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 없이 참전한 여성 600여 명”…나라 위해 목숨바친 ‘여성 학도병’을 아시나요?

이연재
2022년 09월 29일 오후 9:34 업데이트: 2022년 09월 29일 오후 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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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했다.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하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자 학생 신분의 청년 200여 명이 수원에 집결해 ‘비상학도대(非常學徒隊)’를 조직했다. 그러면서 ‘학도의용군’(이하 학도병)의 활동이 시작됐다.

1994년 육군본부에서 발간한 공간사 ‘6.25전쟁 시 학도의용군’에 따르면 학도병은 6·25전쟁 발발 시부터 1951년 4월까지 대한민국 학생 신분으로 지원하여 전후방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공비 소탕 ▲치안 유지 ▲간호활동 ▲선무공작 등 군과 경찰의 업무를 도왔던 개별적인 학생 혹은 단체를 말한다.

인터뷰하고 있는 여성호국용사 정기숙씨 (출처 : 정책주간지 공감)

정기숙 씨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17세의 나이로 학도병에 지원했다.

“6사단에서 장교 두 명이 와서 정훈부대에서 일할 지원자를 뽑았어요. 교련 담당 교사와 함께 학생들을 모아놓고 지원을 받았는데 많은 학생이 손을 들었어요. 모두가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정책주간지 공감에서 인터뷰한 여성호국용사 정기숙 씨 증언)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자 북한 주민에 대한 다양한 대민 선무공작이 요구됐고 이에 따라  국방부와 육군본부에서 이 임무를 맡길 부대를 편성했는데 그 부대가 정훈부대다.

정 씨는 최전방 부대를 따라다니며 수복 지역 주민들의 안정을 도왔다. 정 씨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북한군 패잔병들에게 습격을 받는 등 전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함께 다녔던 서울 미대생 2명은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고 춘천방송국 아나운서 2명은 가두방송을 했다.

정훈부대는 같은 해 10월 압록강까지 진출했지만 전세의 변화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정 씨는 주간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전했다.

“밤에 행군을 하면 너무 깜깜해 앞사람도 안 보였어요. 손을 잡고 가면서 앞에서 적이 있으니 멈추라 하면 멈추고, 그 말을 뒤로 전달하며 그렇게 한없이 걸었습니다. 어떤 날은 골짜기를 가다 보면 보이지는 않지만 발치에 걸리는 게 있었어요. 시체였습니다. 그런 시체들을 밟고 걷기도 했어요.”

정 씨는 천신만고 끝에 1951년 2월께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함께 지원한 춘천 여고생 4명 중 2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단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6·25전쟁 여군참전사(2012년)’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참전한 여군은 모두 2400여 명이다. 현역으로 1751명이 활동했고 군번 없이 참전한 여성은 확인된 인원만 600여 명에 이른다. 육군 여자의용군은 1950년 9월 1일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창설돼 전쟁 기간 동안 1058명이 수료했다.

28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6.25전쟁과 여성학도병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 에포크타임스

28일 북한이탈주민 인권 증진과 생환 6·25 국군포로 지원 등의 사업을 펴는 사단법인 물망초가 국회의원회관에서 ‘6·25와 여성 학도병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뜻깊은 행사를 열었다. 이날 세미나는 사단법인 물망초와 한기호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공동 주최하고 국군포로송환위원회, 물망초 인권연구소가 주관했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학과 교수(육군대령)는 여성 학도병들은 전투 부대에서 ▲행정업무 지원 ▲간호활동 ▲선무활동 ▲유격대 등 다양한 전투 활동 ▲군수 및 보급활동 지원 등의 활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이들 중에는 군대에 직접 입대해 계급을 부여받은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학교 단위별 또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기에 특별히 계급이나 군번을 부여받지 않은 채 학생 신분으로 활동했다.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학과 교수(좌)와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법률분석관(우) | 에포크타임스

나 교수는 “6·25전쟁 시 학도의용군은 용감한 역사의 주인공이었다”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병역 기피 현상에 대한 좋은 귀감이다. 국가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훌륭한 역사 교육의 소재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학도의용군 참전자가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외쳐왔으나, 우리 사회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며 “70여 년이 지났지만 6·25전쟁 시 활약했던 학도의용군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 정리, 종합적인 연구와 분석, 그리고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충분히 기릴 수 있는 원호 및 보훈 정책에 대한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법률 분석관은 병역법을 비롯한 국방 관련 법령, 또 보훈 관련 법령 어디에도 ‘여성 학도병’의 지위를 별도로 규정한 조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성 학도병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 연구 및 명예 회복, 역사 교육 등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신 분석관은 또 여성 학도병 출신 전쟁포로·실종자에 대한 생사 확인 및 구출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탈북자·국군포로 진술 등을 근거로 조사한 국정원 자료(2007년 기준)에 따르면 국군포로는 1770명(생존 560명, 사망 910명, 행불 300명)이다.

그는 “여성 학도병 출신을 포함한 6·25 전쟁포로 및 실종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위해 ‘6.25전쟁 국군포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