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윤석열 대통령이 김규현 국가정보원장과 권춘택 1차장, 김수연 2차장을 경질했다. 지난 6월부터 있었던 ‘인사파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차원이라는 설명이 많다. 이후 국정원은 홍장원 신임 1차장이 원장 대행을 맡아 이끌어가고 있다. 국정원 안팎의 목소리를 들으면 ‘인사파동’은 현재진행형이다. 문제는 그 ‘파동’ 속에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중국과 북한, 국내 좌파 연합의 ‘인지전’에 맞서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질된 김규현 원장, ‘내부 좌파 척결’과 ‘국정원 정상화’가 목표였다
김규현 전 국정원장을 헐뜯는 목소리가 많지만 그 내막을 들어 보면 다르다. 김 전 원장과 우파 직원들이 북한과 중국에 우호적인 세력들을 배제하려 했고, 여기에 지난 정부에서 북한과 중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승승장구했던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한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에 차기 국정원장을 노린 사람들까지 개입하면서 국정원에 대한 윤 대통령의 불신이 커졌고, 결국 ‘인사파동’ 책임을 수뇌부 전체에 묻게 됐다는 것이다.
국정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에 따르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인사파동’ 내용 가운데는 걸러 들어야 할 대목이 많다. 특히 지난 6월 면직된 K 방첩센터장과 당시 1급 진급 대상자들 관련 내용이 그렇다. 김규현 원장은 취임 후 좌파 직원과 기회주의 직원은 승진에서 배제한다는 인사 원칙을 세웠다. 김 원장이 ‘반공애국’을 워낙에 강조하다보니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도 우파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직원들이 우선 진급 대상자가 됐고, 그러다보니 인재풀이 협소해졌다는 것이다.
김 원장의 인사원칙이 실행될 경우 문재인 정부 시절 북한과 중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행동했던 직원들은 승진은커녕 자칫 면직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들이 생각해낸 것은 윤석열 대통령과 직통이 가능한 사람들을 앞세워 김규현 체제를 흔드는 것이었다.
첫 번째 대상은 조상준 기조실장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검사 출신 조상준 기조실장은 지난해 10월 인사 때 김규현 원장과 충돌했다. 그런데 그가 부임한 뒤 주변에 몰린 사람들이 좌파 성향이었다. 조 실장이 김 원장과의 의견 충돌로 국정원을 떠나자 이번에는 권춘택 1차장 옆으로 몰려갔다. 권 차장은 김 원장이 부임한 뒤부터 ‘조직보호 논리’를 앞세워 친북·친중 성향 직원들을 배제하는 데 반대했다고 한다.
권 차장과 그 주변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과 인연이 닿는 대통령실 관계자들과 접촉해 “김용현 원장의 인사 때문에 국정원 내부 난맥상이 심각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김용현 원장과 그가 발탁한 직원들이 인사전횡을 일삼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국정원 내부 인사정보를 제공했다는 것이 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의 이야기다. 결국 지난 6월 소위 ‘국정원 인사파동’으로 김 원장이 천거하려 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면직당했다. 김 원장의 조직 장악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친북·친중 세력의 발호를 막으려는 김 원장과 국정원 내 우파 직원들의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언론 하마평에 오르는 차기 국정원장 후보…대통령실 관계자 아니면 군 출신
김규현 전 원장이 권춘택 전 1차장과 그 주변인에 대한 감찰을 통해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를 보고하려던 찰나 윤 대통령은 김 전 원장은 물론 권춘택 전 1차장과 김수연 전 2차장까지 경질했다. 언론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통령실은 연내 후임 국정원장 인사를 한다는 방침 속에 적임자를 찾고 있다”면서 ‘차기 국정원장 후보’의 하마평을 쏟아내고 있다.
이에 거론되는 사람은 김용현 대통령실 경호처장(육사 38기), 조태용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김승연 국정원장 특보(육사 38기), 변영태 전 해외공작국장, 김옥채 주요코하마 총영사(육사 38기), 유성옥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 이사장, 김숙 전 국정원 1차장,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이다.
그런데 하마평에 오른 사람 가운데 국정원 출신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 ‘투철한 애국심과 반공정신’이 특징인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김용현 경호처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고교 선배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국정원장으로 가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 김태효 안보실 1차장에 대해서는 대통령실 안팎에서 이런저런 말이 많다. 현재 국가안보실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김승연 특보나 김옥채 주요코하마 총영사는 김용현 경호처장과 육사 동기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내부 인사 가운데 과거 대북심리전을 이끌었던 유성옥 INSS 이사장의 경우 하마평이 나오자마자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 매우 강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이 밖에 권영세 전 통일부 장관이나 이종섭 전 국방장관, 김용현 경호처장 등 ‘군 출신 인사’를 차기 국정원장 후보로 보는 목소리가 ‘연합뉴스’를 필두로 여러 언론에서 나오고 있다. 외교가 출신인 김용현 전 원장이 국정원 내부 조직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으므로 군 출신이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이런 여러 가지 관측과 주장 가운데 내년 총선에서 중국과 북한, 국내 좌파의 연합 전선에 대응할 수 있는 인물 이야기는 전혀 없다.
◇한미일 공동 대응한다는 ‘역정보 공작’…국정원 직원들 “우리가 맡아야”
지난 8월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은 ‘위협 세력’의 ‘해외정보조작(역정보 공작)’에 공동 대응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후 국가안보실은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도출한 결론이 ‘역사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합의에 따른 조직 신설에 대한 계획은 밝히지 않았다. 지난 9월 ‘한국일보’는 이런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당시 미일은 ‘역정보 대응’이 매우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임을 공감했는데 우리 측은 ‘가짜뉴스 대응’으로 오해했다고 신문은 주장했다. 신문은 그러면서 “미국과 일본은 각각 국무부와 외무성 산하에 ‘역정보 대응센터’를 만들었고 유럽연합(EU) 등은 국방부 산하에 기구가 있다”며 우리나라도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FKI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에포크타임스’ 한글판 창간 20주년 세미나에서 만난 ‘초한전’의 저자 이지용 계명대 교수는 내년 총선 때 북한은 물론 중국까지 국내 좌파와 손을 잡고 ‘인지전’을 벌일 수 있다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북한과 중국의 ‘인지전’에 제대로 맞서는 역할은 국정원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물론 중국까지 국내 좌파진영과 연합해 ‘인지전’ ‘역정보 공작’을 벌이려는 조짐이 있는 가운데 국내외를 넘나들며 수사하고 대응하고 예방할 수 있는 조직은 국정원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대공수사권 폐지 반대와 같은 맥락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은 김규현 전 원장은 물러났지만 그가 주장했던 ‘내부 좌파 척결’과 ‘국정원 정상화’에는 모두 동의했다. 특히 지난 정부에서 ‘반공’과 ‘애국’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좌천되거나 한직으로 밀려난 직원들은 차기 국정원장이 국정원을 북한에만 국한하지 않고 적대적 외세, 특히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는 조직으로 만들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초한전’에 대한 현재 국정원의 대응이 법률 미비는 물론 조직 문제로 파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데 대해 강한 아쉬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