 죽음 직전까지 고문을 당하거나 아예 살해된 뒤 장기(臟器)가 최고가를 부르는 이에게 팔려나가기도 한다.

시바오화는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녀는 병원에서 탈출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직 정신이 또렷하진 않았지만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시바오화는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파룬궁 신앙 단체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사법적 기구이자 게슈타포를 방불케 하는 조직인 610판공실 소속 공안들이 그녀의 병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의사들에게도 감시를 지시한 상태였다.

가족은 610판공실 요원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시바오화를 들쳐업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2025년 7월 14일 미국 뉴욕에서 촬영에 응한 시바오화와 딸 친릴리. 시바오화는 중국 공산당이 1999년 파룬궁 탄압을 시작한 이후 다섯 차례 체포된 바 있다. ⎢ Larry Dye/The Epoch Times

그들은 심하게 골절상을 입은 시바오화를 차에 태워 다른 도시에 있는 딸의 집으로 데려갔다. 두 달 만에 그녀는 거의 완전히 회복했으며 이를 자신의 신앙과, 태극권과 비슷한 파룬궁의 운동을 꾸준히 해온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이때쯤 시바오화는 도피자 신세에 익숙해져 있었다. 중국 공산당(CCP)이 1999년 파룬궁 탄압을 시작한 이후 시바오화는 다섯 차례나 체포된 바 있다.

에포크타임스는 중국 내에서 26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 영적 단체에 대한 탄압의 날인 7월 20일을 앞두고 시바오화와 다른 파룬궁 수련자들을 인터뷰했다.

정권은 법을 따르지 않는다

“이 탄압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시바오화를 비롯해 이번 기사 인터뷰에 응한 여러 이들은 말했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단지 태극권과 비슷한 수련을 하며 ‘진선인(眞善忍, 진실·자비·인내)’의 원칙를 지키며 살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江澤民)은 7000만 명에서 1억 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이 수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원 수를 넘어서는 숫자의 수련자를 ‘근절’하라고 명령했다.

1999년 7월 20일, 법을 준수하는 수천만 명의 중국 국민들이 하룻밤 사이에 국가의 적이 됐다. 대규모 체포와 임의 구금, 고문에 관한 보고가 잇따랐다. 수년 후, 여러 독립 조사 결과는 중국 내 급성장하는 장기 이식 산업을 위해 정권이 파룬궁 수련자들을 ‘맞춤형 장기 공급원’으로 이용해 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99년 박해가 시작되기 전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파룬궁 수련자들이 연공을 하고 있다. 박해 이전에는 약 7000만에서 1억 명의 중국인이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었다. ⎜ Minghui

2009년 시바오화 가족은 파룬궁과 그에 대한 박해를 알리는 자료를 인쇄해 다른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전달했고, 이들은 다시 그것을 배포했다. 시바오화는 중국 당국의 감시 능력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인쇄 활동은 당국에 발각되고 말았다. 2016년 1월 어느 날, 경찰이 시바오화 가족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당시 시바오화는 집에 없었지만 그녀의 딸인 친릴리는 집에 있었다. 친릴리는 생후 1년 된 아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됐다.

그 사건이 있기 얼마 전, 시바오화는 또 다른 파룬궁 수련자인 친구와 함께 자료를 배포하던 중 경찰의 미행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자료를 숨기기 위해 또 다른 수련자의 집으로 급히 들어갔고 경찰은 곧바로 뒤쫓아 도착했다. 경찰은 문을 부수기 위해 도끼까지 들고 있었다.

“파룬궁에 관해서라면 중국 공산당은 법도 지키지 않는다. 마음대로 사람을 잡아가고 감옥에 보낸다.” 시바오화는 말했다. “도둑떼와 다를 게 없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시바오화와 그녀의 동행은 재빨리 창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헛간의 기와지붕을 기어오른 뒤 인근 이웃의 도움을 받아 약 3m 높이의 마당 벽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웃은 벽 반대편에 불안정하게 의자 두 개를 쌓아 올려 도와주었다. 잠시 후 경찰들이 이들의 갑작스러운 실종에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그 이웃의 창고에 몸을 숨겼고 시바오화는 추위와 공포로 이가 덜덜 떨렸지만 새벽 4시까지 기다린 끝에 마침내 도망칠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시바오화는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8년 동안 그녀는 6개 도시를 옮겨 다니며 무려 19번이나 거처를 바꾸었다. 감시카메라가 덜 설치된 곳이나 시골 지역을 찾아다녔다.

경찰에 발각될까 두려워 신분증을 제시할 수 없었던 시바오화는 주로 소규모 아파트나 시골의 단층집을 몰래 임대해 생활했다. 정부는 그녀의 연금을 끊었고 시바오화는 적은 생활비로 버티기 위해 극도로 소비를 줄였다. 시금치는 값이 싸 몇 달 동안 그것만 먹었다. 때로는 시골의 비닐하우스를 찾아가 농부들이 버린 채소를 주워오기도 했다. 난방이 거의 되지 않는 겨울은 특히 혹독했지만 석탄 사는 비용조차 아깝게 여겨 이를 감수했다.

(왼쪽) 2000년 1월 10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파룬궁 수련자를 체포하는 중국 경찰관 두 명. (오른쪽)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파룬궁 수련자를 연행하는 중국 경찰. 보관용 자료사진. ⎢ Chien-Min Chung/AP Photo, Minghui

그녀는 해외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며 중국 당국의 인터넷 검열을 우회해 딸에게 간헐적으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보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딸이 시바오화를 찾아오려 했지만 여러 대비책을 마련하더라도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엄마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늘 갈등했다.” 친릴리는 이들의 삶을 “유격대 같은 생활”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바오화는 두려움 속에 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신념을 굳건히 지킨 그녀는 파룬궁 자료를 계속 제작하고 배포했다.

시바오화처럼 살아가는 파룬궁 수련자들은 수가 많지만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에포크타임스는 비슷한 경험을 한 여러 명의 수련자들을 인터뷰했다.

존재가 지워진 사람들

헌터 왕은 2005년 파룬궁 수련을 이유로 구금된 후 10년 넘게 도피 생활을 이어 가야 했다. 당시 경찰은 그의 신분증을 압수했고 그로 인해 그는 사실상 중국 사회의 대부분으로부터 단절됐다.

그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분증 없이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고속철이 확산되면서 신분증 확인 절차는 더욱 엄격해졌고 결국 버스를 타기 위해서도 신분증이 필요해졌다. 지하철을 탈 때는 경찰이 주로 배치되는 시간대를 피해 다녔으며 항상 주변에 경찰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는 부모를 통해 신분증 사본을 구했고 그 덕분에 임대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본은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여행을 위해 그는 신분증 검사가 느슨한 소규모 버스 정류장을 사전에 탐색하곤 했다. 2015년 헌터 왕은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다섯 번이나 옮겨야 했다. 신분증을 재발급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국은 그를 도망자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9일 미국 뉴욕에서 촬영한 전(前) 최고기술책임자(CTO) 헌터 왕. 헌터 왕은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구금된 후 10년 넘게 자주 거처를 옮겨야 했으며 2018년 중국을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 Larry Dye/The Epoch Times

헌터 왕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때마다 익명성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산하 조직인 지역주민위원회에서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와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헌터 왕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또다시 거처를 옮기는 것이었다.

함께 구금됐던 친구들 중 몇몇은 이후 3년에서 8년형을 선고받았다. 헌터 왕은 당시 좋은 수입을 올리며 가정을 꾸리고 있었지만 끊임없는 위험 속에 살고 있었다.

“언제든지 그들은 당신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 헌터 왕은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성이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자 그는 면접을 포기하고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2016년 무렵 그는 출장이 잦은 직업을 얻게 됐고 더는 도피만으로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해 위험을 무릅쓰고 신분증 재발급을 신청했다. 그러나 그 직후 경찰의 괴롭힘이 다시 시작됐다.

결국 헌터 왕은 2018년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중국을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용기

파룬궁 관련 자료를 소지하거나 배포하는 것만으로도 중국 공산당에게는 처벌 대상이 되지만 박해의 실상을 담은 사진, 영상, 공식 문서 등을 해외로 밀반출하는 행위는 특히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2004년, 전 세계는 한 장의 충격적인 사진에 주목했다. 파룬궁 수련으로 인해 구금된 뒤 랴오닝성 룽산 노동교양소에서 고문당한 가오룽룽의 얼굴이었다. 당시 그녀는 36세였다. 그해 5월 교도관 탕위바오가 전기봉으로 그녀의 얼굴을 7시간 넘게 지져 화상을 입히고 흉측하게 만들었다.

이 사진은 중국 내에서 극비리에 촬영돼 해외로 전해졌고 중국의 인권 상황에 국제사회의 비판이 쏟아지는 계기가 됐다.

1994년 중국 랴오닝성에서 고모 가오룽룽과 함께한 류쯔위. 2004년 룽산 노동교양소에서 한 교도관이 가오룽룽의 얼굴을 전기봉으로 7시간 넘게 지져 심하게 화상과 훼손을 입혔다. 그녀는 2005년 6월 경찰 구금 중 사망했다. ⎥ Courtesy of Liu Ziyu

가오룽룽의 조카 류쯔위는 당시 16세였다. 그녀는 2004년 8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병실 안팎에는 경찰들이 삼엄하게 배치돼 있었다.

고모 가오룽룽을 본 순간 류쯔위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그렇게 마른 사람은 처음 봤다.” 류쯔위는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뼈에 피부 한 겹만 덮인 것 같았다.”

어릴 적 류쯔위는 고모를 무척 따랐다. 그녀는 가오룽룽에 대해 “섬세하고 인내심 강하며, 조용하지만 지적이었고,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해 임했다”고 회상했다. 가오룽룽은 조카의 롤모델이었다.

하지만 병실 속 고모는 온몸에 각종 의료용 관이 연결돼 있었고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가오룽룽은 눈을 떠 조카를 바라보았다. 류쯔위는 고모에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날 밤 병원에서 하룻밤을 지낸 류쯔위는 다음 날 아침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학교에 갔다. 그것이 고모를 본 마지막 순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가오룽룽의 두 언니는 작은 카메라를 몰래 반입해 왔다. 가오룽룽은 자신의 상처를 사진으로 남겨 중국 밖으로 알리는 데 동의했다. 세 사람 모두 이 행동이 당국의 보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 당국의 인터넷 검열을 우회하는 도구를 사용해 이 사진들을 파룬궁 박해 기록 전문 사이트인 밍후이(Minghui.org)에 전송했다.

2005년 7월 20일 호주 시드니 차이나타운 인근에서 파룬궁 지지자들이 고문 재현 장면이 담긴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 Greg Wood/AFP/Getty Images

가오룽룽은 다른 파룬궁 수련자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탈출했지만 몇 달 후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2005년 6월 그녀는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류쯔위와 그녀의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다.

당국은 시신을 화장할 것을 강요하며 가족에게 서류에 서명하라고 압박했다. 협박과 감옥형 위협에 시달리던 류쯔위의 어머니와 또 다른 고모는 집을 떠나 도망쳐야 했다. 당시 다른 도시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감히 돌아오지 못했다.

17세의 류쯔위는 혼자 남겨져 몇 달 동안 라면으로 연명했다.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그녀는 때때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끝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을 떠올렸다.

가오룽룽의 고문 사실을 폭로한 연관성 때문에 류쯔위는 베이징의 여행 금지 명단에 올랐다.

2007년 그녀는 캐나다 유학 기회를 얻었지만 공항에서 ‘국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출국이 차단됐다. 그때는 이미 중국 내 학교를 떠난 상태였기에 그녀의 고등 교육은 사실상 좌절됐다.

여러 차례 실패 끝에 류쯔위는 5년 후 미국 뉴욕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37세인 류쯔위는 가오룽룽이 희생된 때와 같은 나이가 됐다. 그녀는 여러 차례 고모 처지였다면 자신은 어떻게 했을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 깊이 고민해 왔다.

2025년 7월 14일 미국 뉴욕에서 촬영에 응한 류쯔위. 가오룽룽의 조카인 류쯔위는 고모의 고문 사실 폭로와 관련해 중국 당국의 여행 금지 명단에 올랐으나 2012년 미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 Larry Dye/The Epoch Times

매번 그녀의 대답은 같았다.

“파룬궁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진선인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류쯔위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면 “악의 탄압에 굴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내 가족을 파괴할 수 있고, 내 미래를 무너뜨릴 수 있으며, 내 삶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하나 빼앗을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신념이다.”

별을 바라보며

공산 정권 아래 살아가는 수련자들에게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많은 경우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허즈웨이는 2001년 파룬궁 수련자 대규모 체포 물결 속에서 집을 떠나야 했다. 그 후 12년 동안 당시(2001년) 13살이었던 딸 펑샤오신을 거의 볼 수 없었다.

2002년 중국 설 즈음, 그녀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도청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즈웨이의 어머니와 딸 모두 체포됐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체포 소식을 접한 허즈웨이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로 지새웠다.

“그 아이는 너무 어렸다.” 그녀는 말했다. “어머니로서 가장 필요한 순간에 옆에 있어 줄 수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몇 년 후 허즈웨이는 집으로 돌아가려 시도했지만 다시 체포돼 1년간 감옥에 수감됐다.

2025년 7월 14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촬영된 허즈웨이. 박해 기간 중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12년간 딸을 볼 수 없었다. ⎜ The Epoch Times

허즈웨이는 의자에 묶인 채 모든 활동을 카메라로 감시당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찰은 그녀가 가족을 버렸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한 건 누구인가?” 그녀는 반문했다. “엄마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2012년 허즈웨이는 다시 체포돼 노동교양소에 수감됐다. 파룬궁 수련자인 그녀의 편지는 교도관들이 가로챘지만 같은 방에 있던 한 동료 수감자가 몰래 딸의 편지를 전해준 적이 있었다.

그 편지에는 산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엄마와 그 위에 빛나는 별들이 그려져 있었다. 별들은 희망을 의미한다.

“딸이 별을 기억하며 희망의 마음을 잃지 말라고 했다.” 허즈웨이는 말했다. “그 편지는 큰 힘이 됐다.”

허즈웨이가 감옥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 ⎢ Courtesy of Feng Xiaoxin

도움을 기도하며

이번 취재에서 만난 파룬궁 수련자들은 체포나 구금 위기를 가까스로 피한 여러 사례를 들려줬다. 상황이 너무나도 기적적으로 일어난 경우가 많아 그들은 이를 ‘신의 개입 덕분’이라고 믿었다.

앞서 언급한 시바오화도 그런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다.

어느 날 그녀는 친구 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다. 그 친구 역시 파룬궁 수련자였다. 어느 밤, 친구가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시바오화는 밤 11시가 되자 불안해졌다. 그녀는 급히 두 사람이 가진 모든 파룬궁 관련 자료를 지하 창고에 숨겼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체포된 상태였다. 다음 날, 시바오화가 외출을 하고 돌아왔을 때 경찰이 아파트를 급습해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다행히 친구는 곧 풀려났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시바오화가 살던 도시는 한 달간 봉쇄 조치를 겪었다. 신분증 없이 검문소를 통과해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시바오화가 머물던 친구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있어 두 사람이 먹을 충분한 음식을 구할 수 있었다.

2020년 2월 28일 중국 베이징의 한 지역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서, 그곳을 찾은 남성의 신분을 확인하는 지역 주민위원회 소속 인물.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시바오화는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으면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어 거주 중인 건물을 나올 수 없었다. 신분증을 제시하면 경찰이 그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Kevin Frayer/Getty Images

2024년, 시바오화 가족은 고향 도시의 공항에서는 출국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남쪽의 다른 성으로 차를 몰아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했다.

“출국할 수 없다. 당신들, 자신들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나?” 경찰은 이렇게 말하며 가족의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그리고 610판공실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딸과 사위가 경찰을 설득하려 애쓰는 동안 시바오화는 묵묵히 기도했다. 1시간 동안의 억류와 심문 끝에 경찰은 마침내 풀어주었다. 가족은 비행기 문이 닫히기 직전에 간신히 탑승할 수 있었다.

음력 설 연휴 다섯째 날, 시바오화의 가족은 중국을 떠나 마침내 미국으로 향하며 자유를 얻었다.

탈출

해외로 나가는 것은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박해의 목격자로 간주하며, 해외에서 중국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소위 블랙리스트라 불리는 출국 제한 명단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불분명하다.일정 시간이 지나면 명단에서 빠진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국가 단위 명단 외에 지역별 명단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또한 데이터베이스가 여러 차례 개편되면서 일부 정보가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으며 단순한 관료적 무질서로 인해 누락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출국이 불가능한 사람들 중 일부는 절박한 선택을 한다. 국경을 넘어 미얀마로 밀입국한 뒤 다시 태국으로 가는 것이다.

허즈웨이는 2013년 감옥에서 풀려난 후 박해를 피하기 위해 4개월 동안 거처를 네 번 옮겼다. 결국, 그녀는 딸과 함께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신분도 없고, 언제든지 체포당할 수 있는 삶—더이상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왼쪽)허즈웨이와 딸 펑샤오신이 태국에서 촬영된 날짜 미상의 사진. (오른쪽)태국 방콕에 있는 유엔난민기구(UNHCR) 사무소 앞의 허즈웨이. 날짜 미상. ⎟ Courtesy of Feng Xiaoxin

그들은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현금을 바지 안쪽 특수 주머니에 숨겨 넣고 라오스와 미얀마 국경에 접한 도시 징훙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곳까지는 약 1600km에 달하는 거리였다. 머무는 곳은 ‘블랙호텔’이라 불리는 미등록 숙소였고 한 호텔 직원이 경찰에 신고하려 해 위기를 넘긴 적도 있었다. 이후 세 명의 가이드 도움을 받아 6일 동안 두 개의 국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들은 밤에 비가 내리는 미끄러운 산길을 휴대전화 불빛 하나에 의지해 헤치고 내려가야 했다. 이후 한 가이드가 뗏목으로 강을 건넜고, 그들은 네 명 정원인 승용차에 10여 명과 함께 비좁게 몸을 실었다.

마지막에는 관광버스 화장실 벽에 뚫린 정사각형 구멍으로 기어들어 숨겨진 밀실로 안내받았다. 그 안에는 이미 10~20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구멍이 닫히는 순간, 주변은 완전히 암흑이 됐고 구멍 덮개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만이 어렴풋이 공간을 밝혀주었다.

“끔찍했다.” 허즈웨이의 딸 펑샤오신은 그렇게 회상했다.

허즈웨이는 키가 152cm에 불과해 낮은 천장에 머리를 숙이고 겨우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매우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펑샤오신의 머리는 누군가의 엉덩이에 닿아 있었으며 다른 사람의 머리는 그녀의 발 위에 있었다. 에어컨이 켜져 있었지만 밀폐된 공간의 공기는 숨 막힐 정도로 탁하고 불쾌했다. 펑샤오신 옆에 앉은 태국인 남녀 두 명은 이동 중에 모두 구토를 했다.

버스는 수시로 정차했다. 일반 승객이 타거나 국경 수비대가 검문을 위해 승차하기도 했다. 숨죽인 채, 그들은 버스 위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새벽 무렵, 약 10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비로소 일반 좌석 쪽으로 나올 수 있었고 그렇게 방콕에 도착했다.

그 순간, 펑샤오신은 마치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드디어 끝났구나.”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 날 그들은 공원에 가서 파룬궁 연공을 했다. 작은 새들이 발치에서 깡충깡충 뛰는 모습을 바라보며 허즈웨이는 마치 세상이 자유롭게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저 작은 새들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2025년 7월 17일 미국 워싱턴에서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박해로 사망한 수련자들을 추모하는 촛불집회에 참여하기에 앞서 연공을 하고 있다. 파룬궁(法輪功)을 해외에서는 파룬따파라고도 지칭한다. ⎟ Samira Bouaou/The Epoch Times

*이정현 기자가 이 기사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