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북송사업’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340명의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이다. 1959년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른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북송사업이 시작된 이후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의 청진항으로 향했다. 당시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 9만3340명 중 재일 교포의 98%는 고향이 남한이었고, 일본인 아내 등 일본인 68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2022년 발간한 ‘지상낙원으로 간 그들은 어디에? : 기만적 북송사업과 강제실종’은 그 실체를 규명한 보고서다. 에포크타임스코리아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을 얻어 보고서를 바탕으로 재일교포 북송사업 실체를 분석한 특집 기획을 마련했다.
1959~1984년까지 진행된 북송사업으로 약 9만3340명의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이주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후 일본에 남아 있던 재일 교포들이 자유 의지로 북한으로 이주한 ‘귀국 운동’으로 알려진 북송사업은 이를 지원한 인도주의 사업으로 흔히 설명됐지만, 이는 실상과 다르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북송피해자 가족, 탈북민, 목격자 인터뷰, 문서 수집 및 분석 작업 등을 통해 북송사업이 북한 정부에 의해 기획된 사업임을 규명하고, 강제 실종된 북송 재일교포들의 현실을 고발했다.
당시 재일교포들은 일본 내 지속적 허위 정보 유포와 기만, 협박 및 사회적 압력을 통해 북한으로의 ‘귀국’을 강요당했고, 북한 이주와 관련된 의사 결정을 위해 필요한 사실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 북송자들이 북한 이주 후 처할 상황에 대한 합의나 진정한 의미의 동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북송사업은 인도적 귀국사업이 아니라 사실상 강제 이주나 노예무역 혹은 현대적 개념의 인신매매로 봐야 한다고 보고서는 결론지었다.
25년에 걸친 대규모 재일교포 북송
북송사업에 앞장선 단체는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이다. 1955년 설립된 조총련은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동포들의 단체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북한 당국의 직접적인 지시와 지원을 받는 북한 노동당 외곽단체다. 조총련은 1984년 대규모 북송 사업 완료 시점까지 북한을 “차별 없는 기회로 가득한 조국이자 누구나 무상교육 및 무상주거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지상낙원”으로 거짓 선전했다.
북송사업은 이 외에도 일본 정부, 일본 적십자사,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묵인, 방조, 지원하에 진행됐다. 일본 정부의 묵인하에 일본의 대중매체와 지식인들은 북송사업을 인도적 사업으로 칭송하며 거짓된 북한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조작된 ‘귀국’의 꿈은 당시 국적 박탈과 제한된 교육·취업 기회로 인해 고통받던 재일교포들에게 깊은 호소력을 발휘했다.
일본 기시(岸信介) 내각은 1959년 2월 13일, 대규모 북송에 대한 ‘각의 양해(승인)’를 단행하며, 이를 “재일 한인 공동체의 귀국 요구에 대한 인도주의적 대응”으로 발표했다. 이후 일본과 북한 적십자사는 북송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으며, 일본 적십자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간의 ‘재일 조선인의 귀환에 관한 협정(일명 캘커타 협정)’이 8월 13일 공식 조인됐다.
당시 북송사업은 일본 적십자사와 북한 적십자사가 기획한 인도적 사업으로 알려져 국제적십자위원회 역시 진행을 승인했다. 협정에 따라 1959년 12월 14일 975명의 재일교포를 태운 최초의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출항했다. 협정은 1년 3개월 후 만료됐지만, 1967년 11월까지 7차례 연장됐고 이후 후속 조치를 통해 1984년까지 계속됐다.
일본 적십자사 통계에 따르면 북송사업이 1984년 공식 종료될 때까지 총 9만3340명이 187회에 걸쳐 북한으로 보내졌으며, 이들 중 81%가 사업 초기 3년 안에 북송됐다. 이들의 출신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북한 정부의 공식 발표인 조선중앙연감에는 1962년 3월까지 북한에 입국한 북송자 7만5057명 중 95.9%가 남한 출신으로 기록돼 있다. 전체 북송자 중 6730명은 재일교포의 일본인 국적 배우자 또는 자녀들이었다.
당시 북송자들은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고 유망한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희망으로 일본을 떠났지만, 이들의 꿈은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 났다.
북송자 인권 유린
북송자들은 북한 도착과 동시에 출발 전 약속과 정반대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극도로 제한된 자유, 조직적 차별이라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했다. 많은 재일교포가 북송 전 일본에서 빈곤에 시달렸지만, 북한의 상황은 훨씬 더 열악했다.
이뿐만 아니라 북송자들은 거주지 및 직업 선택의 자유 등 모든 인간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세대에 걸친 착취의 대상이 됐다. 모든 결정이 국가에 의해 이뤄지고 통제되었으며 직업과 주거지를 선택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원치 않는 강제노동의 피해자가 됐다.
게이오대학의 오코노기 마사오 명예 교수에 따르면, 북송자 대다수는 평양 이외의 시골 지역에 배치돼 광업·농업·어업·건설업 등에 강제 노동을 배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총련 관계자, 사업가, 지식인 등 소수의 선별된 북송자들만이 평양에 거주지를 배정받았으나 이들 역시 보이지 않는 차별과 직업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를 박탈당한 많은 북송자는 탈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실패해 처벌받거나 실종됐다. 북송자들은 엄격한 감시의 대상이 됐을 뿐 아니라 서로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독려받았다. 일본에 보내는 우편물 역시 정부의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이 북한에서 처한 비참한 현실을 일본의 가족에게 알리는 것 역시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북송자들은 가족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화된 모호한 표현을 통해 북한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탈북한 한 북송자는 일본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북송을 막기 위해 후에 동생이 결혼하면 그때 북한으로 다 같이 오라고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증언했다.
북송자 강제 실종
탈북 북송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북송자들은 배치된 지역에 관계없이 비공식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교류했다. 이들은 자본주의인 일본 사회 경험과 남한 출신이라는 내재적 배경 때문에 적대적 계급으로 간주됐고, 북한 주민들로부터 ‘반쪽발이’로 불리며 차별받았다.
자본주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하는 정치적 기조와 사회 분위기로 인해 북송자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북송자에 대한 차별은 김씨 일가의 독재와 세습체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더욱 체계화됐다.
보고서는 만약 북송자들이 지상낙원 약속이 날조된 것임을 알았더라면, 북한 내에서 조직적 차별의 당연한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다수는 북한 이주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생활 환경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에 북송자들이 일반 주민들보다 나은 삶을 영위했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생존을 위해 일본 친척들의 재정적, 물질적 지원에 의존했다. 북송된 오빠가 일본에 남아 있던 자신과 가족들에게 담요 100장, 옷, 책 등 다양한 물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계속해서 보냈다는 증언도 보고서에 담겼다.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 시기 일본의 가족과 연락이 끊긴 많은 북송자가 아사했다. 더욱이 북송자들은 사회적·교육적·경제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이 가진 내재적 배경 때문에 언제든 처벌받고 실종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북송 초기 평양에 거주지를 배정받고 주요 기관 고위직에 임명됐던 북송자 집단 역시 시간이 지나 반국가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간첩으로 처벌되는 사례가 많았다. 숙련된 기술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어 초기에 북한에서 환영받았던 북송자들이 정치범수용소나 기타 구금 시설로 추방된 사례에 대해서도 많은 북송자 가족이 증언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역시 “북한 정부가 자행한 납치 및 강제 실종 대부분이 한국전쟁과 1959년부터 시작된 재일교포의 조직적 이동과 관련돼 있다”며 “북송 재일교포 중 많은 사람이 외국에서 접했던 체제 전복적인 정보를 퍼뜨릴지 모른다는 당국자들의 우려로 인해 정치범수용소로 사라졌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