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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크라나흐가 남긴 궁정의 삶

2025년 11월 27일 오후 3:09
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 ‘하르텐펠스 성 근처의 사냥’, 1540년, 나무판에 유채, 약 116.8 × 170.2 cm |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 ‘하르텐펠스 성 근처의 사냥’, 1540년, 나무판에 유채, 약 116.8 × 170.2 cm |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

크라나흐가 남긴 초상화들은 작센의 선제후들이 누렸던 전성기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1540년, 작센의 개신교 군주들은 사냥을 매우 즐겼고, 크라나흐도 사냥 원정에 자주 동행했다.

독일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루카스 크라나흐(1472–1553)는 회화, 판화, 장식 벽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다작의 예술가이다. 그는 예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작센의 여러 군주로부터 꾸준한 후원을 받았다. 이들 군주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그의 동생 작센 선제후 요한 그리고 요한의 아들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이다. ‘선제후’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권을 가진 독일 제후들로 구성된 특권 계층을 뜻한다.

궁정 화가였던 크라나흐는 선제후들과 그들의 가족, 동맹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마르틴 루터 같은 개신교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초상도 남겼다. 또 종교적 주제와 신화적 장면을 다룬 작품도 다수 남겼다.

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 ‘마르틴 루터 초상화’의 세부 장면, 1528년, 패널에 유채, 39.4 × 25.4 cm. 독일 코부르크 소재 코부르크 요새 소장.

크라나흐 화풍은 대담한 구성, 풍부한 색채, 치밀한 사실성, 세밀한 묘사, 상징성의 능숙한 활용이 특징이다. 이런 특징들은 요한 프리드리히와 그의 아내 클레베의 시빌라 공주 초상화, 그리고 궁정 사냥 장면 같은 주요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번영했던 크라나흐 

크라나흐는 프랑코니아 지방의 크로나흐(Kronach) 출신이며, 성은 이 마을 이름에서 왔다. 미술사학자들은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가 첫 스승이었을 것으로 본다. 크라나흐는 한때 빈에서 활동했지만, 1505년까지 작센 선제후들의 비텐베르크 궁정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고, 선제후들을 따라 여러 성을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루카스 크라나흐(아들) ‘77세의 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 초상화’, 1550년, 패널에 유채, 63.5 × 48.7 cm,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그는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비텐베르크의 유력한 인사로서도 성공했다. 그는 여러 차례 시의회 의원과 시장(부르크마이스터)을 역임했다. 크라나흐는 높은 주문량을 감당하기 위해 대규모 작업장을 운영했는데, 현재까지 그의 이름과 작업실에서 나온 400여 점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선제후 요한 굳건공과 요한 프리드리히 관대공은 마르틴 루터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크라나흐는 개신교의 핵심 인물들과 친밀해졌고, 루터의 신약성서 번역판의 목판화와 루터교회 제단화를 그렸다. 그의 작업장의 어시스턴트들은 루터와 작센 가문의 초상화를 회화와 판화로 다수 제작했다.

초상화는 외교 선물로도 많이 사용되었기에 같은 인물의 초상화가 여러 버전으로 제작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요한 프리드리히는 전임자 두 명의 초상화 60쌍을 크라나흐에게 의뢰하기도 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는 “크라나흐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같은 인물이 똑같이 반복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다양한 버전의 작품들의 품질도 대체로 높았다는 점이다”라고 평가한다.

크라나흐가 1530년대에 그린 요한 프리드리히의 반신 초상화 중 하나가 2018년 4월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다. 이 작품은 거의 80년간 행방이 묘연했고, 분실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여겨졌다. 마지막으로 알려진 소유자는 네덜란드 은행가이자 유명 미술 수집가 프리츠 구트만이었다. 그는 유대인이었기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그의 소장품을 약탈했고, 구트만은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하며 소장품을 되찾지 못했다. 

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 초상화’, 1530년대경, 패널에 유채, 약 62.9 × 39.7 cm.

요한 프리드리히(1503–1554)의 반신 초상화와 구트만의 소장품 대부분은 전쟁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그의 자녀들과 상속인들은 반환 기관 및 도난 미술품 자료저장소와 협력해 가족 소유의 작품들을 찾으려 노력했다. 초상화의 소재는 최근에야 밝혀졌는데, 미국의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었다. 소장자는 크리스티 경매에 작품의 출처가 나치임을 알렸고, 경매사는 구트만 상속인과 소장자 사이에 합의서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게 했다. 예상 경매가는 100만~200만 달러였지만, 실제 낙찰가는 77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초상화는 요한 프리드리히를 가장 세련되게 묘사한 크라나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된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자신감은 요한 프리드리히의 위엄을 잘 드러낸다. 뛰어난 붓질로 보아 전문가들은 크라나흐가 어시스턴트들의 도움 없이 직접 그림을 완성했을 것으로 본다. 반신 구성, 작품의 3/4를 채우는 측면 자세의 인물, 좌우 가장자리를 절단해 만들어낸 구도는 위엄과 장엄함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크라나흐 스타일이다.

선제후가 입은 화려한 옷과 장신구는 그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낸다. 크리스티 경매 카탈로그에 따르면, 그는 빨간 실크 띠로 장식된 더블릿(14~17세기 유럽에서 남성들이 입던 짧고 꼭 끼는 상의)을 입었는데, 유행에 맞게 절개되어 아래의 자수된 흰 천이 살짝 비쳐 보인다. 목에는 사파이어와 진주로 된 ‘S’ 모티브가 있는 금 목걸이 세 개를 착용했다. 

요한 프리드리히는 금으로 된 사슬 네 개를 더 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돌고래 펜던트로, 돌고래 입 안에는 구멍이 뚫린 향수 용기인 펌안더(pomander)가 있다. 이 펌안더는 때로 귀이개, 이쑤시개, 호루라기로도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자주색 벨벳 모자에는 에나멜 꽃 장식, 모자 배지, 반지, 뱀 모양 장신구가 보인다.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는 두 손을 맞잡은 자세로 강조되어 있으며, 작센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시빌라 폰 클레베의 초상화

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 ‘시빌라 폰 클레베 공주 초상화’ , 1526년, 나무판에 유채, 약 56.9 × 38.9 cm. 독일 바이마르 소재 바이마르 성 소장.

요한 프리드리히 관대공과 시빌라 폰 클레베(1512–1554)의 약혼 및 결혼 기간 동안 크라나흐는 시빌라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시빌라는 클레베 공작의 장녀이며, 헨리 8세의 네 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앤 클레베의 동생이다. 크리스티 경매는 시빌라의 남편 초상화를 환수하여 판매하기 10년 전, 1526~1527년에 제작된 공주 시빌라 초상화를 760만 달러에 경매에 부쳤다. 크리스티 경매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녀가 착용한 보석과 깃털 장식의 화관으로 보아 겨우 14세였던 약혼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부들은 약혼식과 결혼식 때 신랑에게 화관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고, 이 초상화 속 시빌라처럼 신부들은 머리를 풀어 내리고 화관 외에는 머리 장식을 하지 않았다. 

시빌라의 자세는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남편 요한 프리드리히의 초상화와 유사하다. 어두운 배경 앞에서 작품크기의 3/4를 차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몸을 약간 기울인 채 허리에서 두 손을 맞잡고 있다. 크리스티 카탈로그에 의하면 초상화의 모든 요소, 즉 옷차림, 보석, 머리 모양, 자세 등은 당시 관객에게 특별한 의미를 전달했지만 오늘날 모든 상징을 완전히 해석하기 어렵다.  

그녀의 소매와 허리 부분에 있는 금색 무늬 띠와 가슴에 걸친 세 개의 굵은 사슬에서 드러나는 상징들은 작센 가문을 나타낸다. 또, 그녀의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에는 그녀의 가문과 남편가문을 결합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냥 그림

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 ‘하르텐펠스 성 근처의 사냥’, 1540년, 나무판에 유채, 약 116.8 × 170.2 cm |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

크라나흐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동물과 사냥 장면을 그린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작센 선제후들은 사냥을 매우 좋아했고, 크라나흐는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사냥 원정에 자주 동참했다. 그가 사냥을 주제로 그린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1540년작 「하르텐펠스 성 근처의 사냥」으로, 클리블랜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활기찬 풍경화에는 울창한 숲과 공터, 구불구불한 강이 그려져 있으며, 서로 다른 세 무리의 사냥 장면이 펼쳐진다. 이 모든 장면은 동독 작센 선제후들의 거주지 중 하나였던 하르텐펠스 성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좌측 상단에는 곰을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곰 한 마리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사냥개 한 마리를 다리 밑에 두고 있다. 우측 상단에는 멧돼지 사냥 장면, 그림 중앙과 앞쪽에는 기마 및 도보로 참여한 궁정 인사들이 벌이는 사슴 사냥 장면이 펼쳐져 있다.

미술사학자들은 왼쪽 하단에서 녹색 옷을 입고 석궁을 당기는 인물을 요한 프리드리히로 보고 있다. 노란 옷을 입고 세 마리의 사냥개와 함께 있는 소년은 그의 아들 중 한 명이다. 오른쪽 덤불 속에는 선제후의 부인 시빌라가 첫 번째 의식용 사격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크라나흐는 의식용 창과 석궁 등 다양한 무기들을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하르텐펠스 성 근처의 사냥> 중 (좌) 녹색 옷을 입은 요한 프리드리히와 그의 아들, (우) 석궁을 겨누는 선제후 부인 시빌라의 세부 장면, 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 1540년,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

이 그림은 1950년대까지 하르텐펠스 성과 모리츠부르크 성에 왕실 소장품으로 보관됐다. 이 작품은 요한 프리드리히의 사촌이자 가문 내 서로 다른 분파였던 작센의 마우리츠 공작(1521–1553)에게 선물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 프리드리히와 마우리츠는 경쟁 관계로, 적대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46년, 오랫동안 이어져 온 가톨릭 황제 찰스 5세와 루터교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의 지도자 요한 프리드리히 사이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마우리츠는 개신교 동맹과 사촌을 배신하고, 찰스 5세의 군대 지원을 받아 요한 프리드리히의 영토를 공격했다.

1547년 요한 프리드리히는 포로로 잡혀 황제에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영토를 마우리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종신형으로 감형됐다. 크라나흐는 요한 프리드리히와 함께 유배 생활을 했다. 1552년 마우리츠가 황제에 반기를 들자, 요한 프리드리히는 감옥에서 석방됐다. 이후 그는 바이마르 시에 작센 궁정을 재건했고, 크라나흐도 함께 그곳으로 갔다.

 크라나흐는 오래 살지 못하고 1553년에 세상을 떠났다. 요한 프리드리히의 아들들은 각각 작센 공작, 작센-바이마르 공작, 작센-고타 공작이 되었지만, 작센 선제후 칭호는 마우리츠 가문이 계속 유지했다. 크라나흐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요한 프리드리히도 사망했다. 한 예술가가 이들의 궁정 전성기를 생생히 기록한 만큼, 이 시기에 요한 프리드리히 가문이 선제후 칭호를 잃은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

*이지수 인턴기자, 조윤덕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