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프란스 할스의 ‘웃는 기사’

2025년 08월 07일 오전 9:03
프란스 할스의 '웃는 기사' 부분, 1624년 작품. 런던 월리스 컬렉션 소장.프란스 할스의 '웃는 기사' 부분, 1624년 작품. 런던 월리스 컬렉션 소장.

네덜란드 황금기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로는 흔히 렘브란트와 베르메르가 꼽힌다. 그러나 일부 감정가들, 특히 19세기 후반의 감정가들은 프란스 할스(1582경-1666)를 최고의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로 평가했다. 할스는 생전에 축제 장면과 같은 풍속화뿐만 아니라 개인 초상화와 단체 초상화로 인기를 얻었다.

그의 색조 팔레트와 화려한 붓놀림은 미국 출신 화가 존 싱어 사전트 같은 후세의 중요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전트는 “프란스 할스만큼 유화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할스의 작품에서 진지함이 부족하다는 인식은 현대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동시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보다 낮게 평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행히 2023년 대규모 회고전이 그를 위대한 거장들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했다. 런던 월리스 컬렉션에 소장된 할스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 ‘웃는 기사’를 살펴보면, 이 작품이 걸작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잊혀진 거장

할스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도시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곧 네덜란드의 하를럼으로 이주했다. 할스의 예술적 기원이나 개인적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할스의 작품들 중 가장 초기 작품은 초기 경력의 화가로는 인상적이라고 평가받는 정식 초상화들이다. 그는 곧 시민 민병대의 대형 초상화 의뢰를 받았는데, 이는 렘브란트가 작품 ‘야경’에서 다룬 네덜란드의 하위 장르이기도 했다. 1620년대와 1630년대에 할스는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탐구했다. 이러한 그림들은 일반적인 유형이 아닌 개별화된 인물들을 표현하는 능력에서 주목할 만하며, 이는 그가 그의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에서도 달성한 업적이다.

‘성 게오르기우스 시민수비대 장교들의 연회’, 1627년, 프란스 할스 작품. 캔버스에 유채; 70 2/5인치 × 101 3/10인치. 네덜란드 하를럼 프란스 할스 박물관 소장 | 퍼블릭 도메인

할스는 다양한 후원자를 둔 성공적인 화가였지만, 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네덜란드 초상화가들은 높은 수수료를 받지 못했고, 할스는 부양할 가족이 많았다. 1700년대에 학자들은 할스의 작품을 잊었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테오필 토레-뷔르거가 베르메어와 함께 할스를 재발견하여 그의 그림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감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가장 잘생긴 남자

할스의 ‘웃는 기사’는 당시 단순히 ‘한 남자의 초상’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865년 파리 경매에서 판매될 때 국제적인 화제가 되었다. 제임스 드 로스차일드 남작과 허트포드 후작 4세 리처드 시모어-콘웨이 사이에 입찰 경쟁이 벌어졌다. 후작은 추정가의 8배에 해당하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금액인 5만1000프랑(현재 가치로 200만 달러 이상)에 이 그림을 낙찰받았다. 이러한 홍보는 작가와 이 그림이 명성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웃는 기사’, 1624년, 프란스 할스 작품. 캔버스에 유채; 32 3/5인치 × 26 2/5인치. 런던 월리스 컬렉션 소장 | 퍼블릭 도메인

후작은 이 작품을 런던으로 가져갔다. 1888년 그의 상속자인 리처드 월리스 경이 왕립 아카데미 전시회에 이 작품을 대여했다. 바로 이 전시회에서 할스의 초상화가 ‘웃는 기사’라는 인상적인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그 남자가 웃고 있지도 않고 기사도 아니었다. 그림이 그려진 지 250년이 지나서야 붙여진 이 제목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전신의 3/4 길이로 묘사된 이 실물 크기의 남성은 ‘미술사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로 불려 왔다. 그의 신원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고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지만, 우측 상단의 라틴어 비문 ‘Æ’TA SVÆ 26/Aº1624’ 때문에 26세로 여겨진다. 월리스 컬렉션은 할스가 “남성 초상화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당시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활력과 생동감 있는 존재감을 작품에 불어넣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특성은 대담한 구성, 채색, 붓놀림을 다 갖춘 ‘웃는 기사’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초상화 속 남자는 분명 부유하다. 그의 옷차림은 호화로우며, 네덜란드 사회의 엘리트만이 입을 수 있었던 최신 프랑스 남성 패션이다. 1620년대(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에는 네덜란드에서 프랑스 복식을 차용한 의상이 유행했다. 금실로 장식된 더블릿에는 행운, 사랑, 미덕의 상징이 수놓아져 있다.

1620년대 초 프랑스 실크 더블릿의 예시. 뉴욕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이런 종류의 표현 기법은 이 시기 네덜란드 초상화에서는 흔하지 않으며, 할스의 학력이 높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더블릿의 스타일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 중 현재 남아 있는 희귀한 동시기 프랑스 실크 더블릿과 유사하다. 두 작품 모두 슬릿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최신 기법인 핑킹(pinking) 기법으로 인해 아래 셔츠가 드러났다. 이 초상화의 경우 흰색 리넨 소재의 셔츠이다.

‘웃는 기사’의 생기 넘치고 화려한 의상은 할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네덜란드 상류층을 그린 초상화에서 보여주는 전형적인 의복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많은 남성, 특히 기혼 남성들은 스페인 궁정의 영향을 받은 소박하고 검소한 검은색 의상을 입었다. 이는 ‘웃는 기사’보다 1년 후(162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할스의 야코프 올리칸 초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야코프 올리칸의 초상, 1625년, 프란스 할스 작품. 캔버스에 유채; 49인치 × 38 1/4인치.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올리칸 초상화의 남성은 몸을 왼쪽으로 틀어 오른쪽을 부각한 모습이어서 기혼자로 추정된다. 따라서 ‘웃는 기사’ 속 남자가 취하고 있는 반대 자세는 학자들이 그가 독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 요인이 되었다.

올리칸은 전통적이고 주름이 많이 잡힌 러프를 착용한 반면, ‘웃는 기사’ 속 남자는 1620년대에 시작된 트렌드인 더 현대적이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러프를 착용하고 있다. 여러 겹으로 된 이 러프는 린넨으로 만들어졌고 섬세한 보빈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다. 스톡홀름의 왕립 무기고에는 이 시대의 절묘한 표본이 보관되어 있다.

1620년대 스웨덴산, 목선에 촘촘히 모여진 세 겹의 고운 흰 린넨으로 된 러프, 보빈 레이스 장식. 스톡홀름 왕립 무기고 소장 | 퍼블릭 도메인

남자의 하얀 소매 끝단에는 값비싼 레이스 장식이 눈에 띈다. 할스는 섬세한 붓놀림으로 기하학적 패턴의 디테일과 섬세함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에서도 이와 유사한 실물 조각을 찾아볼 수 있다.

할스는 다양한 검은색을 포착하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는데, 이는 이 남자의 실크 망토, 허리띠, 그리고 챙이 넓은 접힌 모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남자가 왼쪽 팔꿈치 안쪽에 호화로운 금박 레이피어 검을 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에 검은 상류층 남성의 기본적인 장신구였다. 이 특정 유형의 검은 매우 희귀했으며, 이는 이 모델의 부를 더욱 강조한다.

17세기 이탈리아산 니들 레이스 테두리. 뉴욕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퍼블릭 도메인

할스가 이 남자의 복장을 묘사하는 데 보여준 눈부신 솜씨는 작가가 선택한 포즈와도 잘 어울린다. 남자는 왼팔을 허리에 얹고 자신감을 뿜어내며 마치 관객의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또한 그의 배치 역시 그림에 역동성과 생존감을 더한다. 그의 파란 눈은 반짝임과 함께 관람자를 응시한다. 그의 장밋빛 뺨, 화려한 콧수염, 미묘한 미소는 신비로우면서도 매혹적인 얼굴을 완성한다.

뛰어난 작품 ‘웃는 기사’의 명성은 미술계를 넘어 대중문화로 확장되었다. 이 그림의 이미지는 수많은 광고에 사용되었으며, 텔레비전, 문학, 연극에서 언급되었다. 400년 전에 그려졌지만,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고 생동감 넘치는 작품이다.

*이혜영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