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롱프뢰유 화법의 승리 ‘황금방울새’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츠호이스(Mauritshuis) 박물관은 네덜란드 전성기 회화의 정교한 소장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들의 소장품 중 ‘왕관의 보석’으로 불린 작품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였다. 하지만 2013년 도나 타트(Donna Tartt)의 소설 ‘황금방울새(The Goldfinch)’가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되고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 소설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카렐 파브리티우스(Carel Fabritius)의 작품 ‘황금방울새’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그가 황금방울새를 트롱프뢰유 화법으로 절묘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1896년부터 마우리츠호이스 소장품의 일부였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높이 평가돼 왔지만 같은 제목의 소설이 나오기 전까지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는 세로 13.25인치(약 37cm), 가로 9인치(약 23cm) 크기에 불과한 나무 패널 유화를 보기 위해 방문객들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시실로 몰려들고 있으며,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트롱프뢰유(trompe l’oeil)’는 ‘눈속임’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로, 관람자가 그림을 ‘실제‘로 착각할 정도로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기법이다.
렘브란트의 제자

파브리티우스(1622~1654년)는 당대 네덜란드 최고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천재성이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가 32세란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고, 또 하나는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인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년)의 가장 재능 있는 제자이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페르메이르(1632~1675년)에게 영감을 준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파브리티우스는 암스테르담 북쪽 소도시 미덴베임스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미술 교육은 아마도 성직자이자 학교 교사이면서 부업으로 그림도 그렸던 아버지에게서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641년, 열아홉 살이 된 파브리티우스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그는 약 20개월 동안 렘브란트 밑에서 수련했으며 그 기간 중 일부는 렘브란트의 조수로 일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후 파브리티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몇 년을 보냈다. 그의 초기 역사화들은 대담한 붓 터치, 어두운 색채, 극적인 조명을 특징으로 하는 렘브란트 화풍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후 파브리티우스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적 목소리를 발전시켰다. 후기 작품들 대부분은 밝은 배경 위에 어두운 인물, 화사한 색감, 차가운 조명, 그리고 얇게 바른 안료에 적절한 두께의 임파스토(impasto‧반죽)를 혼합해 깊이와 질감을 구현하고 있다.
이 젊은 화가는 도시 풍경과 인물화 모두에서 광학적 효과에 관심을 보였다. ‘악기 판매자의 가판대가 있는 델프트의 풍경(A View of Delft, with a Musical Instrument Seller’s Stall)’에 대해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관람 상자에 넣으려는 의도로 제작한 그림’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관람객들이 렌즈나 구멍을 통해 이 그림을 보게 되면 실제로 3차원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다른 전통적인 그림 ‘암스테르담 실크 상인 아브라함 드 포터의 초상(Portrait of Abraham de Potter, Amsterdam Silk Merchant)’에서 파브리티우스는 트롱프뢰유 효과를 넣었다. 모델이 회반죽 칠이 된 벽 앞에 앉아 있고, 오른쪽 위에는 실제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못이 그려져 있다.

트롱프뢰유 기법은 고대부터 존재해 왔다. 이 기법으로 그린 가장 오래된 벽화는 이탈리아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발견됐다. 오늘날 쓰이는 이 용어는 프랑스어로 ‘눈을 속이다’란 뜻을 지닌다. 이차원 평면을 완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화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다. 1600년대, 특히 네덜란드에서 트롱프뢰유 기법을 활용한 회화적 실험이 크게 유행했으며 파브리티우스는 이러한 착시 효과를 가장 능숙하게 구현해 낸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1650년 파브리티우스는 헤이그 외곽 소도시 델프트로 이주했고, 거기서 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지냈다. 미술 전문가들은 그가 자신이 사는 주택 벽화 상당 부분을 작업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취향이 바뀌면서 그 벽화들 위에 덧칠이 돼 사라졌다고 본다. 실제로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그린 그림 중 12~13점만 살아남아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황금방울새’는 그가 델프트에서 거주하던 시기, 곧 그가 세상을 떠난 1654년 완성된 작품이다.
유럽의 황금방울새
금화조(錦花鳥)로도 불리는 황금방울새는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명금류(鳴禽類)다. 이 새는 검은 날개와 노란 줄무늬, 그리고 눈과 부리 주변의 붉은 반점을 특징으로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가 갈보리 언덕으로 가는 길에 머리를 찌르던 가시 중 하나를 뽑아냈을 때 튄 피가 이 새의 붉은 반점이 됐다고도 한다. 미술사에서 황금방울새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하는 상징으로, 아기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종종 성화에 등장한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황금방울새는 인기 있는 애완용 새였고, 여러 묘기를 배우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조그만 컵으로 제 물을 퍼마시거나, 모이통을 여는 재주였다. 파브리티우스는 석회 칠이 된 벽을 배경으로 이런 모이통에 사슬로 묶여 있는 아주 고요한 황금방울새 한 마리를 정교하게 그려냈다. 이 묶임이 가정생활과 자유에 대한 도덕적 교훈을 담은 것일 가능성도 있다.

파브리티우스가 구사한 구분되는 붓 터치는 매혹적이다. 최소한의, 눈에 띄는 붓질로 새의 보송한 깃털감을 포착했다. 노란 깃털의 강조 부분은 검정 물감 위에 색을 덧바른 뒤 페인트가 마르기 전에 붓 손잡이로 긁어내는, 렘브란트에게서 비롯된 기법을 사용했다.
배경의 벽이 갈라지고 벗겨진 듯한 실제감은 ‘암스테르담 실크 상인 아브라함 드 포터의 초상’에서처럼 두꺼운 물감을 팔레트 나이프로 도포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작품 ‘황금방울새’는 원래 더 큰 패널에서 잘라낸 작고 두꺼운 나무 패널에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이 작품의 용도에 대한 여러 추측을 낳았다. 새장 일부였거나 벽감(벽에 만든 틈)의 문, 혹은 보호 상자를 갖춘 그림의 덮개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델프트에서의 폭발사건

1654년 10월 12일 아침, 델프트 시(市) 화약고에서 약 9만 파운드에 달하는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도시의 거의 3분의 1이 파괴되고 5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수천 명이 부상했다. 그해 말 에그베르트 반 데르 풀(Egbert van der Poel)이 그린 그림은 이 파괴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는 파브리티우스가 2년 전 그린 도시 풍경과 대조를 이루는 비통한 기록이다.
비극적이었던 10월의 그 날, 파브리티우스는 화약고 가까운 곳에 있던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폭발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고 결국 그 상처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학자들은 당시 파브리티우스의 작품 상당수가 그 작업실에 보관돼 있었을 것이고, 폭발로 소실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마우리츠호이스 박물관이 2003년 진행한 ‘황금방울새’ 복원 작업에서는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현미경으로 살펴본 결과 미세 손상이 확인됐고, 이 작품이 작업실 잔해 속에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복원 과정에서 컴퓨터 단층촬영(CT)이 적용됐다. 이는 회화 작품 최초의 CT 스캔 사례였다.
복원 과정을 통해, 오래돼 누렇게 변색된 바니시(유약)가 제거되자 원래의 밝은 배경이 되살아났다. 박물관 측은 “엑스레이와 적외선 촬영을 통해 밑 부분의 횃대는 흰 배경 위에 나중에 덧그려졌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것은 트롱프뢰유 효과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파브리티우스가 죽은 후 그는 점차 잊혀져 갔다. 이는 델프트 출신인 또 다른 화가 페르메이르가 처음에 겪었던 운명과 맞물린다. 고요함과 빛을 다루는 작업으로 파브리티우스의 계보를 잇던 페르메이르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미술비평가 테오필 토레-뷔르거(Théophile Thoré-Bürger)에 의해 재발견됐다. 덧붙이자면 토레-뷔르거는 사적 소장품에서 발견한 ‘황금방울새’를 높이 평가하며 파브리티우스를 지지했다. 이 시기 이전까지 파브리티우스의 작품은 보통 렘브란트의 것으로 귀속되곤 했다.
미술사학자들은 만약 파브리티우스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두 거장인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를 뛰어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고작 12년이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파브리티우스는 미술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미셸 플라스트릭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아트 어드바이저다. 미술사, 미술 시장, 박물관, 아트 페어, 특별 전시 등 다양한 주제를 두루 다루며 글을 쓴다.
*박경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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