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대통령’ 부각 피하고, 대통령직 수행 능력 강조
중요한 연설 때마다 인도계 싱글맘 어머니 이야기 꺼내
성차별·인종차별 이슈 띄울 때는 어머니 사연 통해 접근
미국 공화당의 강력한 경쟁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맞서,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내세운 것은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이 아닌 싱글맘이었던 인도계 여성인 자신의 어머니라는 분석이 나왔다.
해리스 부통령이 자신의 여성성에 의존해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대신, 차별 속에서 성공을 일궈낸 자기 어머니의 사연을 강조함으로써 인종 차별과 페미니즘 이슈를 자연스럽게 선거판에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이는 해리스 부통령에 관해 보도할 때 ‘첫 여성 대통령 탄생 가능성’을 언급하는 대다수 국내 언론 보도와는 상당히 다른 접근법이다.
1일(현지시각) AFP 통신은 러트거스대학교 미국 여성 및 정치 센터의 데비 월시 소장을 인터뷰해 “해리스는 당선되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것이며, 흑인 여성이자 남아시아계 인물이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게 될 것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지난달 22일 NBC 인터뷰에서도 ‘미국이 여성, 유색인종 여성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물론이다(absolutely)”라고 대답했으나 스스로 먼저 이 점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유색인종 여성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음을 왜 강조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나는 분명히 여성”이라면서도 “대부분 유권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일(대통령직)을 해낼 수 있는지, 실제로 유권자들을 위한 계획이 있는지다”라고 답했다.
월시 소장은 이는 해리스의 선거 전략이라며 “그녀는 여성의 리더십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성도 똑같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고 강하고 회복력이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월시 소장은 해리스가 자신보다 어머니의 사연을 부각함으로써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내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유색인종이자 여성 후보이니까 지지해달라는 식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해리스의 어머니인 샤말라 고팔란 여사는 인도에서 태어나 델리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1958년 19세의 나이로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대학원에 입학했다.
1950년대 흑인 인권 운동에 몸담기도 한 고팔란 여사는 1963년 자메이카계 흑인 도널드 해리스를 만나 카멀라와 동생을 낳았으나 8년 만에 이혼했다. 캐나다 맥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며 유방암 치료에 기여했으나 2009년 대장암으로 70세에 작고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번 대선 유세 기간, 중요한 자리에서는 항상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8월 민주당 전당대회 때 후보 수락 연설에서도 어머니가 겪은 인종 차별과 남긴 가르침을 말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또한 대선 ‘마무리 연설’이었던 지난달 29일 워싱턴DC 유세 때도 어머니에 관해 말했다. AFP는 이 자리에서 비판 대상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를 제외하면 그녀가 가장 많이 언급한 대상은 어머니 고팔란 박사였다고 전했다.
이처럼 유색인종 싱글맘의 딸로 태어났기에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잘 이해한다는 점 외에 해리스 부통령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택한 전략은 부드러운 화법이었다.
대선 경쟁이 막판에 이른 지난달 중순 그녀 역시 트럼프를 겨냥해 “엄청난 위험”, “제정신이 아니다” 등 거친 언사를 쏟아냈지만 유세 기간의 전반적인 태도는 온화한 편이었다.
가장 최근 사례는 지난달 말, 대선 경합주 집중 유세 때 보여준 친팔레스타인 시위대에 대한 대처다.
친팔레스타인 시위대는 노스캐롤라이나,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등 3개 경합주 순회 기간 집요하게 해리스를 쫓아다니며 구호를 외치거나 휘파람을 불어 유세를 방해했다. 바이든-해리스 행정부의 이스라엘 지원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AP통신에 따르면, 해리스는 노스캐롤라이나 집회 도중 친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항의하자 유세 훼방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는 대신 자신의 민주주의 지지를 강조하고 트럼프 비난의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친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해 “우리는 정말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달리 나는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펜실베이니아 집회 때도 친팔레스타인 시위대에 비슷하게 대응했다. 위스콘신에서는 “우리 모두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끝나고 인질들이 석방되기를 원한다. 그 목소리가 들리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말하는 중”라고 응수했다.
한 현지 언론인은 자신을 적대시하는 상대방에게 똑같이 분노로 맞서는 대신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정리하는 해리스의 대처는 지지자들의 환호를 이끌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