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논평] ‘녹색 환상’…태양광 패널이 만든 오염과 농업의 소멸

2025년 08월 12일 오후 2:26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태양광 발전소(자료사진). Drew Angerer/Getty Images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태양광 발전소(자료사진). Drew Angerer/Getty Images

최근 이탈리아가 생산성 있는 농지에 태양광 패널 설치를 금지하기로 한 결정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한다. “태양광 패널이 오히려 재생농업(regenerative farms)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상형 패널 아래에 양을 방목하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하자. 태양광 패널은 만능 해결책이 아니며 현재의 대체 에너지 방식으로는 아직 어떤 문제도 ‘해결했다’고 보기 어렵다.

나는 미국 텍사스주 중부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의 농촌 카운티에는 규제가 거의 없다. 사실 그것이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독립심이 강하게 뿌리내린 이곳에서도 조용한 잠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고 있다. 태양광 발전소가 멀쩡한 농지 위에 속속 들어서고 있다. 가축과 함께 운영되는 것도 아니고, 다각화된 시스템에 통합되는 것도 아니다. 식량 생산을 완전히 대체하는 형태로 들어서고 있다.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진보로 위장한 퇴보다.

내 활동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지역 식량 체계가 국가 안보의 문제라고 믿는다. 농장을 다리·도로·전력선만큼이나 중요한 기반시설로 취급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우량 농지가 금속과 유리로 덮이고, 열섬(heat island)을 만들며, 야생동물을 내쫓고, 지역 사회의 식량 공급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은 더 나빠진다. 패널 자체는 수동적인 설비일 수 있지만 설치 과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공사 중 발생하는 비산먼지를 줄이기 위해 시공 업체들은 화학적 분진 억제제를 살포한다. 그러나 이들 억제제 상당수는 그들이 보호하겠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토지와 수질을 오염시키고 있다. 실제로 흔히 사용되는 분진 억제제 중 일부에는 염화마그네슘과 염화칼슘이 포함돼 있다. 이들 성분은 인근 연못으로 스며들어 염도를 높임으로써 물고기·식물·가축에게 유해한 독성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환경적·윤리적 문제는 토지 이용에서 그치지 않는다. 태양광 패널 제조 과정에는 막대한 대가가 따른다. 콩고의 코발트 광산에서 이뤄지는 아동 노동, 막대한 환경 피해를 유발하는 리튬 채굴, 희토류 광물 정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 폐기물이 그것이다.

패널 조립의 상당 부분은 중국에서 이뤄지며 이 과정은 열악하고 착취적인 노동 환경 아래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강제 노동 문제가 우려되고 있다.

이른바 ‘녹색 에너지’ 운동을 떠받치는 공급망 자체가 인권 고통과 생태 파괴로 얼룩져 있다. 이를 ‘진보’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떠넘기는 것이 과연 윤리적이거나 지속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중국에서 강제노동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집단으로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자들과 함께 주로 신장(新疆) 지역에 거주하는 이슬람 소수민족인 위구르족이 있다. 이들 집단과 기타 소수민족들은 ‘재교육’이란 명목 아래 대규모 수용소에 구금된 뒤 국가 주도 노동 프로그램으로 이송됐다. 많은 이들이 전 세계 태양광 공급망과 연관된 공장에서, 특히 대부분의 태양광 패널을 구성하는 소재인 폴리실리콘 생산 과정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있다. 이렇게 생산된 제품들은 미국을 포함한 국제 시장에까지 유통된다.

한편 중국의 농촌 출신 이주노동자들과 심지어 수감자들 역시 열악한 노동 환경, 임금 체불, 극도의 불투명성 속에서 강제적 성격의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당신의 ‘청정에너지’가 아동 광부와 강제노동자의 손에 의존한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으로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목장에서 기르는 소들에게 연못-텍사스에서는 ‘탱크(tank)’라고 부르는 곳에 고인 물을 더 이상 먹일 수 없게 된 목장주들을 알고 있다. 그 물이 이제는 오염됐기 때문이다. 시골에 ‘꿈의 집’을 지은 가족들은 이제 태양광 패널과 비산(飛散)하는 화학물질에 둘러싸여 있다. 이게 대체 뭐가 ‘녹색’이란 말인가?

이건 결코 한 지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전역에서 비슷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중독된 가축, 파괴된 생태계, 말라버린 시내, 잃어버린 생계 등등. 아이러니하게도, 이른바 ‘녹색 혁명’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바로 그 땅과 물을 적극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이게 정말 환경적 진보의 모습인가?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인가?

태양광 패널에는 수명이 있다. 하지만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생태계에는 그러한 기한이 없다. 풍력 터빈은 결국 닳아 없어진다. 그러나 건강하고 회복력 있는 토양은 우리가 잘 관리한다면 해마다 쌓이고 성장한다. 기후변화, 토지 황폐화, 식량 불안을 해결하는 해법은 더 많은 패널이 아니라, 더 많은 식물, 더 많은 동물, 더 많은 생물(生物)이다.

이 시스템은 이렇게 작동한다. 식물은 대기 중에서 탄소를 흡수해 탄수화물로 전환하고, 이를 토양 미생물 군집의 먹이로 제공한다. 동물은 소변, 분뇨, 그리고 침을 통해 미생물 생태계에 기여한다. 자연 상태에서 야생 동물들이 포식자에게 쫓겨 이동하듯, 동물들을 매일 옮겨 키우면 초원이 되살아나고 표토(表土)가 재생되며 물 순환이 회복된다.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현대 생태학이 입증한, 오랜 지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생농업은 태양광이나 풍력이 그랬듯 억만장자를 만들지 못한다. 왜일까? ‘중앙집중식 이윤’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생농업은 지역적이고, 느리며, 관계 중심적이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하고, 자연과 연결돼 있고,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자연을 이기려 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형태의 ‘녹색 에너지’는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사기에 불과하다. 단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로 지게 된 ‘죄’를 속죄한다는 구원의 환상을 우리에게 판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인간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자연 질서 속에서 인간 자신의 위치를 잊는 것이 문제다.

기후와 토지 이용을 논하고, 진정한 회복력을 원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환상을 보조금으로 떠받치지 말고 현실에 투자해야 한다. 태양광 발전소는 우리를 먹여 살리지 않는다. 재생농장이 우리를 먹여 살린다.

그리고 진보란 이름으로 연못과 가축을 중독시킨다면, 드러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맹목(盲目)이다.

*이정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