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퇴진설 휩싸인 시진핑, 혁명원로 2세 그룹과의 갈등이 기폭제

2025년 05월 28일 오후 1:30

중국군 내부의 대규모 숙청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과 군사위 부주석(군 서열 2위)이자 인민해방군 상장(上將·대장)인 장유샤(張又俠) 간의 갈등이 재조명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공산당 원로 자제를 뜻하는 ‘홍얼다이(紅二代)’ 출신이지만, 최근 장유샤가 시진핑 측근들을 정리하면서 반(反)시진핑 세력을 주도하고 있다는 게 중화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집권 초기, ‘시진핑 친위대’를 자처했던 장유샤가 시진핑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데에는 시진핑이 정권 안정을 위해 반부패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다가 훙얼다이 세력까지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해외 시사평론가 차이션쿤(蔡慎坤)은 지난 25일 소셜미디어 1인 방송에서 “시진핑이 20차 당 대회 이후 군 내 반부패 운동을 벌였는데 그 첫 번째 목표가 장유샤였다”고 밝혔다.

시진핑이 장유샤 본인을 직접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최측근인 리상푸(李尚福) 전 국방부장과 로켓군·전략지원부대의 핵심 장성들이 대거 숙청하면서 장유샤에게 극심한 모욕감과 압박을 줬다는 것이다.

장유샤는 훙얼다이 소속이자 인민해방군 현역 장성 가운데 중국-베트남 전쟁(중월전쟁)에 참전한 몇 안 되는 실전 경험자다. 그는 1979년 윈난성 제14집단군 중대장 신분으로 중월전쟁에 참전해 최일선에서 지휘했으며, 1984년에는 베트남과 싸운 라오산 전투에도 참전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해방군 내부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장유샤는 자신이 지지하고 보호해 준 시진핑으로부터 측근 인사들이 숙청당하자, 한동안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 심리적 충격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권력에 취한 시진핑…장유샤까지 숙청하려다 역풍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변화의 조짐이 포착됐다. 군 감찰당국인 중앙군사위 기율검사위원회의 반부패 숙청이 시진핑 측근 세력인 제31군을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장유샤가 심리적 충격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는 신호로 해석됐다.

제31군은 시진핑이 오랜 공직 생활을 하며 기반을 닦은 푸젠성에 주둔했다. 시진핑의 최측근인 중앙군사위 위원 먀오화 역시 제31군 출신이었으나, 지난해 11월 “심각한 기율 위반”으로 직무가 정지돼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먀오화는 올해 5월 국회의원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자격도 박탈당하며 정치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군 내부에서 ‘개인 파벌’을 조직한 혐의가 추가된 것으로 알려졌다.

먀오화와 함께 군사위 부주석(군 서열 3위) 허웨이둥(何衛東)은 올해 들어 두 달 이상 공개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일각에서는 감찰당국의 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는 사망설이 확산되고 있다.

인민해방군 최고 지도부인 중앙군사위 총 6명의 위원(1명의 주석, 2명의 부주석 포함) 중 시진핑 자신을 제외한 시진핑 측근 2명(먀오화, 허웨이둥)이 모두 불미스러운 의혹에 휘말린 상태다. 현재 군사위 내 장유샤 파벌은 장유샤 본인을 포함해 류전리, 장셩민 등 3명이 모두 건재하다. 단순히 구성원 숫자만으로도 1 대 3으로 시진핑이 밀리는 형세다.

차이션쿤은 “시진핑이 집권 초기에 일부 장성들을 쉽게 몰아낸 것은 이들이 일반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장유샤를 정리하려 하자 군 내부 훙얼다이 세력이 거세게 반발했다”고 전했다.

그는 장유샤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반격에 나서기로 한 데에는 “장유샤의 부친 장중쉰(張宗遜) 밑에서 복무했던 지휘관들이 여전히 해방군 내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옛 보스(장중쉰)의 아들(장유샤)이 굴욕당하는 것을 목격한 장성들 사이에 반시진핑 기류가 격화됐다는 것이다.

시사평론가 리린이(李林一)는 “장유샤는 시진핑이 넘어야 할 마지막 훙얼다이 인물이었다”며 장유샤의 벽을 넘지 못하면서 시진핑의 리더십에 위기가 급격히 증가했다고 평가했다.

시진핑, 덩샤오핑 추종하는 ‘개혁파’ 원로들과도 마찰

시진핑은 장유샤를 대표로 한 군부 세력뿐만 아니라, 훙얼다이 중에서도 개혁 성향 인사들과도 대립했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은 부총리까지 지낸 인물로 중국 8대 혁명 원로 중 하나다. 그의 아들인 시진핑은 명실상부한 태자당(太子黨·고위층 자제 그룹)으로 원래 훙얼다이와 가까웠다.

훙얼다이는 크게 마오쩌둥(毛澤東)식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강하게 지지하는 좌파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추종하는 우파로 나뉘어 있다.

이 가운데, 우파(개혁파)는 2016년 시진핑이 중국의 대표적인 개혁 성향 잡지 ‘염황춘추’를 강제로 폐간하면서 완전히 단절됐다. 1991년 창간된 염황춘추는 정치 개혁과 입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편집 노선을 지켜왔으며, 중국 공산당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를 이어왔다.

서슬 퍼런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개혁파였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아들인 후더와(胡德華)가 ‘염황춘추’ 부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이 잡지가 훙얼다이들의 비호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후더화는 2013년 2월 베이징의 한 지식인 모임에 참석해 시진핑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언론 봉쇄’ 명령을 받았다. 2015년 5월에는 ‘염황춘추’에 사전검열을 받지 않고 기사를 냈다는 이유로 서면경고가 발송됐다.

이후 ‘염황춘추’는 사장과 부사장, 편집장이 교체되고 사회주의 강경파로 필진이 바뀌는 등 혼란을 겪었고 편집 방향성이 공산주의 체제 옹호로 완전히 전환됐다. 잡지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지만 사실상 폐간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시진핑이 품은 불씨…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에 대한 원한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스스로도 ‘재앙’으로 시인한 문화대혁명(1966~1976)의 직접적인 피해자다. 원로 세력에 대한 그의 정치적 반감은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시진핑이 아홉 살이었을 때 아버지 시중쉰이 ‘반당분자’로 몰려 투옥되고, 가족 전체가 박해를 받았다. 시진핑 본인도 13세에 문화대혁명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중앙당교에 감금됐다. 시진핑에 대한 비판 집회에서는 어머니 치신(齊心)마저 아들을 비난하는 구호를 따라 외쳐야 했다.

이 시기 다른 훙얼다이들은 군 복무나 유학 기회를 잡은 반면, 시진핑은 산간 오지로 보내져(하방·下放) 노동을 했다. 대학 진학조차 ‘노동자·농민·군인 출신(공농병학생)’으로 추천을 받아 간신히 이뤄냈다.

학력에 상관없이 무시험으로 대학 입학이 가능했던 ‘공농병학생’은 다른 학생들로부터 천대를 받았다. 초등학교 학력만으로 입학한 이들로 인해 대학 교육은 제대로 이뤄질 수도 없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시중쉰의 복귀를 허용했으나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광둥성 간부로 발령을 내렸다. 이처럼 아버지 세대부터 겪은 수모와 고통은 시진핑이 덩샤오핑 시대의 훙얼다이 전반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는 게 중화권의 중론이다.

시진핑이 공산당 총서기직에 오른 후인 2017년, 중국 당국은 덩샤오핑 손녀사위 우샤오후이(吳小暉) 안방보험 회장을 체포해 중형을 선고했다.

2018년 5월 베이징대 교정에는 시진핑의 개인숭배 정책과 임기제한 폐지를 비판한 24장의 대자보가 붙었는데, 이 대자보를 쓴 70대 남성 판리친(樊立勤)은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鄧樸方)과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 당시 중국 장애인협회 명예주석. 2017.10.24 | GREG BAKER/AFP/Getty Images/연합

 

같은 해 9월에는 당시 중국 장애인연합회 명예주석었던 덩푸팡이 “우리 주제를 알아야 한다”며 부친(덩샤오핑)의 정책인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를 벗어난 시진핑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뒤늦게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시진핑과 덩샤오핑 일가 사이의 갈등을 극명히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시진핑, 독재 체제 구축…훙얼다이들 권력에서 밀려나

시진핑은 권력을 잡게 되자, 중국 공산당 특유의 집단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1인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이와 함께, 훙얼다이들도 정치 무대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덩푸팡은 2023년을 끝으로 장애인연합회 주석직에서 물러났고, 덩샤오핑의 손자 덩줘디(鄧卓棣) 역시 공직에서 은퇴했다. 이로써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와 후진타오(胡錦濤) 전 총서기 시절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던 덩씨 일가는 정치권에서 완전히 퇴출됐다.

시진핑의 또 다른 타깃은 류샤오치(劉少奇) 전 부주석의 아들 류위안(劉源) 상장이다. 류위안은 시진핑 집권 초반 군 반부패를 주도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2015년 정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시진핑이 류위안의 존재감을 부담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류야저우(劉亞洲)는 훙얼다이 중 가장 혹독한 숙청을 당한 사례다. 그는 공군 상장으로 국방대학 정치위원을 지냈으나 2021년 실종된 뒤, 2023년 4월 홍콩 ‘성도일보’를 통해 숙청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류야저우는 군 장성들의 고른 지지를 받은 인물로 시진핑의 대만 침공 계획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사례는 훙얼다이 출신의 부동산개발업체 회장 런즈창(任志強)이다. 그는 2020년 시진핑을 ‘벌거벗은 광대’에 비유하는 글을 발표한 뒤 부패 혐의로 징역 18년을 선고받았다.

왕치산(王岐山) 전 부주석도 시진핑의 반부패 선봉장을 활약했으나, 사실상 ‘명예직’으로 밀려났고 그의 측근들도 줄줄이 낙마했다.

시진핑 퇴진 원하는 훙얼다이 세력…장유샤를 구심점으로

훙얼다이 정치는 덩샤오핑 시절의 유산이다. 그러나 시진핑 집권 시기를 거치면서 훙얼다이 시대도 종말을 고하고 있다.

시진핑은 권력을 강화한 후 훙얼다이들을 철저히 견재했다. 이로 인해 성부급(省部級·성장 및 장관급) 이상 고위직에서 훙얼다이들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후진타오 전 총서기 아들 후하이펑(胡海峰),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의 아들 원윈쑹(溫雲松),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의 아들 자오더(趙德) 등도 권력에서 멀어지거나 탄압을 받았다.

SCMP에 따르면, 현재 시진핑 체제에서 장유샤는 훙얼다이 세력의 대표주자다. 시진핑의 독재적 행태에 불만을 품은 훙얼다이들은 집단 반발하며 장유샤를 구심점으로 모이고 있다. 즉 시진핑이 장유사를 건드린 것도 훙얼다이 세력의 완전한 퇴출을 위한 조치라는 게 차이션쿤의 해석이다.

하지만 장유샤 퇴출은 뜻밖에도 군 내부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장중쉰은 인민해방군 창설에 기여한 인물 중 하나이며, 마오쩌둥의 심복이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은 장유샤에게 군 내부에서의 높은 위상과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했다.

시진핑은 그 대신 허웨이둥과 먀오화를 중용해 군을 장악하려 했으나, 두 사람은 장유샤 측의 반격을 받아 숙청당하면서 오히려 시진핑의 군내 기반만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식에서 장유샤는 시진핑을 등지고 돌아보지 않는 모습이 포착되며, 양측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차이션쿤은 최근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이 당 원로와 퇴역 장성들을 대거 초대한 확대회의를 열고 시진핑의 거취 문제를 논의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자리에는 장유샤와 후진타오 등이 참석해 시진핑 체제를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과 덩샤오핑 일가, 훙얼다이와의 갈등은 양측 사이의 원한 관계 외에도 개혁개방 노선을 거부하고 ‘중국특색 사회주의’ 노선을 내세운 시진핑의 정책도 작용하고 있다. 시진핑은 퇴진설이 확산된 후에도 여전히 “붉은 강산을 지켜야 한다”며 마오쩌둥 시절 구호를 외치고 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로 인해, 국민이 선거나 의회에서 지도자를 교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 지도부(중앙정치국과 원로 층) 내부에서 의견이 모이면 집단 지도라는 형식을 통해 시진핑을 퇴진시키는 시나리오는 가능하다. 실제로 과거 화궈펑(華國鋒) 주석은 1980년대 초반 이 같은 방식으로 권좌에서 밀려난 바 있다.

이 때문에 차이션쿤은 당 지도부가 시진핑 퇴진을 전제로 전면 퇴진이냐, 부분 퇴진이냐를 논의하고 있다며 오는 8월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4중전회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지난 22일 전했다.

호주 시드니 공대의 중국 학자 펑충이(馮崇義) 교수는 “중국 공산당 체제는 훙얼다이 세력을 약화시키며 자신도 타격을 입은 시진핑과 함께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 이 기사는 에포크타임스 중국어판 닝하이중 기자가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