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에서 역사화까지…18세기 프랑스를 아우른 화가, 르티에르

다얀(Da Yan)
2024년 07월 27일 오전 11:02 업데이트: 2024년 07월 27일 오후 12:58
TextSize
Print

18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기욤 기용 르티에르(1760~1832)는 유색 인종이지만, 당시 프랑스 사교계를 사로잡은 뛰어난 예술가다. 그는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 걸작을 남긴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뒤마와 친구이자 나폴레옹의 동생 루시앙 보나파르트의 예술 고문이었다. 또한 그는 고대, 현대사를 아우르는 뛰어난 작품을 다수 남기며 당시 프랑스 화단의 정상에 올랐다.

그림 속 르티에르

‘이사베이 스튜디오에서 예술가들의 만남’(1798), 루이 레오폴드 부알리 | 퍼블릭 도메인

르티에르와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 루이 레오폴드 부알리는 당시 사교계에서 열린 한 모임의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부알리의 1798년 작 ‘이사베이 스튜디오에서 예술가들의 만남’에는 당시 많은 예술가가 모여있다. 그들 가운데 르티에르는 붉은색 겉옷을 입고 서서 동료와 그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당시 그의 동료들이 남긴 초상화, 판화 등에 그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는 그가 당대 예술계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음을 증명한다.

기욤 르티에르

그는 프랑스 식민지 관리직을 맡은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노예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미술적 재능을 보였고, 이를 알아본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루앙으로 이주해 그가 미술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미술학교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당시 최고의 교육기관인 로마 아카데미 드 프랑스에 입학해 미술교육을 받게 됐다.

‘포트폴리오에 기대 선 여인’(1799), 기욤 기용 르티에르 | 퍼블릭 도메인

1792년 르티에르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와 파리에 화실을 차리고 미술 교사이자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1799년 의붓딸의 초상화를 살롱에 출품하며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다. 따뜻한 시선으로 대상을 세심히 관찰해 그린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그는 나폴레옹의 부인인 조세핀 황후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 작품은 후원자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담아 황후의 활기찬 모습을 아름답게 담아냈고, 그녀가 입은 예복의 세밀한 부분까지 섬세히 묘사했다.

‘황후 조세핀’(1807), 기욤 기용 르티에르 | 퍼블릭 도메인

‘조상의 맹세’

‘조상의 맹세’(1822), 기욤 기용 르티에르 | 퍼블릭 도메인

많은 초상화와 역사화를 그린 르티에르의 작품 중 1822년 작 ‘조상의 맹세’는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혁명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1804년 아이티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의 어린 시절 고향인 카리브 제도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담았다. 작품 속에는 혁명 지도자 알렉상드르 페티옹과 장 자크 데살린이 신의 가호 아래 단상에 서 있다. 그들은 아이티 국민의 헌법과 자유 수호를 맹세하며 끊어진 노예 사슬을 밟고 있다.

공화당 성향을 지녔던 르티에르는 노예제 폐지에 헌신했다. 그는 프랑스가 아이티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전에 이 작품을 그려 대담하게도 신생 아이티 정부에 선물했다.

신고전주의 작품의 웅장함

‘아들들을 사형에 처하는 브루투스’(1788), 기욤 기용 르티에르 | 퍼블릭 도메인

르티에르는 많은 주제를 다뤘지만, 그 예술의 정수는 단연 신고전주의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당시 프랑스 예술계에서는 역사화를 최고의 예술 장르로 여겼다. 역사화는 후손의 도덕적 교화를 위해 그려졌는데, 고전과 성서 속 이야기를 다루기에 한 화면에 여러 인물이 복잡한 배열로 등장했다. 따라서 역사화는 예술가의 능력을 시험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르티에르는 높은 수준의 역사화를 그려내 당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그의 작품 ‘아들들을 사형에 처하는 브루투스’는 높은 예술적 가치로 지금까지 회자하고 있다.

이 작품은 르티에르가 로마에서 학생으로 지내던 1788년에 구상한 것으로, 브루투스가 로마 공화국을 설립한 이후의 사건을 담았다. 브루투스의 두 아들은 폐지된 군주제를 복원하려 했고, 이에 브루투스는 아들의 처형을 선고했다. 이 작품은 수평으로 여러 인물과 이야기가 배열돼 두 인물의 죽음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화면 왼쪽에는 사형 집행인이 이미 처형된 첫째 아들의 머리를 들어 구경꾼들에게 죽음을 확인시킨다. 가운데는 둘째 아들이 그 광경에 경악해 정신을 잃었고, 다른 사람들은 가족의 비극을 막기 위해 자비를 구걸한다. 브루투스는 주먹을 꽉 쥐며 고통을 숨기고 결국 공화국 명맥 유지를 위해 판결을 집행한다.

‘호라이트우스 형제의 맹세’(1784), 자크 루이 다비드 | 퍼블릭 도메인

르티에르 외에도 많은 예술가가 이 장면을 그렸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브루투스에 초점을 두고 이 사건을 다뤘지만, 르티에르는 고대 로마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운집한 시민의 모습을 함께 묘사해 극적인 장면을 웅장하게 묘사했다.

‘아테네 문에서 일리아드를 노래하는 호머’

1807년 르티에르는 나폴레옹의 동생 루시앙의 천거로 로마 아카데미 드 프랑스의 학장으로 임명됐다. 그곳에서 그는 후학 양성에 힘쓰는 동시에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아테네 문에서 일리아드를 노래하는 호머’를 완성했다.

‘아테네 문 앞에서 일리아드를 노래하는 호머’(1814), 기욤 기용 르티에르 | 퍼블릭 도메인

이 작품에는 인물 서사와 시적인 풍경의 조화가 돋보인다. 화면 왼쪽에 앉은 호머를 중심으로 청중이 모여있고 나무와 건축물, 멀리 보이는 산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 쓰인 풍경 표현법은 프랑스의 거장 니콜라 푸생이 개발한 것으로, 이탈리아 시골의 풍경을 통해 고대의 목가적 분위기를 잘 구현해 냈다.

서사시를 읊는 호머를 둘러싼 청중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에 몰입한다. 호머의 왼쪽에는 긴 여정에 지친 안내자가 졸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한 쌍의 남녀가 호머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기록하고 있다.

차별을 넘어선 탁월함

르티에르가 활동했던 18세기는 노예제가 폐지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인종차별 또한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색 인종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으로 당시 예술계에서 큰 인정을 받았다. 또한 최상위 수준의 미술 교육기관 학장을 맡을 정도로 귀족과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다. 탁월한 재능과 노력으로 많은 초상화, 역사화를 남긴 그의 작품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많은 영감을 전하고 있다.

다얀(Da Yan)은 유럽 미술사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자란 그는 미국 북동부에 거주하며 미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