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이하여 호국 영령들의 삶의 의미를 기리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중 헌신하여 ‘6·25전쟁의 성자(聖者)’라는 별칭을 얻은 한 벽안(碧眼) 사제의 삶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에게 ‘명예훈장’을 추서했고 한국은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올해 평택 미군기지에는 그를 추모하는 비도 건립됐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시복시성(諡福諡聖)도 추진하고 있다.
‘6·25전쟁의 성자’ 에밀 조셉 카폰(Emil Joseph Kapaun) 신부는 1916년 4월 20일, 미국 중부 캔자스주 필슨(Pilsen)에서 태어났다. 필슨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령 ‘체코’ 출신 이민자들이 세운 마을이었다. 카폰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신대륙으로 이민을 온 오스트리아-독일계 아버지와 체코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장했다.
필슨고등학교(Pilsen High School)를 졸업한 후 가톨릭 콘셉션수도원(Conception Abbey) 예비신학교를 거쳐 1940년 세인트루이스의 켄리크신학교(Kenric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 신학교 졸업 후 캔자스주 위치타교구(Diocese of Wichita) 교구장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카폰이 서품을 받은 후 교구 사제로 활동할 때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했다. 카폰도 종군(從軍)을 결정하고 1944년 매사추세츠주에 미국육군군종학교(U.S. Army Chaplain School)에 입학하여 그해 10월 졸업하여 육군 군종장교로 임관했다.
군종신부로 임관한 이듬해인 1945년 인도로 발령을 받아 버마 전선에서 복무했다. 1946년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했고 그해 7월, 전역하여 ‘예비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전시 법령하에서 미국 가톨릭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8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군종신부로 사목을 하였고 다음 사역지인 일본으로 떠났다.
1950년 1월, 일본에서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있던 주일 미군 산하 육군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의 군종신부로 임명됐다.
카폰 신부가 일본에 부임한 그해 6월,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발발 후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군도 파병을 결정했다. 일본에 주둔하던 육군 제1기병사단도 한반도로 파병됐고, 카폰 신부도 1950년 7월 16일, 부대의 일원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6·25전쟁 초반 전세는 한국군과 유엔군에 불리했다. 연일 후퇴가 이어지는 절망적인 전세 속에서도 카폰 신부는 장병을 격려하여 심리적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전쟁 중에 직접 미사를 집전하거나 병사들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홀로 낙오된 병사를 구출하는 수훈을 세웠고 동성무공훈장(Bronze Star Medal·BSM)을 수훈(受勳)했다.
전쟁 초반 불리했던 전세는 1950년 9월, 맥아더 원수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역전됐다. 카폰 신부가 속한 제1기병사단도 38도선을 넘어 북진했다. 그러나 11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재역전됐다.
평안북도 운산 전투에서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는 중공군의 기습 공격에 고립됐다. 상부에서는 카폰 신부에게 탈출 명령을 내렸다. 그는 철수 명령을 거부하고 통나무와 지푸라기로 참호를 만들어 부상병들을 대피시켰다. 그 후 몇 차례나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대로 남아 부상병을 돌봤다. 결국 그는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포로수용소는 인간성이 말살되는 비참한 곳이었다. 카폰 신부는 자신의 편안함을 마다하고 부상자들과 포로들, 특히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사람들을 옆에서 간호하고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사랑을 실천했다. 총상이 심하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들을 부축해서 혼자 가기도 벅찬 먼 길(100㎞ 이상)을 걸어갔다고 전해진다. 위험을 무릅쓰고 곡물을 훔쳐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현역 장교 신분으로 전쟁포로가 된 카폰 신부는 수용소에서 각종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영양실조로 인하여 건강도 악화됐다. 다만 이에 굴하지 않고 전쟁 포로들을 격려하면서 사제로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수용소에서 카폰 신부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수감자와 부상병들을 돌보며 삶의 희망과 의지를 북돋아 주었다. 사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그는 사제이기 전에 수용소 포로들의 위로자요, 보호자였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참전용사들은 “생존자의 최소 절반은 생명을 빚졌다.”고 입을 모았다. 포로수용소에서도 적군인 중공군조차 카폰 신부를 존경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군인들의 고해성사를 들으며 사제의 의무를 다했다. 카폰 신부는 고통으로 힘들어 눈물을 흘리면서도 주변의 병사들에게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자신도 고난을 겪는 것이 기뻐서 운다고 위로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병사는 눈물을 흘렸다,
카폰 신부는 수용소 생활 6개월 만인 1951년 5월 23일 향년 35세로 선종(善宗)하였다. 그는 선종 전 “내 걱정은 하지 말라. 나는 항상 내가 가길 원했던 곳으로 가고 있으며, 그곳에 도착하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1953년 정전 협정으로 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그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휴전 후 북한은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들을 넘겨주었다. 다만 미군 측 기록에는 카폰 대위가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이 아닌 운산 전투에서 실종된 것으로만 기록해서 유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실종’으로 처리되어 미국 하와이 국립태평양기념묘지(National Memorial Cemetery of the Pacific) 내 ‘무명용사’ 묘역에 영면해 있던 카폰 신부의 유해는 70년 만인 2021년 3월, 미국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에 의하여 공식 확인됐다. 그의 유해는 같은 해 9월 29일, 캔자스주 고향으로 이장되었고 장례 미사와 함께 고향 땅에 묻혔다.
카폰 신부의 장례미사에 참석한 전우 허버트 밀러는 “당시 부상으로 누워있는 자신에게 중공군이 총을 겨눈 순간 카폰 신부가 나타나 총구를 밀쳐냈고 중공군도 더는 총을 겨누지 않았다.” 며 “카폰 신부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건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증언했다. 또 다른 전우 마이크 다우는 카폰 신부가 ‘죽음의 집’으로 불린 수용소 한 건물에서 숨졌다고 증언했다. 그는 “카폰 신부가 어둠 속에 신앙을 실천하는 빛이 됐기 때문에 중공군이 의도적으로 그를 ‘죽음의 집’에 보냈다.”면서 “그들이 그를 순교자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카폰 신부의 신실한 신앙심, 영웅적인 행적은 6.25전쟁 당시 전장, 포로수용소 등에서 함께 생활했던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졌다. 이를 바탕으로 사후 3년 후인 1954년 ‘종군 신부 카폰: Chaplain Emil Kapaun)’이 출간됐다. 저자 아서 톤(Arthur Tonne) 몬시뇰(Monsignor·명예 고위성직자)은 프란치스코수도회 수사신부로 카폰 신부의 고향이자 사제 서품을 받은 캔자스주 위치타 교구에서 사목 활동의 대부분을 수행하였다.
해당 책은 1956년 당시 신학생이던 고(故) 정진석 추기경이 번역·출간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6·25전쟁의 참상을 몸소 경험하고 수차례 죽음의 문턱에 선 후 진로를 바꾸어 사제가 되었던 정진석 추기경은 카폰 신부의 삶을 다룬 ‘종군 신부 카폰’ 책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는 훗날 “카폰 신부의 삶은 나의 청년 시절, 사제가 되기를 결심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나의 롤모델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다른 이를 도와주는 모습을 상상하면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생전에 수차례 개정판을 출간했다. 정 추기경은 2021년 3월, 병상에서 카폰 신부 유해 발견 소식을 듣고 직접 구술로 개정판 작업을 진행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정 추기경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하며 그의 생애를 많은 이에게 전하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2021년 4월 선종했고, 개정판 책은 유작으로 남았다.
카폰 신부의 삶의 의미를 기리는 작업이 지속되고 있다. 2013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미군 최고 수훈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가장 대단한 무기를 휘둘러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고 말했다.
휴전협정 체결 68주년이자 그의 유해가 신원 확인된 후인 2021년 7월 27일, 한국 정부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훈장 수여식에는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여 당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등이 동석했다. 2022년 5월에는 경기도 평택 주한미군 사령부(캠프 험프리스) 영내에 카폰 신부 추모비가 세워졌다. 한미동맹 70주년인 2023년, 국가보훈처는 ‘5월의 6.25 전쟁 영웅’으로 카폰 신부를 선정했다.
올해 미국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카폰 신부의 고향 캔자스주에서도 추모 행사가 열렸다. 캔자스주는 이날 헤링턴시 우체국 건물 이름을 ‘에밀 J. 카폰 대위 우체국’으로 명명했다.
로마 교황청에서도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993년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시성 절차의 첫 단계인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했다.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모범으로 살다가 죽은 인물을 교황의 공식 선언을 통해 공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복시성 제도를 두고 있다. 김대건 신부 등 한국의 선대 순교자 등 103명이 성인에 들었고 기타 124명이 그 바로 밑의 복자에 들었다. 성인(聖人)-복자(福者)-가경자(可敬者·하느님의 종) 3단계로 나눠진 가톨릭 교회 시복시성 절차 중 첫 단계이다.
에밀 카폰 신부의 삶을 두고서 허영엽 천구교 서울대교구 신부는”이 땅에 사는 우리가 카폰 신부를 올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 이루어낸 눈부신 대한민국의 발전은 수십 년 전 이 땅에서 우리나라 청년들뿐 아니라 피를 흘린 카폰 신부와 같은 외국의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먼 이국땅에서 죽은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청년들 부모님의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보답하는 것은 무엇보다 역사를 바르게 오래 기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