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안티고네의 미덕

2025년 08월 18일 오전 9:34
‘죽은 폴리네이케스 앞에 선 안티고네’, 1865년, 니키포로스 리트라스| Public Domain‘죽은 폴리네이케스 앞에 선 안티고네’, 1865년, 니키포로스 리트라스| Public Domain

기원전 440년경, 극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406)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폭군에 맞선 한 소녀의 비극을 무대에 올리며 고대 그리스 세계를 뒤흔들었다. 초연이 있은 지 2000년이 넘었지만, 희곡 〈안티고네(Antigone)〉는 여전히 독자들에게 진실, 사랑, 정의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드라마로 남았다.

〈안티고네〉 속 전쟁과 신앙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베(Thebes)’를 다스리던 오이디푸스(Oedipus) 왕이 스스로 왕위에서 내려가 나라를 떠나자 ‘테베’는 혼란에 빠졌다. 두 왕자 에테오클레스(Eteocles)와 폴리네이케스(Polynices)가 서로 왕좌를 차지하려 싸우다 모두 전장에서 목숨을 잃자, 왕위는 삼촌 크레온(Creon)에게 돌아갔다.

새 왕은 에테오클레스에게는 영예롭게 장례를 치러줄 것을 허락했지만, 타국의 군대를 전쟁에 끌어들였던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로 규정하며 장례를 금지했다. “온 도성에 알리니, 누구도 이 자를 위해 애도하거나 합당한 장례를 치러선 안 되며, 시신은 독수리와 들개의 먹잇감으로 들판에 버려져 온 백성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라.”

소포클레스 흉상. sonofgroucho/flickr/CC-BY 2.0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합당한 장례를 치러주지 않는 것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장례식은 영혼이 사후 세계로 건너가 친구, 가족과 재회할 수 있게 하는 통과의례이자 망자의 여정을 관장하는 신들을 찬미하는 제의이기도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장례에 대한 그리스인의 염원이 잘 드러난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Priam)는 전쟁에 패한 뒤 아들 헥토르(Hector)에게 왕자에 알맞은 장례식을 해주기 위해 적장에게 처참하게 훼손된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 애원하는 모습이 나온다.

안티고네의 저항

크레온은 포고령에 “불복종하는 자는 죽음으로 다스리겠다”라는 조항을 추가했다. 모든 사람이 순응했지만,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누이였던 안티고네만은 오빠의 장례를 금지하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작품에서는 폴리네이케스가 전쟁에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다만 안티고네는 그의 누이로서 오빠를 사랑했기에 그것만으로도 두 오빠를 똑같이 대우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안티고네는 신의 법을 내세워 크레온의 포고령에 맞섰다. “저는 당신의 명령이,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을 넘어설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대사는 정치와 종교 간에 있던 고대 그리스 사회의 근본적인 갈등을 반영한다. 크레온 역시 훗날 신들을 거스르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 바 있지만, 그에게는 국법 또한 반드시 지켜져야 할 절대적인 것이었다. 결국 그는 “불복종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자신의 법적 권위를 세우려는 욕망이 신에 대한 경건함을 압도한 순간이었다.

반면 안티고네는 국가의 법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전통과 신의 권위로부터 인정받는 인간의 기본 상식에 배치된다면, 그 법은 거부될 수 있다고 봤다. 특히 동기가 의심스러운 사람에게서 비롯된 법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랑했던, 소포클레스 시대의 관객들 역시 권력을 장악하려는 크레온의 시도가 설령 부당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미심쩍다고 여겼을 것이다.

비극적 예언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섰다고 확신한 안티고네는 비밀리에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렀다. 이를 알게 된 크레온은 분노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대가가 무엇인지 테베 시민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기로 했다. 경비병에 의해 끌려온 범인이 자신의 어린 조카딸이자 아들의 약혼녀인 안티고네라는 것을 알았을 때, 크레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안티고네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행동을 시인하자 사형을 선고해 버린다.

이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Tiresias)가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예언자를 신의 뜻을 전하는 중재자로 여겼다. 테이레시아스는 여러 세대에 걸쳐 테베 왕실에 조언을 해왔기에 크레온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테이레시아스는 신들이 왕의 판결에 분노하고 있으며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잘못을 저질렀어도 뉘우치고 바로잡는다면 더는 어리석거나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권력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철권통치를 거두어 파국을 피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크레온은 여전히 고집부리면서 도리어 예언자를 부패한 정신 나간 늙은이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테이레시아스가 떠난 뒤 “그의 말을 따르는 것도 끔찍하지만, 저항하는 것은 더 끔찍하다”라며 심중을 관객 앞에 털어놓는다. 크레온은 마지못해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안티고네를 석방하고 모든 것을 되돌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들이 자신을 벌하여 왕위를 빼앗을까 봐 두려워한 데서 비롯된 계산된 마음의 변화일 뿐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의 변화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빠의 장례를 치러준 안티고네의 정의로움이나 오빠에 대한 안티고네의 사랑은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크레온의 후회는 너무 늦었다. 부당한 권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안티고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녀의 약혼자였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Haemon)도 그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고, 아들의 비보를 전해 들은 크레온의 아내마저 스스로 생을 마감해 버렸다. 마지막에 크레온은 자기 연민에 가득 차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이 어그러져,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이 내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구나!”라며 절규한다.

‘크레온에게 사형 선고를 받는 안티고네’, 1845년, 주세페 디오티, 캔버스에 유채 | Public Domain

안티고네가 보여준 절개

어떤 법이나 명령도 안티고네가 굳게 믿었던 진실, 즉 자신의 오빠를 사랑하고 지켜야 하며 죽은 자는 마땅히 예로써 보내야 한다는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에드먼드 스튜어트(Edmund Stewart) 교수는 “안티고네의 행동은 즉흥적인 분노도, 규칙에 저항하려는 사춘기적 반항심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동기는 훨씬 더 고결했고, 그녀의 도덕적 확고함은 본받을 만한 것이었으며, 폭군의 무자비한 위협에 맞서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용기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끝내 크레온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발상지였다고는 하나 남녀의 정치적 평등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도 감히 거역할 엄두를 못 낸 군주에게,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소녀가 공개적으로 도전했다는 것은 당시 그리스 관객들로서도 매우 급진적인 메시지였을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오빠를 향한 안티고네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리스인들의 신성한 정치적 이상인 민주주의의 가치와 결부시킴으로써 이 신화 속 여주인공을, 비록 관객과 독자 모두에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매혹적인 인물로 그려냈다.

                                                                                                                       ‘안티고네’, 1882년, 프레더릭 레이턴, 캔버스에 유채; 23 x 19 3/5 인치|Public Domain고독한 폭군

희곡에서 가장 오싹한 부분은 크레온을 둘러싼 침묵에 있다. 크레온은 그의 결정에 의문이 제기되어도 귀를 닫으며 다른 의견을 거부했고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모욕하며 쫓아냈다. 테베의 원로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동조할 뿐이다.

아들 하이몬은 왕에게 안티고네를 동정하는 민심을 전하면서 사형을 만류하고, 왕이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여겨 ‘신들마저 짓밟으려 하고 있음’을 일깨웠지만 소용없었다. 크레온은 오만하게 “이제는 도시가 내게 통치를 가르치려 드는가?”라고 일축하면서 반대 의견을 힘으로 억압하는 길을 선택했다. 폭력적인 보복 없이는 자유롭고 정직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권력자는 스스로 눈이 멀게 되어 자신의 선택이 진정 최선인지 판단하지 못하게 되며, 결국 이는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살아갈 충분한 가치

1977년, 소련 출신 이스라엘 정치인 나탄 샤란스키(Natan Sharansky)는 미국에 일급 기밀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소련 KGB에 체포돼 모스크바의 악명 높은 레포르토보 감옥에 갇혔다. 그는 앞서 수감됐던 지식인들이 남긴 방대한 장서를 읽으며 긴 시간을 버텼고, 후에 회고록을 남겼다. 그는 가장 큰 용기를 준 인물로 안티고네를 지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운명의 압박 속에서 안티고네는 기본적이면서 영원한 가치를 저버리지 않았고, 증오가 아닌 사랑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다. (중략) 고전 속 인물들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내게 달려와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 필요하다면 기꺼이 죽을 가치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임은혜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