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걸고 지켜낸 보물들…간송 컬렉션 ‘보화비장’展
전시실 내부 전경. 보물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의 절필작, ≪대팽고회≫ 예서 대련
국보 4건, 보물 3건 등 총 9건의 존 갯즈비 고려청자 컬렉션
은은한 비색(翡色)의 품격 고려청자, 생동감 있는 필치의 대련, 섬세한 붓놀림과 은은한 먹빛이 인상적인 그림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들여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모은 소장품들이다. 이번 전시는 내년에 있을 간송 전형필 탄생 120주년 기념 특별전을 여는 서막이다. 간송이 7인의 수장가들로부터 작품을 선별·수용하는 과정, 컬렉션 40점을 통해 근대 한국 미술의 지평을 넓히게 된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단순한 수집가를 넘어, 한국 문화유산의 지킴이로 불리는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라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문화보국(文化保國: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이라는 신념으로 고미술품을 수집하며 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지켰다.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도자기를 살펴보고 있다. | 간송미술관
특히 이번 전시에서 놓쳐서는 안 될 백미는 존 갯즈비 컬렉션의 국보 도자들과 송은 이병직이 소장했던 추사 김정희가 71세에 쓴 마지막 글씨 ‘대팽고회’ 예서 대련(집이나 문에 붙이는, 좌우 한 쌍으로 짝을 이룬 글귀)이다.
국보와의 조우, 존 갯즈비 컬렉션 명품 9선

(왼쪽부터) 백자박산향로(보물),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청자오리형연적(국보) | 간송미술관
존 갯즈비 컬렉션에서는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를 포함한 총 9건의 명품 도자가 공개된다.
영국 출신 변호사 존 갯즈비는 일본에서 활동했다. 동시대 한국 수장가들이 주로 서화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갯즈비는 일본에 거주하며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 컬렉션을 구축했다. 그의 수집 활동은 서양인이 바라본 한국 고미술의 가치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국보,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12세기, 존 갯즈비 컬렉션 | 간송미술관
고려 문화의 정수를 담은 걸작으로 인정받으며 1992년 국보로 지정된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은 새끼를 품은 어미 원숭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연적이다. 맑은 비색 유약을 입혀 청자 특유의 청록빛과 은은한 광택이 조화롭고, 눈은 철채로 칠해 생기를 더했다. 특히 원숭이 조형의 동적인 활력과 장난스러움이 공존해 실용성과 장식성이 돋보인다.
원숭이를 모티브로 한 건 특별한 의미가 있다. ‘원숭이(猴)’의 ‘후猴’의 발음이 ‘제후(侯)’의 ‘후侯’와 같아 ‘배배봉후(輩輩封侯)’, 즉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길상(吉祥)을 뜻한다.
추사 김정희와 동시대 문인의 예술, ‘고경당 컬렉션’
‘고경당(古經堂) 컬렉션’은 근대 서화 수집가 이병직(송은, 1896~1973)이 평생 수집한 한국 근대 서화·고문서 등을 모아 구성한 컬렉션이다.
조선의 마지막 내관으로 알려진 송은 이병직은 내시제가 폐지된 후 근대 교육의 후원자이자 수장가로 활동하며,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서화와 문인 작품을 폭넓게 수집했다.
그의 ‘고경당(古經堂) 컬렉션’은 정통성과 교양을 중시한 수장가의 안목을 보여주는 대표적 문인 컬렉션으로, 조선과 중국 문인의 작품이 함께 공개되어 동시대 미술 교류의 면모를 드러낸다.

김정희, <대팽고회>, 1856년, 지본묵서, 송은 이병직 컬렉션 | 간송미술관
“大烹豆腐瓜薑菜 / 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대팽고회(大烹高會)> 예서 대련은 1856년 8월경 쓴 것으로 보이는 추사 김정희의 절필작(絶筆作)으로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다. 추사의 서예 세계와 인생관이 집약된 이 작품은 2018년 보물로 지정됐다. 전한(前漢)시대 고예(古隸) 필법을 바탕으로 굵고 가는 획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진대(秦代) 전서(篆書) 필의와 후한(後漢) 팔분예서기(八分隸書氣)를 섞어 써서 늙은 솔가지처럼 꾸밈없이 소박하고 진솔한 느낌을 주는 편안한 예서체다.
굵기·여백의 대비가 주는 아름다움과 간결한 문장 속에 담긴 인생관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만년기의 추사가 어떤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대팽(大烹)’이란 ‘크게 요리함’, ‘고회(高會)’는 ‘성대한 모임’ 또는 ‘고귀한 모임’을 뜻한다. 평생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며 가족과의 일상을 놓쳤던 추사가 만년에 깨달은 삶의 진리를 담은 말로, 화려함보다 평범한 음식과 가족이 함께하는 순간이야말로 ‘최고의 즐거움’임을 전한다.
간송과 함께한 조선·근대 서화의 정수, ‘천죽재 컬렉션’
근대 최고의 감식가로 불린 위창 오세창은 우리나라 역대 서화를 체계적으로 수집·분류했다. 그의 안목은 간송의 수집 기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천죽재 컬렉션’에는 청나라 화가 장성, 오리, 조선 후기의 김홍도, 신윤복 등 조선과 근대 서화가의 주요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 작품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간송에게 돌아오는 등 흥미로운 수장 내력을 지니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오세창의 깊은 감식안과 수집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신윤복, <나월불폐>, 견본수묵, 천죽재 컬렉션 | 간송미술관
보름달이 뜬 밤, 강아지 한 마리가 다소곳이 앞발을 모은 채 사색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얼룩무늬와 털, 수염까지 세밀하게 표현된 개와 달리 배경의 나무와 풀밭은 거칠고 간략하게 처리되어 대조를 이룬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가 신윤복의 작품 <나월불폐(蘿月不吠)>이다. 신윤복은 인물뿐 아니라, 동물의 사실적인 묘사에도 뛰어났다. 밝은 달이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개의 모습은 ‘견불야폐(犬不夜吠)’, ‘달 밝은 밤 꽃마을엔 개 짖는 소리도 없다’ 와 같은 시구처럼 고요와 평온, 나아가 성군의 덕치와 태평성대를 내포하고 있다.
그림 속의 개는 조선 후기부터 근대기까지 유행했던 오동나무 아래에서 달을 보고 짖는 개를 그린 그림인 ‘오동폐월(梧桐閉月)’의 도상과 뚜렷이 대비되는 모습이다. 귀신을 내쫓는 오동나무와 영험함과 영물로 묘사된 개를 그림으로써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적인 의미가 있던 ‘오동폐월’과 달리 ‘나월불폐’는 나무에 걸린 달을 보고도 짖지 않는 개를 통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온하게 사는 삶, 문인의 고요하고 자유로운 정취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11월 30일까지, 관람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관련 전시 도슨트 프로그램 등 연계 교육도 운영한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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