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진으로 전하는 감사와 자유의 기록…생명의 항해는 계속된다
안재철 ‘월드피스프리덤 유나이티드(WPF)’ 대표

‘6·25 사진전’ 20년…5800여 회 전시
자국 국기에 열광하는 외국인들…관광코스 됐다
어려운 나라에 ‘비전과 꿈’ 주는 게 대한민국의 사명
6·25는 자유 수호 전쟁…수많은 희생으로 공산화 막아내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 바람에 펄럭이는 67개국 국기와 6·25 전쟁 당시 상황을 담은 사진들은 이곳을 지나다니는 시민들에겐 이미 낯익은 풍경이 된 지 오래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20년간 이어진 ‘생명의 항해 6·25 전쟁 사진전’이다.
안재철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WPF)’ 대표가 처음부터 이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평범한 사업가로 자리 잡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전환점은 2001년 10월 14일, 뉴저지의 한 가톨릭 수도원에서 시작됐다.
지난 6월 10일, 전시회 현장에서 만난 안 대표가 들려준 사연은 이랬다. “아내가 6·25 전쟁과 관련 있는 수사(修士) 한 분이 돌아가셨다면서 성가를 불러주러 가야 한다고 해서 따라나섰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마리너스 수사의 장례미사였습니다. 1954년 가톨릭에 귀의하기 전 그의 이름은 레너드 라루인데, 그가 바로 6·25 전쟁 중 흥남 철수 작전에서 1만 4000명의 피란민을 구한 인물이란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안 대표가 장례식에서 받은 충격은 컸다. “저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역사, 특히 한국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흥남철수작전과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인도주의적 구조 활동 이야기를 처음 듣고, 제가 그토록 자신 있던 한국사조차 얼마나 무지했는지 부끄러웠습니다. 6·25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와 희생된 유엔군의 업적을 저처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고, 그게 이 사진전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당시 군수물자 운송을 위해 투입됐던 화물선이었다. 선실에 더 탈 수 있는 인원은 12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전부 짐칸이었다. 당시 라루 선장은 이 배에 선적했던 군수물자를 모두 배에서 내리고 적국인 북한 피란민 1만 4000명을 태운 뒤, 한반도 남쪽 거제도 장승포항에 전원 무사히 도착했다. 1950년 12월 25의 일이다. 항해 도중 태어난 5명의 아기를 포함해 1만 4005명은 이날 ‘생명’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는,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1만4000명을 구출한 이 역사적 사건은 안 대표의 노력으로 2004년 세계기네스협회로부터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 기록’으로 공식 인증을 받았다. 이듬해(2005) 서울에서 6·25 사진전을 시작해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 2009년부터는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도운 67개국의 국기도 함께 전시한다. 2008년엔 흥남 철수, 장진호 전투 등 6·25전쟁을 전반적으로 다룬 ‘생명의 항해’를 출간했다.

-그래서 이 일에 올인하기로 결심했나요?
“솔직히 처음부터 열정이나 사명감으로 한 건 아니었습니다. 라루 선장님을 기억하기 위해 수도원에 기념비를 세우는 정도로 생각하고 시작했죠. 2001년 이전에 하던 사업은 완전히 접었고 지금은 사진 전시회를 통해 6·25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알리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의 교훈은 뭔가요?
“6·25 전쟁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가장 끔찍했던 사건이자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으며 지금 그 결과가 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6·25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지키기 위한 자유 수호 전쟁이었고, 수많은 사람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을 방어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은 겁니다. 이젠 우리가 그런 처지에 놓인 나라들을 도와야 합니다.”
안 대표는 그런 의미를 담아 2012년 <6·25 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을 출간하기도 했다. 1240쪽 분량의 책에는 6·25 사진 1150여 장과 지도 27장이 수록됐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난 대한민국은 그 많은 나라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생존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를 도와준 나라 중에 지금 어려운 나라들이 많잖아요. 그 사람들도 대한민국 국민처럼 하나로 똘똘 뭉쳐서 노력하면 일어설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꿈을 주는 게 대한민국 국민의 사명입니다.”

-사진들은 어떻게 입수한 건가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국방성, 유엔본부 등에 보관된 자료부터 모았습니다. 그리고 레너드 라루 선장의 배에서 상급 선원으로 활동했던 로버트 러니 박사가 당시 자기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저에게 줬습니다. 러니는 카메라를 가진 몇 안 되는 선원 중 한 명이었는데, 그 사진들 속에 당시의 생생한 장면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소장한 사진만 5만 장이 넘는데 전부 고화질입니다. 이 중에 공개 안 한 것도 많고요. 오리지널 캡션이 없는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죠. 누가, 언제 찍었는지 자세히 밝혀 놨습니다.”
-전시회 사진은 어떤 기준으로 선별, 배치하신 겁니까?
“스토리텔링으로 6·25 전쟁을 보여주도록 구성했어요. 전시용으로 원래 140점씩 10세트가 있었는데 여긴 공간이 한정돼 70점만 전시 중입니다. 저는 특히 ‘휴머니즘’을 부각한 사진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쟁 와중에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는 모습이나 종교 활동 등을 담은 사진을 많이 전시합니다. 당시 미군들은 1920년대 대공황을 겪은 세대의 자녀들로, 어려운 시절을 경험해 봐서 사명감도 더 컸을 거로 봅니다.”


2010년, 안 대표는 기네스북에 ‘6·25전쟁 당시 세계 67개국이 대한민국을 지원한 기록은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 연합군으로 참전한 세계기록’이라는 기록을 하나 더 등재했다.
“6·25 당시 전 세계에 독립 국가가 91개뿐이었을 때 보잘것없는 나라였던 대한민국을 67개국이 도와준 건 공산국가들 제외하고 다 도와준 셈입니다.”
-지금까지 총 몇 차례나 전시회를 개최하셨고, 주요 개최지는 어디였나요?
“5800회가 넘습니다. 이곳에선 2023년부터 시작했는데 1년이면 365회 전시가 되는 거죠. 국내 여러 도시와 미국에서 주로 개최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태국에서도 한 번 했고요.”

안 대표는 ‘6·25 한국전쟁 사진전’이 명물이 됐다고 했다. “사진을 유심히 보는 사람의 3분의 1이 외국인입니다. 미국의 링컨 메모리얼이든, 한국의 청계천 광장이든 사진보다 국기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못사는 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 국기가 있는 걸 보고 열광합니다. 이 전시가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민간 외교를 담당한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해외 전시의 반응은 어땠나요?
“미국에서는 맥아더 기념관, 나토 페스티벌 등에서 매년 정기 전시를 합니다. 미국인들은 사진전을 통해 자신들이 한국전쟁에서 했던 위대한 일을 새삼 깨닫습니다. 많은 미국인이 ‘미국이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줄 몰랐다’며 감동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는 미국을 단순히 전쟁 국가로 인식하기도 하는데, 사진전을 통해 자국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고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미국 참전용사들도 전시회를 보고 눈물 흘리며 감사해하곤 하죠. 어느 노병은 ‘미국이 도와준 나라가 많지만 이렇게 찾아와 감사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했어요. 시골 마을에선 축제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안 대표는 미국 전체를 순회하며 사진전을 여는 게 목표라고 했다. “미국엔 6·25 전쟁 관련 기념공원, 기념비가 800개가 넘거든요. 그래서 각 주마다 전시회를 통해 우리의 캐치프레이즈인 ‘Thanks Run Forever(영원히 감사합니다)’ 그대로 참전 용사들과 그 후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서 미국에 감동을 줌으로써 한미 동맹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싶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 안보를 같이 책임져야겠다고 느끼게 하려는 의도도 있어요.”
-비용도 적잖게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6·25 자료 수집, 국내 및 해외 사진전, 책 출간 등에 300만 달러(약 40억 원)를 썼습니다. 절반 정도는 사비로, 나머지는 후원과 기부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사진 140점 한 세트 제작에 5천만 원 이상이 들어가고, 미국의 창고 유지비만 해도 매달 90만 원 정도입니다. 사진 파손, 도난도 적지 않아 어려움이 큽니다. 다행히 컴퓨터 SW 개발 분야 박사인 아내가 연봉을 많이 받아서 생활에 지장은 없습니다.”
-작년엔 『사진으로 보는 6·25 한국전쟁』을 발간하셨지요.
“6·25 전쟁 전체를 흐름 있게 보여주고, 국군, 미군, 해병대, 공군을 아우르는 균형 잡힌 사진으로 구성했습니다. 기존 책들과 비교해 두껍고 영어로 설명이 잘돼 있습니다. 특히 국군 병사들 사진을 많이 담은 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이 나라는 몇몇 지휘관이 아닌 온 국민이 지킨 나라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교육을 진작 했더라면 공산 좌익들의 반(反)대한민국 교육이 설 자리가 어디 있겠어요? 이 책 편집할 때는 9개월 동안 외출도 거의 안 하고 몰두했는데, 샘플 찍어 보고 울었습니다. 25년간 미친 짓 한 게 아니었구나 싶었죠. 주한 미군 전문가들도 최고의 사진집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간 어려움도 많으셨을 텐데요.
안 대표는 WPF가 사진전과 67개국 국기 전시를 진행하는 동안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공산 좌익 세력이 사진전에 테러를 가하는 문제를 늘 겪었다고 밝혔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 때 시위대가 전시 중인 사진들을 마구 불태우고 훼손했고, 사진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낙서 테러를 당한 적도 있습니다. 2011년에는 밤사이 테러 공격으로 69개 국기 중 57개가 철저히 파손된 적도 있었죠. 거리 전시회도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 때는 허가가 안 나서 한동안 중단됐었죠.”
-그런데도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입니까?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교육 효과가 있습니다. 또 6·25 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힘들어도 이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저를 움직이는 동력은 신앙입니다. 이 일은 저에게 맡겨진 미션이라고 믿고 있어요. 사람의 능력이나 의지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꼭 필요할 때 후원자가 나타나기도 하고, 돈이 없어 전시를 못 할 상황에 누군가 도움을 주는 일이 반복됩니다. 사실 매일매일 기적을 경험하며 감사하고 있어요.”
-이 사진전으로 관람객, 특히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세요?
“이 나라는 수많은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간 전교조의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한국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그걸 지키기 위한 숭고한 헌신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르면 미래도 준비할 수 없죠.”

안 대표는 전시를 통해 과거를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 세대에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교육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청년들은 논리적으로 교육하면 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말이 아니라 사진으로, 팩트(사실)로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글보다 직관적이고, 비주얼에 익숙한 세대에게 영향력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요즘엔 부모가 아이들 데려와서 설명해 주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이 사진전을 통해 공산주의의 실체와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알게 되길 바랍니다.”
-‘월드피스프리덤 유나이티드(WPF)’ 명칭의 배경이 궁금합니다.
“원래는 ‘월드피스 자유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등록이 취소됐어요. 그래서 같은 의미의 영어(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 이름으로 등록하고 미국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도 평화를 얘기하지만 ‘자유(freedom)’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자유’를 단체명에 포함했습니다.”
-WPF가 준비 중인 또 다른 프로젝트나 향후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6·25 전쟁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위대함을 알리는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현재 뮤지컬 ‘생명의 항해’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극본을 다듬는 단계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등장해야 한다’는 조건하에 진행 중입니다.”
파병 16개국에서 사진전을 여는 것도 그의 목표다. 최근엔 우리나라를 지원한 67개국을 초청하는 국제기구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계획서도 이미 마련됐다.
러니는 안 대표를 ‘캡틴 오브 스토리(Captain of Story)’라고 불렀다고 한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 인물이라는 의미다. 러니는 생전에 안 대표에게 수많은 당시의 사진과 유품을 넘겨주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실려 있던 구명 튜브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93년 중국에 고철용으로 팔려 분해됐다.

“이 구명 튜브를 판매해서 뮤지컬 <생명의 항해> 제작 기금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미국을 비롯해 67개국의 도움으로 자유를 지켜낸 나라 대한민국.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의 메시지를 전해 온 그의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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