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칼럼] 뉴욕시장 선거서 돌풍…‘민주사회주의’란 무엇인가?

2025년 07월 04일 오후 5:29

미국 뉴욕시장 선거 후보를 선출하는 민주당 경선에서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예비후보가 승리하면서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부유층·기업 증세, 최저임금 2배 인상, 영유아 무상 보육 서비스를 약속한 그에게 한쪽에서는 열광의 시선을, 한쪽에서는 우려의 눈초리를 보낸다. 사회주의의 기원을 간략히 살피며 민주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본 이 글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시사점을 주고 있다. – 편집부


뉴욕 맨해튼은 여행지로는 멋진 곳이지만 투표하기에는 썩 내키지 않는 곳이다. 최근 민주당 뉴욕 시장 후보 경선에서는 코로나 봉쇄 조치로 신뢰를 잃은 전 주지사와, 시민들이 원한다면 뭐든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사회주의 후보가 맞붙어 후자가 승리했다.

후자의 이름은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로, 33세이며 컬럼비아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의 아들이다. 자본가 타도를 외치는 노동자와 농민을 대표하기에는 그들의 삶과 거리가 먼 엘리트 출신이다. 조란은 자신을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로 부르며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 경제를 실현하겠다고 했다.

사회주의 경제란 무엇일까. 엄밀히 말해 그런 것은 없다. 경제학(Economics)이란 희소한 자원을 무한한 수요에 맞춰 어떻게 합리적으로 배분할 것인지를 다루는 학문이다. 즉 원하는 것을 항상 얻을 수는 없지만, 올바른 시스템을 통해 수요를 최대한 충족할 수 있다는 현실 인식에서 시작한다.

반면, 순수한 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Socialism)는 그것(경제학)과 정반대이다.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공짜로 얻고, 모든 것을 공유하면서도 누구도 생산 수단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법에 의해 강제로 실현될 수 있다는 꿈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런 사회주의 체제는 늘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국가로 귀결되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하다. 희소한 자원을 모든 사람이 소유하게 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통제권을 갖기 위해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신발에 사회주의를 적용해 ‘모두의 신발’이 됐다면? 서로 신발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다툼만 벌어질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순수한 사회주의 이론은 이 핵심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그것은 경제학의 첫 번째 과제, 즉 나의 것과 당신의 것을 구분하고 이를 강제하는 법률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기술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공동으로 소유한 자본은 시장에서 거래가 될 수 없고, 따라서 가격이 합리적으로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의미 있는 원가 계산이 불가능해진다. 전체 시스템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라는 개념 자체는 역사적으로도 정의가 분분했다. 첫 번째 단계인 1870년대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utopian socialists)’로 분류될 수 있는 초기 이론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평등과 정의, 풍요로운 세상을 꿈꿨지만 현실이나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몽상가들이었다. 그들은 금융자본이나 지주계급(자산가)들이 완벽한 세상이 오는 것을 가로막는 존재라고 여겼다.

두 번째 단계는 칼 마르크스의 저작들로 특정지어진다.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보다는 훨씬 더 경제학에 밝았다. 그는 고전 경제학을 받아들여 이른바 ‘노동 가치론(labor theory of value)’을 통합했으며, 사적 자본 소유자(자본가)들이 노동의 가치를 착취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국가가 생산 수단을 국유화해야 하며, 그 후 국가는 자연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헤겔의 ‘역사 역학(historical dynamics)’을 빌려와 “노동 계급의 혁명은 필연적”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 이전까지 사회주의 이론은 대규모로 시험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권력을 잡은 블라디미르 레닌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국가 전체 경제가 우체국처럼 작동할 것”이라는 모호한 비유로 답했다. 그는 이 질문에 관해 깊이 숙고하지 않았고 첫 연설에서는 러시아의 전력망을 확충하겠다 등 구호만 반복했다.

하지만 혁명 직후 시작된 ‘전시 공산주의(war communism)’ 3년은 재앙 그 자체였다. 식량이 바닥나고, 전력과 난방은 끊겼으며, 언론은 검열됐다. 농민들은 혁명에 대한 반대로 돌아섰다. 새롭게 권력을 잡은 이들이 폭력배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혁명에 대한 지지가 사라졌고 당 내부에서도 회의론이 제기됐다. 레닌은 통제권을 잃지 않기 위해 극단적 노선을 접고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 NEP)’이란 이름의 정책을 들고나왔다.

1921년 발표된 신경제정책은 사유 재산, 시장 경제, 그리고 기업 활동의 제한적인 복원을 의미했다. 이로써 볼셰비키 혁명은 패배의 문턱에서 생환할 수 있었다. 신경제정책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배신’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초기부터 실패가 판명된 것이었다.

볼셰비키 혁명 3년 만인 1921년 러시아에서 굶주림으로 죽은 어머니 옆에 어린 아이가 앉아 있다. | Public Domain

소련 공산주의가 실패한 시점을 1989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앞서서, 혁명 직후 체제를 도입하자마자 실패했으며 단 3년 만에 폐기됐다. 나머지 수십 년간 소련을 유지한 것은 거대한 행정 관료 체제를 거느린 일당 독재였다. 집권 세력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통제한 이 시기에, 소련 국민들의 수명과 생활 수준은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 모든 일의 흐름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는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영국의 학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페이비언(Fabians)’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지연 전술로 유명했던 로마 장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의 이름 ‘파비우스(Fabius)’에서 유래했다. 그의 전술은 자신보다 강한 적과 싸우게 됐을 때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시간을 끌면서 끈질기게 조금씩 상대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페이비언들이 이 명칭을 고른 이유는 농민 봉기나 노동 계급 혁명 같은 급진적 방식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조금씩 전략적인 진전을 통한 점진적인 개혁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저작을 꼼꼼히 읽어보면, 공상적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는 매우 다른 사회주의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

페이비언 학파는 효율적인 경제 관리의 핵심으로서 학문적 전문성과 과학을 내세웠다. 학자 출신인 페이비언들은 자신들의 통치 방식으로 기존의 귀족정을 대체하려 했다. 사회복지, 주택·식량, 에너지·기술, 통신·미디어, 의학·의료, 은행·금융, 그리고 궁극적으로 출산 인구 통계까지 한 분야씩 점진적으로 장악함으로써 통합적 계획을 수립하려 했다. 방대한 관료 체제도 찬성했다.

미국의 경우 페이비언이라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 전략과 방식은 분명히 자리 잡았다. 1929년 발생한 경제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1932년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행정 명령과 법률을 통해 부의 재분배, 물가 통제, 산업 보조금, 최저 임금, 은행 국유화를 포함하는 수많은 기관과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조치는 위기 해결에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상황만 악화시켰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훨씬 더 강도 높은 경제 통제와 배급이 이뤄졌다. 이는 관료주의를 더욱 강화해 군사 및 방위 산업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이러한 추세는 냉전 기간으로 이어졌고 그 이후까지 계속됐다.

오늘날 사회주의 이념에서는 이상주의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은 탐욕의 정치로 축소됐다. 그저 부유층 세금 물리기, 이윤 몰수, 기업 탄압, 성공 억제로 변질됐다. 국가에 최대의 권력과 자원을 집중시키고 가능한 한 많은, 어리석고 사악한 정책을 강제로 실시한다.

이제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나 빈곤층의 민심을 얻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것은 성공한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을 겨냥해, 여러 가지 이념적 트렌드로 유혹하는 데 집중한다.

이런 전략은 미국 유권자들에게 일부 먹혀들고 있다. 서부 연안 엘리트 계층에서는 사회주의 이념 공세가 효과를 거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공산주의 키드(Kid)’가 뉴욕시를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다른 지역에는 이들의 공세에 꽤 적응한 모습이다.

사회주의 경제라는 것은 없다. 경제학은 존재하고 있으며, 사회주의도 존재하지만, 그 둘은 섞이지 않는다. 또한 사회주의는 장기적으로 민주주의와 섞일 수도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사회주의 경제를 실행하겠다는 민주사회주의는 어느 모로 봐도 성립할 수 없다.

* 이 글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의역하고 내용을 보충했습니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