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경제학자 된 ‘대만의 배신자’ 린이푸 전 세계은행 부행장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 진먼섬서 헤엄쳐 중국 망명...

최창근
2023년 12월 18일 오후 5:02 업데이트: 2024년 01월 05일 오후 11:23
TextSize
Print

중국 경제 전망에 ‘적색등’이 들어왔다. 지난날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미국에 이어 G2 반열에 올랐던 중국은 오늘날 저성장‧고실업의 늪에 빠졌다. 이른바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속에서 “중국은 여전히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며 낙관론을 펴는 경제학자가 있다. 어조에서는 늘 자신감이 넘친다. 지난 10월, 동아시아경제학회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그는 한국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 경제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중국은 2019년부터 2035년까지 연평균 경제 성장률 8%, 2036년부터 2050년까지는 6%를 달성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중국 인구도 고령화가 시작되고 있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22.6%에 불과하다. 중국이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양질의 성장을 달성한다면 중국 1인당 GDP는 2049년에는 미국의 절반에 도달할 것이다.” 그는 “신경제 분야에서 중국은 차선을 바꾸고 추월해 세계를 선도할 기회가 있다.”고도 했다.

중국 경제 국사…역대 총리 브레인

일견 무모해 보이는 중국 경제 낙관론을 펴는 장본인은 린이푸(林毅夫) 중국 베이징대 신구조경제학연구원 원장이다. 린이푸는 세계적인 석학(碩學)이다. 중국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 부소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부행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임위원 겸 경제위원회 부주임 등을 역임했다. 학술 업적을 인정받아 영국과학원 외국인 학술위원으로 위촉되는 명예를 안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홍콩 저명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룽지(朱鎔基)부터 리커창(李克强)에 이르기까지 전직 국무원 총리들의 수석 경제참모로서 중국 경제 고도성장에도 일조했다. 이런 린이푸에게는 ‘중국의 경제 국사(國師)’ 별칭이 붙는다. 중국 경제에 대한 그의 발언은 전 세계가 주목한다.

린이푸는중국을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경제 분야 석학이지만 조국 대만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호평과 악평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그의 인생 역정은 드라마틱하다.

린이푸는 1952년 대만 북동부 이란(宜蘭)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린정이(林正義)’였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어머니는 과일 행상, 세탁 일 등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학업에 열중하여 두각을 나타낸 린정이는 대만 최고학부 국립대만대 농업공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시절, 린정이는 학업과 더불어 학생운동에도 열심이었다. 대학 1학년이던 1971년 10월 중화민국(대만)은 국제연합(UN) 결의안 제2758호에 의거하여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했던 UN에서 퇴출됐다. 대학 학생회 1학년 대표였던 그는 단식투쟁을 주장했다. 중화민국을 축출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 대한 항의 시위도 주도했다. 대학 신입생 린정이는 이른바 ‘애국청년’이었다.

1971년 겨울, 린정이는 당시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던 동계 군사훈련 참가를 위해 대만 중부 타이중(臺中) 청궁링(成功嶺) 훈련소에 입소했다. 5주 훈련 중 그는 상관들에게 “군에 투신하고 싶다.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시 국립대만대를 비롯한 명문대 학생들은 졸업 후 미국 등 해외 유학길에 올라 입신양명을 도모하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와중에 린정이의 입대 결정은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라이밍탕(賴名湯) 참모총장(합참의장 해당)은 그를 ‘애국 청년’이라 상찬하며 군 입대를 반겼다.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 행정원 국방부장 겸 중국반공구국단(中國青年救國團) 주임은 우수청년상(優秀青年獎章)을 수여하면서 격려했다. 이공계 엘리트였던 린정이는 국방부 산하 이공계 사관학교인 중정이공학원(中正理工學院)을 마다하고 정규 육군사관학교 편입학을 라이밍창 참모총장에게 청원했다.

중화민국(대만) ’10대 걸출 인재상’을 수상하는 초급 장교 시절 린이푸(우). 가운데는 라이밍탕 대만 국방부 참모총장. | udn.

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환영 속에 가오슝(高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린정이는 1975년 제44기를 차석으로 졸업했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대만 정부는 ’10대 걸출 인재상’ 수여로 보답했다.

중화민국 애국 청년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

임관 후 육군사관학교 학생중대 소대장 복무 중 국립정치대 중문학과 출신 천원잉(陳雲英)과 결혼했다. 대만 정부는 애국심 넘치는 수재 린정이를 국가 차원의 엘리트로 양성하고자 했다. 1972년부터 행정원장(국무총리 해당)으로 재임하며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장징궈가 특별히 그를 주목했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징궈는 중화민국(대만)의 국가 이념에 충실한 린정이의 장래를 위해 왕청(王昇) 국방부 총정지작전부 주임에게 지시하여 대학원에 진학하도록 했다. 린정이는 1978년 국립정치대 경영대학원(企業管理研究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린정이가 대학원을 졸업한 그해 12월, 대만의 최고 중요 우방국 미국이 이듬해 1월 1일부로 ‘단교’한다는 통보를 했다. 이듬해인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와 동시에 미국-대만 단교가 이뤄졌다. 미중 수교를 기해 중국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명의로 ‘대만 동포에게 고함(告臺灣同胞書)’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에서 양안 평화통일, 교류 협력을 제안했다. 동시에 1958년 8‧23 포격전 이후 간헐적으로 지속되던 진먼(金門)섬 포격도 중지했다. 대만해협 양안 해빙의 시작이었다.

1979년 육군 상위(대위) 린정이는 중국 본토에서 약 2km 떨어진 진먼섬에 배치됐다. 진먼방위사령부 제284사단 예하 마산(馬山)중대 중대장 보직이었다. 마산중대는 대만 방위의 최일선, 피안(彼岸)의 중국 본토를 생생히 관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린정이는 경계 업무와 더불어 ‘안보관광지’ 견학 안내원 역할을 했다. 전선 시찰 요인과 외국인 방문객 대상의 브리핑이었다. 충성심과 능력을 입증받은 엘리트 초급 장교만이 중대장이 될 수 있었다.

대만의 실권자 장징궈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엘리트 장교 린정이는 1979년 5월, 야음을 틈타 헤엄쳐 중국 본토로 향했다. 신분 증명서를 비롯하여 진먼방위사령부 작전계획 등 군사기밀을 가지고 갔다. 약 2km 바다를 건너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의 인민해방군 해안 초소에 도착한 린정이는 ‘망명’을 요청했다.

린정이가 사라진 후에도 대만 군 당국은 그의 도주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대대적인 수색을 펼쳤지만 행적이 묘연했다. ‘실종’으로 잠정 결론짓고 가족에게 47만 5000 신대만달러(약 2억원)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중국은 ‘귀순용사’ 린정이를 환영했다. 그는 단순 초급장교가 아닌 대만 정부 차원에서 육성하던 차세대 주자였다. 중국에 정착한 린정이는 린이푸(林毅夫)로 개명했다. 증자(曾子)의 “인을 실현하는 일이 자신의 책임인데 그 어찌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평생토록 분투하여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어찌 멀다하겠는가?”에서 취한 이름이었다. 린이푸는 중화민국 국부 쑨원(孫文)의 유훈(遺訓)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장차 중화를 진흥시킬 책임을 가진 제군들은 자신의 어깨에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구절이었다. 장래가 촉망되던 린이푸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한 이유가 설명되는 말이기도 하다. 린이푸는 ‘대중화(大中華)’ 관점에서 ‘대만섬’이 아닌 ‘중국 대륙’에서 민족을 향한 자신의 이상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푸(毅夫)’, 즉 ‘남자로서 꿋꿋하게 살아가겠다.’는 이름으로 바꾼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헤엄쳐 망명한 최전방 최정예부대 중대장

중국에서 린이푸는 베이징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86년 명문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예일대에서 박사후 연구과정을 이수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변화하는 중국 경제 연구에 천착했다.

린이푸는 미국 대학의 정년 보장 교수직 청빙(請聘)을 마다하고 귀국했고 이도 화제가 됐다. 귀국 후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 부소장, 베이징대 중국경제연구센터 센터장 등을 역임하며 중국 정부 경제 브레인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중국 개혁개방 정책을 경제학 이론으로 뒷받침하는 논문을 국제 학계에 발표했다. 이후 베이징대 경제학부 교수로 임용됐고 후안강(胡鞍鋼) 칭화대 교수와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 반열에 올랐다. 국제적 명성도 나날이 높아졌고 개발도상국 출신 최초로 세계은행 부행장에 올랐다.

세계은행 부행장 재직 시 린이푸. | udn.

정부가 육성하던 최전방 부대 엘리트 장교가 군사 기밀을 가지고 중국으로 망명한 사건의 충격파는 대만 정부를 강타했다. 진먼방위사령부는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쳤지만 린이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다 린이푸의 망명 사실을 인지했지만 대만 정부는 이를 ‘대외비’로 했다. 대만 정부 위신, 군 장병 사기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대만 정부가 1979년 진먼섬에서 ‘실종’된 린(林)모 중대장의 정체가 세계적인 경제학자 린이푸라는 사실을 공식 확인한 것은 2002년이다. 그해 국제학술회의 참석차 미국에 있던 린이푸는 아버지가 위독하여 임종이 머지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린이푸는 자신이 대만군 중대장 린정이임을 밝히고 대만 방문을 요청했다.

해당 소식이 알려진 후 대만 정부는 대책 회의를 열었다. 대중국 문제 전담부처 행정원 대륙위원회, 국방부, 법무부, 국가안전국 등 관계기관이 논의하는 과정에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귀국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과 “탈영죄로 입국 시 사법처리가 불가피 하다.”는 의견이 맞섰다. 법무부는 “탈영죄를 적용해도 형사 소추 기한이 지나 처벌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당시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이던 차이잉원 현 총통은 “군 장병 사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입국 허가는 신중해야 한다.”며 맞섰다. 결과적으로 린이푸의 대만 입경은 불허됐고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2012년 세계은행 부행장 임기 만료를 앞둔 린이푸는 다시 한번 귀향(歸鄕)을 희망했다. 그는 “대만으로 돌아가 조상 제사를 지내고 남은 여생을 고향에서 보낼 수 있게 허용해 달라.”고 대만 정부에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수차례 “대만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했지만 이뤄지지 못하는 형편이다.

린이푸는 불가사의한 자신의 망명 동기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한 적은 없다. 당시 대만은 고도 경제 성장의 결실을 향유하며 개발도상국의 선두주자로 도약하던 때였고 중국은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등 재앙적인 공산주의 실험이 종식되고 1978년 복권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다만 “대륙인을 돕는 것이 바로 대만인을 돕는 것이다. 대륙이 발전할 경우 첫 번째 수혜 대상은 대만이다.”라고 강조해 온 린이푸의 평소 발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1952년생으로 ‘고희(古稀)’를 넘긴 망향객 린이푸의 귀향은 요원해 보인다. ‘대만의 배신자’에서 ‘세계적 석학’이 된 린이푸는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